[북리뷰] 침묵으로부터 ‘공존의 삶’을 노래하다
[북리뷰] 침묵으로부터 ‘공존의 삶’을 노래하다
  • 손희(본지 에디터)
  • 승인 2020.01.01 0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장재선 시집 『기울지 않는 길』

 

 

 

세밑의 저녁 위로
흰 눈이 싸락싸락 내리고
바람이 멎는다
겨울도 깊어지면
소리가 없는 것
산 아래 마을에서
패 다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홀홀히 털고 웃으며
미리 만드는 무덤
그 속에 악플 들어가지 않아
생애로부터 잡풀 솟지 않고
뜻 없이 흰 눈만 쌓여있게 되기를
- 「침묵으로부터」 전문


“흰 눈이 싸락싸락 내리고 / 바람이 멎는” 세밑의 저녁에 “겨울이 깊어지면 소리가” 사라진다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그가 언젠가 다시 돌아가게 될 무덤은 “생애로부터 잡풀 솟지 않고 / 뜻 없이 흰 눈만 쌓여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어떤 세속의 얼룩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살고 싶은 시인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

대립과 갈등이 극에 달한 우리 사회에서 서로 투쟁하기보다 홀홀히 털고 웃으며 ‘흰 눈만 쌓인’ 깊은 침묵으로부터의 아름다운 ‘공존’을 꿈꾸는 시인의 화두가 돋보인다. 이 작품 외에도 시집 속에는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는 시편들이 이어진다.

최불암 배우는 추천사에서 “시집은 공존을 주제로 한다. 내가 장 시인과 평소 대화할 때마다 공감하던 주제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은근하면서도 절실히 담고 있다”고 말했다.

 

시에 효용성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변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아닐까. 춘추시대에 천하를 주유했던 공자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희(古稀)를 눈앞에 두고 고향에 돌아와 “시경(詩經)”을 묶은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다. 장재선 시인은 시집 『기울지 않는 길』(서정시학)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에 관해 해답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모두와 공존하는 삶을 노래한다.

시집의 1부는 한국인이면 알만한 사람들의 인생 한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소재로 시인의 성찰을 그려낸다. 2부는 고향과 어머니, 아버지,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며, 3부는 국내외 여행지와 거리에서 마주친 풍경에서 떠오른 느낌을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4부와 5부는 살면서 만나기 마련인 상념을 시인 특유의 두터운 사유와 예민함으로 그려내고 있다.

시집의 시작 부분은 시인이 만난 많은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한 깨달음이다. 배우 나문희, 최불암, 한혜진, 소리꾼 장사익, 가수 현숙, 산악인 엄홍길 등 시인이 오랫동안 교류한 유명 인사들의 모습을 통해서 공존의 메시지를 전한다. 노년에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나문희 배우, 주변의 사소한 것들로부터 배움을 얻는다는 소리꾼 장사익 등. 장 시인은 벼린 시어로 그들의 인생을 조망하며 삶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말한다 .

그 중에서도 나문희 배우의 시상식 장면을 담은 시편은 시인 장재선을 통과하며 거듭난다.

 

“고모할머니 나혜석이/ 한 세기 전에 길을 열어놨
기에/ 그녀도 그 길을 걸어/ 칠십육세에 도달한 배우
로/ 당당히 월계관을 쓴 채 말했다.”// “지금 아흔여덟
이신 친정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나의 부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나의 친구
할머니들, 제가 이렇게 상 받았어요/ 여러분도 다들
그 자리에서/ 상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녀 덕분에/
졸지에 악수를 하게 된/ 부처님과 하나님이/ 쌍으로
축원하는 게 들렸다./ “나무아미타부, 아멘!”
- 「수상 소감 덕분에-배우 나문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신여성이었던 나혜석 작가는 나문희 영화배우의 고모할머니다. 나혜석이 활동했던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과 자기목소리 내기는 ‘방종’으로 비쳐졌고, 비난 받았다. 나문희 배우는 세상의 축하 속에 상을 받으며, 상은커녕 온갖 욕을 먹었던 할머니 나혜석에게 감사를 표했고, 친하지 않은 두 종교가 화음하도록 했다.

또한 장 시인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연,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사회에서 비롯된 아픔을 살피며 서정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나 오랫동안 묻고 싶었네/ 어두움은 꼭 밝혀져야
하는 것일까/ 세상에 어두움이 없다면/ 들판에서
건, 도시에서건/ 살아있는 것들이 어찌 잠을 잘까/
- 어두움에게 세상의 절반을 돌려주길/ - 어두움에
게 사랑의 절반을 돌려주길.”

- 「불빛 속의 그대에게」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는 “장재선 시인은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슬픔에 자신의 언어적 초점을 둔다. 그럼에도 우울한 비판주의자나 과거 지향의 회고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본원적인 슬픔을 궁극적으로 긍정하며 내적 계기들을 풍부하게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러고도 살아가야하는 존재의 운명을 슬퍼하며 긍정하는 저자, 극장에 앉아 있는 것을 자전거 타기 다음으로 좋아하는 장재선 시인은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고려대 정외과와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 『am7이 만난 사랑의 시』, 『시로 만난 별』과 산문집 『영화로 만난 세상』 등을 출간했다. 한국 가톨릭 매스컴상, 서정주 문학상 등을 받았다. 한국 소설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냈고, 국제 PEN 회원이다. 현재 문화일보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세밑에는 장재선의 시집을 읽으며, 긴 침묵으로부터 깊어지는 ‘공존의 삶’을 음미해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