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사진에서 풍경화로 옮겨가는 그 때 그 사람들
[INTERVIEW] 사진에서 풍경화로 옮겨가는 그 때 그 사람들
  • 윤성은(영화평론가)
  • 승인 2020.02.0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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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교수 인터뷰

1월 말 개봉을 앞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은 한국 중앙정보부장 열 명의 이야기를 다룬 김충식 기자(현 가천대 교수)의 동아일보 연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2년 2개월 동안 이어진 이 연재는 1960년대 초부터 대통령 직속 국가기관으로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던 KCIA를 처음으로 크게 다룸으로써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어 52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약 30년 전에 쓴 글로, 본문만 78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폴리티쿠스, 개정증보판 기준) 아직 우리 사회에 드리워져 있는 박정희 정권 현대 정치사에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해 흥미진진하다.

영화 개봉 소식과 함께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는 『남산의 부장들』의 작가, 김충식 교수를 만났다.

대담하게 조심스럽게

윤성은(이하 윤) 한국 현대 정치사를 꿰뚫고 계시는 교수님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오늘이 우리 정치사에서 중요한 기점이 되는 12월 12일이라는 점이 꽤나 상징적으로 느껴집니다.(웃음) 먼저, 처음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연재를 시작하게 되신 계기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김충식(이하 김) 1961년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후, 18년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중앙정보부(KCIA)였지만, 아무도 그것에 관한 기사를 쓰지 못했어요. 그 시절 KCIA는 곧 법 같은 존재라 직접 데려다 가두고, 고문도 하고, 누명을 씌워서 한 개인을 파멸로 이끌기도 했기 때문에 무서웠으니까. 심지어 이름이 ‘국가안전기획부’(NSP)로 바뀌고 나서도 10년 동안 KCIA에 대해 쓴 사람은 없었죠. 그런데 1987년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민주화니 보통 사람의 시대니 떠들기에 KCIA에 대해 쓰자고 건의했죠. 처음에는 묵살 당했는데 그런데 마침 김중배 편집국장이 부임을 해서 금기가 어딨냐 못 쓸게 뭐냐고 채택을 하더라구요.

개정증보판 서문에서도 ‘엄혹한 환경에서도 KCIA를 파헤친 이 책이 빛을 보게 된 것은 한 마디로 그 분(김중배)의 결단 덕분이다’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당시 김중배 국장님과 오갔던 얘기가 있다면요?

 김중배 국장은 김충식이 언론사에 없던 이정표를 하나 세우는 거다, 네 말대로 이렇게 중요한 기관에 대해서 수십 년간 아무도 안 썼다면 그건 기자들의 직무유기다 라고 했어요. 기개가 있는 분이죠. 다만, 정보부의 그림자부터 먼저 쓰면 견디기가 어려울 테니 정치비화처럼 포장을 해서 에둘러가면서 간을 보자고 합의를 봤죠. 그런 전략까지도 세우고 시작했어요.

 그래서 책 초반에 정치스토리가 많았던 거군요.

시작은 어렵게 했지만, 당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죠. 어느 정도였습니까.

 처음에는 남산만 뜨거웠어요. 그런데 나중에 연재가 인기를 얻고 독자가 많아지니까 ‘태광 에로이카’라고 CM까지 붙었죠. 1주일에 한 번 쓰는 연재물에 그렇게 고정광고가 붙는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신문사 안에서도 효자상품이 됐죠. 정부에서는 당연히 골치아파했죠. 처음에는 오픈된 정치 얘기 위주로 쓰는 것 같더니 점점 깊게 들어가니까. 그래도 보통사람의 정부라고 천명해놨으니 별 도리가 없었죠.

각고(刻苦)의 탈고(脫稿)

 교수님의 글을 보면, 문체가 간결하고 수사는 거의 사용하시질 않았더라구요. 트루먼 카포티 같은 사람은 실제 사건을 취재해 쓰면서도 ‘팩션(faction)’이라고 했을 만큼 자신의 감정이 듬뿍 담겨 있어서 소설을 읽는 것 느낌을 주는데,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신문이 형용사를 싫어하기도 하지만, 수사를 안 쓴 가장 큰 이유는 송사에 휘말릴까봐 였어요. 정보부장들은 검사 판사도 많이 알지만, 신아무개라고 하는 정보부장은 작은 로펌의 회장이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원고지 한 칸 한 칸이 전부 낭떠러지 같은 거였죠.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신문은 큰 파급력을 갖고 있었고, 토씨 하나에 목숨 걸고 기사를 써야 했어요. 누가 명예훼손 같은 걸 빌미로 제동이 걸리지 않도록, 혹여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요. 회사도, 국장도 무엇보다 정확하게 쓰기를 바랐어요.

 기자도 인간이니까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할 때 감정을 배제하고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그게 연재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었나요?

 어려운 점 중 하나였죠. 일본에 ‘가와이’라고 하는 전설적인 검사가 쓴 책을 보면 ‘오니 겐지’, 즉 귀신같은 검사는 항상 정수리를 친다는 말이 있어요. 사무라이는 정확하게 급소를 때려서 적을 제압하는 것이 중요한데, 검사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기자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때리면 당사자의 원한은 사지 않는다는 게 기자 30년간의 경험입니다. 저는 제 직업에 충실했을 뿐이니까요.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면 원한을 살 수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사는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드라마틱하더군요. 지금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연결시켜보면 더욱 그렇구요.

1주일 간격으로 연재하려면 정말 부지런히 움직이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취재는 어떤 방식으로 하셨는지요?

 일본에 시바 료타로 라고 하는 유명한 역사소설가가 있어요. 그 사람도 기자 출신인데, 소설을 쓸 때 벽에 커다란 설계도를 붙여 놓고 채워 넣으면서 글을 썼죠. 때로는 취재할 때 그걸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해요. 나도 큰 종이에 1대부터 10대까지 KCIA 부장들 이름을 적어 놓고, 밑에 굵직한 사건들을 메모한 다음에 세부적인 것들을 채워 넣었죠. 당시 한국정치연표와 연감들을 기본으로 했고요.

 또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중앙정보부 부장들은 인터뷰에 잘 응해주지 않았을 거라 짐작이 되는데요. 미행, 도청 같은 것들은 예사로 했으니까.

 그렇죠. 기자 만나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쫓아다니고, 그들은 도망 다니기를 반복했어요. 당시 생존자가 다섯 명쯤 있었던 것 같은데 그중 김종필씨는 제가 현직 정치부 기자였으니까 자연히 계속 만나게 됐고, 김재춘씨도 가끔 만나줬어요. 김계원씨가 도통 만나주질 않았는데, 쓸 차례가 다가오는 거예요. 잠도 안 오고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였죠. 한 회에 보통 서너 개의 새로운 이야깃거리는 있어야 하는데 인터뷰를 못하면 쓸 수가 없잖아요.

그러던 어느 일요일 밤, 창밖을 보니 눈이 막 내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이 미쳤죠. 눈 내리는 일요일 밤 열 시에는 갈 데가 없을 것이다. 그 길로 김계원씨의 자택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로 갔어요. 문을 두드렸는데 처음에는 인기척이 없더라고. 계단에 앉아 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고, 또 기다렸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기를 반복했더니, 안에서 ‘누구요?’라는 소리가 들렸죠. 신분을 밝히고 확인할 것이 있어서 왔다고 하니까 자기는 사람을 안 만난다고 돌아가라고 해요. 그래도 끈질기게 기다렸어요. 결국 포기하고 문을 열어주더라구요. 그래서 그날 밤 한 시 반부터 새벽 여섯시까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기자로서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네요. 성공하기는 했지만 기자의 애환도 담겨 있구요.

 연재기간 중 문제가 된 대표적인 사건이 있는데요, 1963년 김종필을 제거해서 박정희 정권을 강화하자고 친위 쿠데타를 계획했던 인물들, 즉 대위 노태우, 정호영, 전두환, 권익현 등의 이름이 적혀 있는 수사기록 원본을 입수해서 신문에 냈거든요. 당시 노태우 정권 때였으니까 처음에 안기부에서 수사기록 유출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했지만, 참모들이 30년 된 문서고, 문제 삼아봤자 큰 이득이 없다고 노대통령을 설득해서 화를 면했죠.

 여기, 책에 사진이 있네요. 큰 일 날 뻔 하셨는데 다행입니다.

사진에서 풍경화로

 ‘남산의 부장들’은 1월중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요, 시나리오를 읽어 보셨습니까?

 네. 읽어봤습니다.

 마음에 드셨는지요?

 처음에 우민호 감독이 판권을 사겠다고 연락해왔을 때, 저는 이게 어떻게 영화가 되겠냐고 했지만 우감독은 다 구상이 있다고 하더군요.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 중에 감독을 꿈꾸면서 제 책을 봤는데 이 이야기를 말론 브란도가 나오는 <대부>처럼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더군요. 자기가 시나리오 전문가니까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사실 우감독을 만나니 반가웠어요. <내부자들> 영화를 보고 감탄했던 판이라. 나는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닌데, 후배 기자(기독교방송 권영철 대기자)한테 꼭 한번 감상하라고 권유받고 본 영화인데, 보수 언론의 세계를 너무 재미있게 잘 묘사했어요, 특히 조국일보 주필이 오른팔이 잘린 뒤에, ‘왼팔로라도 쓰겠다’ 이를 갈며 다짐하는 애드리브는 원작에도 없는 것을, 우감독이 써넣었다는 말도 들었고 해서. 기자 근처에도 안 가본 감독이 제법이다, 과연 조감독 시절부터 걸출했다는 소리가 명불허전이구나. 그런 감독이 내 책을 영화로 찍는다니.

 포부가 컸네요. 멋있어요.

 긴가민가하고 어쨌든 계약서에 사인을 했죠. 4년이 지난 후에 시나리오가 나왔다고 해서 읽어 보니까 놀랍더라구요. 생략도 있고, 비약도 있고, 심하게 극화된 부분도 있었어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나오면 기자로서 불명예스러운 일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시나리오를 쓰더라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성, 객관성만을 중요시하며 살아온 기자로서의 관점으로 시나리오를 보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시나리오의 얼개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않기로 스스로 정리를 했습니다. 저는 18년 동안의 사진첩을 만들었고, 우민호 감독은 그 사진첩을 바탕으로 풍경화를 그렸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서로의 입장과 방향이 다른 거죠.

 정말 적확한 대비입니다. 사진과 풍경화.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서 교수님께 묻지는 않던가요?

 이병헌(김재규 역)씨가 물어봤어요. 역시 프로답다는 생각을 했죠. 10.26 사태가 일어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김재규는 사무라이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던 데다 차지철이라고 하는 후배에 밀리는 것에 대한 반감, 그가 공판정에서 증언한 대로 유혈사태를 맡기 위한 국가에 대한 나름의 충정까지도 뒤섞여 있었다는 걸 얘기해줬죠.

또 곽도원씨가 자신이 맡은 김형욱에 대해 묻길래, 지금도 무서워할 정도의 사디스트라고 했더니 벌써 표정이 바뀌어요. 옆에 있던 우민호 감독도 ‘저것 봐, 벌써 표정이 달라졌어’ 라고 하더군요. (웃음) 그 밖에도 시나리오 상에서는 차지철이 지나치게 가벼운 권력 추종자로만 되어 있어서 그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는데 그런 부분이 반영된다면 더 무게감이 생기지 않을까 라는 말도 해줬습니다.

 상업영화다 보니 아무래도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기는 했겠지만, <남산의 부장들>이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끝으로 지금은 교편을 잡고 계시지만, 30년간 정치부 기자를 역임하셨고 『남산의 부장들』을 집필한 작가로서 분열된 2019년의 한국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우선, 박정희 정권이든 노무현 정권이든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봐요. 다 명암이 있기 때문이죠. 실패한 부분이 있다면 그 원인을 찾아서 개선해 나가야 우리 사회에 발전이 있을 것이고 국민들의 고통도 덜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자꾸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미세먼지도 그렇고 탈원전, 미중무역분쟁, 청년실업 등은 진보, 보수의 논리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죠. 확증편향에 사로잡히지 말고, 수많은 전문가들과 개방된 지식을 통해서 함께 해결해나가야 할 것이라 봅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원작자 김충식(金忠植, 1954~)은 고려대학교 철학과와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신문방송학 석사), 게이오기주쿠대학교 대학원(언론학 박사, 미디어 저널리즘 전공)을 졸업했다.

1977년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30년간 일했으며, 주로 정치부에서 국회 정당, 청와대 외무부를 출입했다. 현장 기자로서 금단의 성역이었던 중앙정보부, 즉 KCIA(KOREA CENTRAL INTELLIGENCE AGENCY)를 심층 해부해 보려는 열망에 불타, 1990년 김중배 편집국장(나중에 한겨레신문 사장, MBC사장)에게 건의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남산의 부장들』은 압력과 회유 협박 속에서 장장 2년 2개월 동안 연재되어,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전두환·노태우 대위가 1963년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는 증빙인 수사기록을 최초로 발굴, 폭로함으로써 구속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렇게 파헤친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남산(중앙정보부)이 벌인 정치공작과 비화·비사는 단행본으로 출간돼 한일 양국에서 52만 부가 팔리는 대반향을 몰고 왔다. 저널리스트의 논픽션 저술로 최대의 베스트셀러 기록을 가진 이 책의 개정 증보판은 2012년의 시점에서 대폭 가필 손질하고 170여 명이 넘는 주요 인사들의 프로필을 추가한 게 특징이다.

저자는 1993년에 평기자로서, 30대에 최연소 논설위원으로 발탁되었다. 한국기자상을 두 번 수상(1984년, 1993년)했다. 문화부장, 사회부장을 거쳐 2002년부터 3년간 도쿄특파원 겸 지사장으로 주재하며 <아사히신문> 등에 칼럼을 썼다. 2004년 도쿄대 대학원(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정치와 보도’ 과목을 1년간 강의했다.

저서로 『남산의 부장들』 『슬픈 열도』 『법에 사는 사람들』(공저)가 있고, 번역서 『화해와 내셔널리즘』(2007) 등이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차관)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가천대학교 특임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 《쿨투라》 2020년 1월호(통권 6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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