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한국문예영화] 아메리카, 그리고 구라파적 취향과 관심
[movie 한국문예영화] 아메리카, 그리고 구라파적 취향과 관심
  • 김종원(영화평론가, 영화사 연구자)
  • 승인 2020.02.0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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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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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도 스쳐보지 못한 세월의 회상

  1956년 이른 봄, 나는 박인환의 사망 소식을 조간신문을 통해서 들었다.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어느 예술대학에 갓 들어가 신세를 지고 있던 서울 미아리의 한 친지의 집에서였다. 그래서 박인환과의 인연은 당연히 없다.

  여기서 굳이 ‘당연히’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가 정상적인 삶을 살다 갔다면 가깝게 지내며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전제된 것이다. 실제로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동참하며 그와 모더니즘 시운동을 같이 했던 이봉래, 김규동 씨 같은 문단의 선배들과는 나이 차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각별하게 지냈다. 비록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시를 쓰고 한때는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영화평론 활동을 한 그의 이력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랬을 가능성이 많다.

  필자 역시 1959년 시단에 등단한 이후 같은 해부터 영화평을 쓰고 잠시나마 신문사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감히 그와 공통된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박인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은 피난지 부산에서 발행하던 월간 학생잡지 《수험생》(1952년 11월호)에 실린 그의 시를 읽게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세계적으로 각광받던 시인 T.S 엘리엇의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거의 모두가 미래의 시간 속에 나타난다.’는 시 한 구절을 전문으로 내세운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이 잡지가 주최한 전국고등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응모한 필자의 습작시 「보리밭」이 입선되었다.

이처럼 박인환과는 옷깃조차 스쳐보지 못했지만, 기성시인과 문학 소년이라는 상반된 인생의 여정 속에서 6·25가 휩쓸고 지나간 1950년대의 잿빛 폐허와 정서와 열병과 같은 예술사조를 공유한 셈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950년대 초부터 필자가 데뷔한 1950년대 말까지 한국에는 여전히 모더니즘시의 상징인 T.S 엘리엇의 「황무지」와 「이방인」으로 대표되는 알베르트 까뮈의 부조리철학,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등 실존주의 문학이 성행했고, 그가 자주 언급했던 캐롤 리드의 <제3의 사나이>(1949)며 마르셀 카르네의 <인생유전>(1944)은 물론, 존 휴스턴의 <물랑루즈>(1952)와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1948) 등 네오리얼리즘 영화도 변함없이 회자되고 각광을 받았다.

  박인환이 스물다섯 살 때 체험한 동족상잔의 전쟁과 이산의 끝자락에서 필자는 그가 즐겨 찾았던 명동 거리와 동방살롱을 기웃거리는 대학생이 되었다.

  한국의 영화평단은 1925년 이구영이 《매일신보》(1925년 1월 1일)에 「조선영화의 인상」이라는 글을 쓰면서 싹이 트게 되었다. 여기에는 <춘향전>(1923, 동아문화협회 작품)을 비롯한 <장화홍련전>(1924, 단성사 촬영부 제작), <해(海)의 비곡(秘曲)>(1924, 부산 조선키네마 제작), <비련의 곡>(1924, 동아문화협회 제작) 등 네 편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춘향전>은 1923년 조선총독부가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만든 계몽영화 <월하의 맹서>에 이어 민간인이 최초로 제작한 흥행영화이다.

  잇따라 심훈이 「조선영화의 현재와 장래」(조선일보, 1928년 1월 6일), 「영화비평에 대하여」(별건곤, 1928년 2월호)를 통해 평필을 둔데 이어 윤기정이 「조선영화는 발전하는가」(조선지광, 1928년 11,12월 합병호), 서광제가 「조선영화의 실천적 이론」(중외일보, 1929년 10월 25일~26일), 박완식이 「발성영화의 국산문제」(동아일보, 1929년 12월 24일~27일), 임화가 「서울키노 영화 ‘화륜’에 대한 비평」(조선일보, 1931년 3월 25일~4월 3일), 김정혁이 「조선영화의 현실과 전망」(조광, 1940년 4월호)으로 각기 영화평단에 합류하였다.

  해방 후에는 《자유신문》, 《중외일보》, 《경향신문》, 《대동신문》, 《조선중앙일보》 등 주로 해방정국에서 난립하던 일간지들이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 ‘영화평’ 난을 신설하고 <자유만세>(최인규 감독), <민족의 새벽>(이규환 감독), <새로운 맹서>(신경균 감독)와 같은 ‘국산영화’ 평을 게재했다.

  서울과 부산 등지의 신문, 잡지 등에 영화 관련 글을 쓰던 인사들이 ‘영화평론가협회’라는 조직체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10일 임시 수도 부산에서였다. 모임은 서울에서 피란 온 오종식(회장)을 비롯한 오영진, 김소동, 허백년, 이진섭, 유두연, 황영빈 등과 《국제신보》, 《부산일보》, 《민주신문》 등 현지의 신문지면에 영화평을 쓰던 이봉래, 박인환, 부산의 이청기 등 문화계 인사 11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모임은 환도 후 한두 차례의 행사를 치른 다음 해체된다. 뒤이어 평필을 든 그룹이 이영일과 김종원 등이었다

 

서구적 취향, 박인환이 고수한 ‘아메리카’의 의미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나면서 영화기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가운데 건국의 격동과 6·25 동란을 겪은 빈약한 영화계에 나타난 박인환의 존재는 단연 이채로웠다. 이미 엔솔로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으로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그의 영화평론 활동은 사실상 이보다 한 해 앞서 시작되었다. 서울신문사가 간행하던 월간 종합잡지 《신천지(新天地)》 1948년 1월호를 통해서였다. 「아메리카영화 시론(試論)」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론은 사실상 그의 대표적인 평문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 아메리카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클로니의 세계, 오락성, 문화와 영화, 예술성, 향수와 판타지, 감상 등 여섯 묶음으로 된 「아메리카영화 시론」은 미국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메리카영화의 역사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아메리카 문화와 사상의 유동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지였다.

요즘 신문이나 잡지에서 읽을 수 있는 아메리카의 사회현상, 그리고 유나이티드 경마장 풍경, 새로운 형의 자동차 경주 등으로서도 아메리카의 측면을 알 수 있다. 사상을 알려고 하는 것은 약간 힘들지는 모르나 트루먼 대통령의 의회연설이 절대적인 찬성리에 그치고 그 다음 날이면 아메리카 시민은 모두들 이 연설이 가진 의의를 잊어버린다. (중략) 아메리카가 신세계였으므로 기다릴만한 전통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아메리카영화의 이면은 더욱 비참한 것이다. 우리는 클로니 문명을 절대적으로 알지 못하면 아메리카, 즉 클로니의 세계를 말할 수 없다. 오늘의 아메리카의 표정, 그 비극성은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늦게 영화에 나타났다. (1. 클로니의 세계)

  이런 관점에서 박인환은 아메리카영화의 숙명이 오락성에 있음을 강조한다. 관객층에게 만족하게 하려면 고답적인 영화는 벌써 실패로 간주한다. 예술영화를 ‘고답적인 영화’로 바라보는 그의 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메리카영화는 오락영화로선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단연 우수하다. 그것이 비교적 재미있고 기교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은 아메리카영화의 제작기구와 필요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이다. 전통이 없는 아메리카에서 영화가 기성예술에게 방해 당하지 않고 자유스럽게 진행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웠으나, 오락 이상의 것을 추구한 사람들에게는 불만을 주었다. 완성기 이후의 영화가 그 예술적 완성을 본 것은 차라리 아메리카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하였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2차대전 전 <꺼져가는 등불>, <평원아>, <잃어버린 지평선> 등은 서정시적인 데도 있으며 대체로 꿈과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었다. 이 무렵의 아메리카영화는 무난한 오락성을 가지고 있었다. 꿈을 그리고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영화가 처음부터 지닌 커다란 특징이었다. (중략) 아메리카영화는 무슨 일이 있다 하여도 예술성보다 오락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관객을 실망하게 한다. 관객층에게 만족하게 하려면 고답적인 영화는 벌써 실패다. (2. 오락성)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아메리카영화가 스타 중심으로 오락성 위주의 작품만을 기계적으로 양산한다면 할리우드는 정서 없는 예술가의 집단이 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2차 대전 전의 미국영화 중에는 서정시적인 것과 꿈을 그린 무난한 오락성의 영화도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결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물질문화가 극도로 발전하고 전통의 배경이 없는 아메리카는 예술의 온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라파의 예술가들이 걱정하고 있는 탈피의 고뇌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이다. 아울러 그는 아메리카영화와 비교하여 구라파영화(주로 프랑스영화)를 논하였다.

구라파영화는 내향성이고 아메리카영화는 외연성(extérieur)이라고 한다. 현대의 아메리카 문학의 특색을 문학자들이 표현할 때 ‘외영적 방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처럼 아메리카영화는 외연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아메리카영화에서 불란서영화의 내향성을 찾고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술을 부정하는 것은 틀린 일이다. (중략) 예술적인 영화를 만들고 아메리카영화의 발전에 지금까지 힘써온 사람 중에 예술적 앙양성을 가진 아메리카영화작가들이 몇 명이나 되는가. 지금까지 아메리카영화의 예술적 작품은 모두들 구라파의 영화작가들의 것이었다. (4. 예술성)

  그는 그 예로서 프랭크 카프라, 조셉 폰 스턴버그, 루이스 마일스톤, 프리츠 랑, 그리고 줄리앙 뒤비비에,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등을 꼽았다. 이탈리아 시칠리 출신인 프랑크 카프라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과 <우리 집의 낙원>(1938)으로, 조셉 폰 스턴버그는 <모록코>(1931)로, 루이스 마일스톤(1895)은 제1회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작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1930)로, 프리츠 랑(1890)은 <메트로 폴리스>(1927)로, 줄리앙 뒤비비에는 <망향>(1936)으로, 그리고 알프레드 히치콕(1899)은 <레베카>(1940) 등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친 세계적인 영화감독들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후반 사이에 제작된 영화지만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에야 들어왔다.

  구라파영화가 내향성이 강한 데에 비해 아메리카영화가 외연이라는 것은 전자가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는 쪽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서술 곧 사건 전개에 중점을 둔다는 의미일 것이다. 흔히 사건(외형)만 그려져 있고 사람(인간의 내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여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박인환은 아메리카영화 예술가는 관념적이나마 재래예술의 본질적인 외면 묘사에만 고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판타지를 그려냄으로써 불건강한 생리를 돕고 물질의 허식으로 된 아메리카의 사회에서 도피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메리카영화는 탄압을 당한 몇 명의 예술가의 영화 외에는 모두 우리의 사상보다도 퇴보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6. 감상) 그 배경에는 영화의 제재와 주인공을 모두 자본주의 문명과 사회에 충실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데에 전력을 다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박인환이 미국을 일관되게 ‘아메리카’로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그의 시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사람이 살고/ 많은 사람이 울어야 하는/ 아메리카의 하늘에 흰 구름’ 또는 ‘아메리카는 휘트먼의 나라로 알았건만’ 따위의 표현이다. 「어느 날」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미국의 지칭이다. 그는 유럽영화는 한문식 표기대로 구라파영화라고 하면서도 미국영화만은 굳이 원어를 앞세워 ‘아메리카영화’로 쓰고 있다. 당대의 언어 관행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영화감독 안철영(「영화의 자재난」, 《경향신문》, 1946, 12, 15) 이나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는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다음에 예시하는 영화평론가 이대우의 「미국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경향신문》, 1946, 10, 31)를 읽게 되면 박인환의 ‘아메리카’ 의 고수 현상은 더욱 분명해진다.

필자는 해방 직후에 본 지상에 미국영화는 저급 속악한 것이라고 규정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또한 해방 직후에 필자가 본 미국영화가 전전 작품이었던 관계도 있다. 그러나 그 후 전시와 전후 제작에 속하는 미국영화 <폭풍의 청춘>, <나의 길을 가련다>, <황야의 결투>, <콜시카의 형제>, <제인 에어>, <재회> 기타를 통하여 볼 때 전전의 미국영화의 불명예스런 기성개념이 완전히 전복되고 최근 수년간의 미국영화는 놀랠 정도로 고상하게 된 것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 이태우 「영화시론/ 조선영화와 문학」 경향신문, 1949년 12월 8일

  이런 경향은 그의 서구적인 취향과 어감의 뉘앙스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서구 지향적인 취향은 대표작에 속하는 「목마와 숙녀」와 「최후의 회화(會話)」, 또는 「어느 날」, 「센티멘털 저니」, 「무희가 온다 하지만」 등의 시에 나타나는 비유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목마와 숙녀」)과 ‘함부로 개최되는 주장의 사육제/ 흑인의 트럼벳’(「최후의 회화」), ‘카프리 섬의 원정’(「센티멘털 저니」), ‘이야기를 주고받는 젊은 경찰관은 마치/ 그레이엄 그린의 주인공 스코비와 같은 웃음.(「무희가 온다 하지만」) 등이 바로 그런 예이다. 산문 「가을과 위스키」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가을의 향기가 있다면 그것은 스카치위스키의 애달프고 가냘픈 향기 정든 친구들끼리 스탠드바의 문을 열어보자.’

  미국이라는 단어 대신 그가 ‘아메리카’를 고수하는 데는 고루한 느낌을 주는 ‘미국’ 보다는 ‘아메리카’를 본디 모습으로 여기는 인식과 이국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영화를 바라보는 박인환의 애정과 고언

  박인환은 한국영화의 당면 문제에 대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1954년 자유당 정권의 이승만 대통령이 국산영화의 진흥을 위해 입장료에 대한 면세 조치를 단행하자 ‘이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최초이며 현재 곤란에 처해 있는 영화계의 제반 실정 및 앞으로의 발전을 위하여 큰 서광이 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무세를 계기로 한 인상적인 전망’이라는 부제를 붙인 「한국영화의 현재와 장래」(《신천지》, 1954년 5월호)에서 그는 환영의 뜻과 함께 제작, 감독, 시나리오, 배우 등 한국영화계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적시하고 개선을 요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제작자는 영화에서 문제시되어 오지 않았다. 대개의 작품은 영화감독이 구상하고 그 비용을 여기저기서 주선하였다. 그보다도 비용을 지출하는 자를 ‘물주’라고 부르고 이들은 영화에 대한 아무 식견도 없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차음부터 한국영화의 애로가 있는 것이다. 구미의 예를 들기 전에 지금 전 세계 영화는 제작자 중심으로 나가고 있다. 훌륭한 제작자 아래서 좋은 작품이 나오게 마련이고 이들은 영화제작의 계획을 위해서는 작품 선택에서 배우들에게까지 이른다. 그런데 한국영화는 그렇지 못했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영화의 기업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여 감독이나 연기자가 비용에까지 골몰해서는 도저히 ‘예술’을 할 수 없었다는 것도 증언될 수 있다. (- 제작자의 문제)

영화감독은 영화의 근본적인 것을 터치하고 있다. 제작자가 계획하면 감독의 손에 의하여 작품의 질과 수준이 결정된다. (중략) 이규환 씨는 무세 소리를 듣고 맨 처음으로 메가폰을 들었다. 그것이 「춘향전」의 영화화다. 여기서 좀 생각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춘향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일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 로맨틱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관객은 선전하지 않아도 한번은 와볼 것이라고 착안한 데서 착수한 것 같은데 이것은 그리 훌륭한 영화작가의 계획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감독의 문제)

나는 영화를 제작하는 데 제일 먼저의 조건은 시나리오에 있다고 본다. 우선 시나리오의 가부에 의하여 좋은 영화의 구분이 성립되는 것이다. 한국영화 제작자나 감독들도 서로 ‘시나리오의 빈곤’을 한탄하지만 그들에게도 그 모순이 있는 것이다. (중략)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시나리오 모집을 해서 그중 우수한 것이 있으면 영화제작자에게 선택시켜 주는 것도 한국 영화문화를 위하여 힘써 주는 방도인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 시나리오의 문제)

한국영화를 말할 때 배우가 없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것도 지금까지 한국영화의 부진에서 기인되는 일이다. 즉 영화가 없는 연기자가 있을 수 없고 지금까지의 영화 연기자는 그들의 생계조차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전택이, 송억, 구종길, 황남, 이집길, 김일해 씨 등이 오늘날까지의 영화에 출연했고 최은희, 김신재 씨 등이 히로인이 되었다. 허나 그들의 연기력이란 보잘 것이 없는 것이다. (- 배우의 문제)

  이상과 같이 박인환은 한국영화계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짚어가며 개선을 강조하였다. 국산영화의 면세 조치가 195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형성하는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한국영화의 현재와 장래」는 시의적절한 발언이었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 한국영화의 상황과 당면과제를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박인환이 두 번째 거론한 ‘감독의 문제’이다. 면세 소식을 듣고 맨 처음 「춘향전」의 영화화에 착수한 이규환 감독에 대해 그는 이 작품은 잘 알려진 고전으로 선전하지 않아도 한번은 와볼 것이라고 선택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내용과 관련된 것이다. 결과는 그 반대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대의 스타 조미령과 이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규환의 <춘향전>은 1955년 1월 16일 국도극장에 개봉되어 2개월에 이르는 장기 흥행 끝에 서울 인구 150만 명의 10%에 가까운 12만 명이 관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흥행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변수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지리산 기슭에서 암약하는 빨치산의 묘사를 둘러싸고 논란을 일으킨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에 대해서도 박인환은 특유의 목소리를 높였다.

스토리는 그리 유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듣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지리산 공비들의 생활과 의견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많은 결함을 가졌기때문에 그 모순으로 인하여 자멸하여 버리고 끝으로 자유를 그리워하던 한 여자만이 남게 된다는 지극히 멜로드라마틱한 것이다. 더욱 공비들이 윤간하는 시추에이션은 마치 조셉 폰 스탄버그가 일본에서 영화화한 <아나타한>과 비슷한 아이디어이며 사실 그러한 사건도 지리산 공비들 간에서는 많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용을 형성해 주는 하나의 요소로서의 시나리오는 무엇을 의식하고 묘사하려고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영화의 객관적 조건, 즉 예리하게 감리(監理>하고 비판한다는 정신과는 너무 멀며 미숙한 습작기의 작가가 빠지기 쉬운 테마에만 사로잡혀 공비의 생활과 의견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데가 있다. (중략) 치밀한 연기 지도에서 온 심리의 묘사 같은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내용의 모순이 주는 영향 때문에 이러한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말았다. <피아골>은 그 표현기법에 있어서는 해방 후 가장 성공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하 생략)
(「‘피아골’의 문제/ 모순 가득 찬 내용과 표현」, 《평화신문》, 1955년 8월 25일)

  박인환이 중시하는 시나리오의 완성도 문제는 여기에서도 예외 없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객관적 조건을 갖추지 못한 시나리오의 미숙을 질타하면서도 연출자의 표현기법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공산 오열이 출몰했던 전남 구례군 지리산의 ‘피아골’ 골짜기 일대에서 촬영한 이 영화는 그 뒤 빨치산들의 내면생활과 ‘단말마적인 최후’를 그린다는 제작 의도와는 달리 반공영화로서는 타당치 않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대체로 문제가 된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와 비판성의 결여, 빨치산인 여주인공 애란(노경희)의 귀순 동기가 애매하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였다. 논란 끝에 ‘빨치산을 영웅화’ 시킨 것으로 간주되는 여섯 군데의 장면이 삭제된 뒤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왜 밀항하였나」(《재계》 1952년 8월호)의 경우는 일부 영화사 연구자들에게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기록이다. ‘악극계의 손목인, 신카나리아, 박단마 등 10여 명’이라는 부제에 묻혀 자칫 외면당할 뻔한 영화제작자 안경호(安慶鎬)의 「밀도일 진상기」를 통해 그동안 기록만 있고 실체가 없었던 독립운동 관련 장편 기록영화 <민족의 절규>(전 3편)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6·25 이전에 1, 2부를 완성해 놓고 3부는 촬영을 끝낸 채 마지막 현상만을 남겨놓은 단계였다. 박인환은 여기에서 당시 이 영화의 완성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비록 영화평론과는 거리가 있긴 하지만 당시의 영화계 실정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글이다.

15톤 가량 되는 밀항선이었다. 안경호는 3만 피트 이상의 촬영된 필름을 생명처럼 거느리고 지난번 두 차례나 일본에 갔었다. 그곳에서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영화의 현상, 녹음, 편집, 음악, 자막 등 현대 기록영화로서 제반 조건을 구비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겨우 완성되었던 것이 6·25 이전의 <민족의 절규> 제1부 및 제2부인 바 이것은 최초의 목표는 고사하고 그의 미숙한 촬영 기술로서 어떤 기술적 수준에서는 영화 이전의 것이었으나 해방 후 영화인 대부분이 좌경하여(중략) 공산주의 침투만을 획책한 영화 제작에 급급한 가운데 분연 안(경호)은 민족 진영을 위한 유일한 아마추어 카메라맨으로서 제1보를 내디뎠다. (중략) 이와 같은 영화가 그 당시나 현재의 한국의 영화기술로서는 도저히 완성시킬 수 없기 때문에 두 차례나 무시무시하게도 밀항(도일)하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는 9·28수복 후 유엔군에 종군하면서 찍은 전선 묘사와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시민들로부터 환영 받는 장면, 한반도 북단 초산(楚山) 진출에 따르는 압록강의 유구한 흐름, 그 후의 철수작전 등 최선을 다해 촬영한 정경들이 담겨 있다고 했다. 천연색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현상조차 할 수 없어 공보처의 추천을 받아 외무부에 여관을 신청했으나 나오지 않아 밀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박인환은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증언은 <민족의 절규>의 프린트가 6·25에서 9·28 사이 공산군에게 탈취되어 현재 한국에는 단 1권도 없는바 겨우 6·25 전 일본에서 완성할 때 두고 온 원판이 남아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의 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기록영화에 미친 사나이 안경호, 그는 벌써 일본에 3회나 밀항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남긴 것은 <민족의 절규> 1, 2부이며 이번엔 총천연색 영화 <대한민국 건국사>(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를 선물로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의 입장, 명예와 모험과 욕설과 곤란이란 희비 4중주를 인생의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밀항이라든가 시문의 비난쯤은 문제가 아니다.

  이 원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민족의 절규> 제1부와 제 2부가 6·25 때 없어지고 제3부에 해당하는 원본이 일본 어디엔가 남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3부는 별도로 <대한민국 건국사>라는 제목을 붙일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앞뒤의 상황으로 볼 때 이영화는 동시녹음으로 촬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천연색 필름 현상이 불가능한 1950년대 초의 한국영화의 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1949년 6월 7일자 《서울신문》(「독립운동의 기록영화 ‘민족의 절규’ 제3편 전7권 수(遂)완성」)은  이 영화가 수개월 전에 상영되었음을 환기시키고 제3부가 제작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민족의 절규> 필름이 한국영상자료원에 입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이 오리지널 네가필름인지의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박인환의 글을 통해 알게 된 제작 일화와 안경호의 신상 자료를 추가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수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인환은 이밖에 <카사블랑카>를 반나치주의의 작품으로, 빌리 와일더의 <잃어버린 주말>을 뉴로티슴 경향의 영화로 분류하는 등 여덟 부분에 걸쳐 예술적 특징과 발견의 양상을 살펴본 「문화 10년의 성찰」(《평화신문》, 1955년 8월 13~14일)을 비롯하여, 마르셀 카르네의 감독정신을 언급한 「영화의 사회의식과 저항」(《평화신문》, 1955년 1월 16일), 옛 문화재와 정서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 신상옥 감독의 <코리아> 평 「한국영화의 전환기」(《경향신문》 1954년 5월 2일), 시네마스코프의 장점과 단점을 짚어본 「시네마스코프의 문제」(《조선일보》, 1955년 7월 24일), 면세 이후의 제작 동향을 알아본 <산고중의 한국영화들>(《신태양》 1955년 9월호), 그리고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과 엘리자 베스 테일러 주연의 <내가 마지막 본 파리>에 대해 쓴 「서구와 미국 영화」(《조선일보》 1955년 10월 9, 11일)와 게리 쿠퍼, 잉그리드 버그만 등 8인을 소개한 「전후 미, 영의 인기배우들」(《민성》 1949년 11월호) 등을 발표하였다. 국내외의 영화와 감독, 배우에 대해 쓴 그의 영화관련 글은 20여 편의 영화평론을 포함하여 모두 30여 편을 헤아린다.

  박인환은 서정주의와 사실주의를 결합시킨 시적 사실주의를 선호했다. 그가 구라파영화를 논하면서도 ‘주로’라는 단서를 달고 언급한 프랑스 영화의 리더들, 이를테면 줄리앙 뒤비비에, 마르셀 카르네 등이 추구한 영화세계였다. 이들은 <무도회의 수첩> (1937), <인생유전>(1944) 등을 통해 암울한 인생관을 서정적 표현으로 표출한 영화작가들이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미국의 조셉 스턴버그, 프랭크 카프라, 알프레드 히치콕조차도 실은 유럽 출신이었다. 동시에 그는 판타지를 옹호하였다. 미국의 일부 영화예술가는 판타지를 그려냄으로써 물질의 허식으로 찬 아메리카의 상황에서 도피했다고 보았다. 이는 시적 리얼리즘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그 중심에 허무주의와 현실도피적인 의식이 내재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박인환의 영화평론과 에세이는 첫째 「그들은 왜 밀항하였나」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정보전달의 기능을 수행했고, 둘째 아메리카영화로 호칭하는 일관된 자세로 미국영화에 대해 비판적 애정을 표시했으며, 셋째 이와는 상반된 표기 방식으로 구라파영화가 추구한 예술성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한국영화계의 현안과 당면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과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이 그 네 번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원
1937년 제주시 출생. 1957년~59년 《문학예술》 및 《사상계》 시 추천 등단. 1959년 《시나리오문예》를 통해 영화평론 활동 시작. 1960년 이영일 등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족. 저서로 『영상시대의 우화』 『스크린 인생론』 『우리영화100년』 『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 등이 있음. 청룡영화상 제1회 정영일영화평론상 수상.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제2대와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제3대 회장, 청주대, 동국대 대학원, 한예종 겸임교수 역임. 2011년~현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상임고문.

 

 

 

* 《쿨투라》 2020년 1월호(통권 6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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