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Theme] 도피하는 청춘에 대한 사회학적 논구
[3월 Theme] 도피하는 청춘에 대한 사회학적 논구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0.02.28 1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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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은 동아시아적인 개념이다. 못 믿겠다면 이 단어를 영역해보라. youth(fulness)? adolescent? young generation? 이런 단어들은 그저 젊은 연령대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젊은이’라고 옮기는 편이 낫다. 청춘靑春은 젊은 세대가 인생의 꽃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함축하는 용어이다. 이 말을 직역하면 blue(green) springtime 혹은 blossomy age 정도가 될 것인데, 서양인들은 이런 표현으로 젊은 세대를 지칭하지 않는다.

 요컨대 ‘청춘’은 번역할 수 없는 지역어이다. 실제로 청춘을 형상화한 예술작품은 대부분 동아시아(한/중/일)에서 나왔다. 혹자는 샐린저나 장 콕트의 소설이, 혹은 앨런 긴즈버그의 시와 니컬라스 레이의 영화가 ‘청춘’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너무 진중하고 비극적이거나 위악적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 시리즈가 약간 청춘물 느낌을 내긴 하지만 그 속의 주인공들은 청춘보다 아동에 가깝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청춘물’은 얼마간 명랑하고 교훈적인 희망을 품고 있다. 1970년대에 영화화되기도 했던 『얄개전』(조흔파)과 최인호/이문열의 청춘소설, 1990년대에 등장한 ‘신세대’ 작가 김연수와 김경욱 초기작, 1990년대에 나온 일본 영화 <으랏차차 스모부>와 한국 영화 <태양은 없다> 등등을 떠올려보라. 그 속의 등장인물들은 쓸데없는 일에 골몰하는 말썽쟁이인데, 그들이 좌충우돌하면 살아가는 모습은 사랑스럽고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가령 <튼튼이의 모험>의 경우 주인공은 빽도 없고 재주도 없는 고교생이다. 공부를 해서 대학을 준비하거나 기술을 배우고 취직을 준비하는 편이 나은 상황인데도 그는 무작정 레슬링을 한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일을 하는 셈이지만, 어쨌든 영화를 보면 그가 고투하는 모습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앞의 문단에서 영화에 옛날 소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은, 2010년대의 문학작품 중 경쾌하게 희망을 노래하는 청춘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가령 작년에 정세랑과 김세희와 장류진 박상영 등이 쓴 소설 등등은 ‘청춘’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고 분류할 만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대부분 ‘청춘’ 못지않게 다른 문제(젠더, 사랑, 노동 등)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순도 높은 ‘청춘물’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이 시대의 문학인들은 청춘의 아름다운 방황을 묘사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런 낭만적 여흥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강명은 그런 경향을 선도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첫 장편 『표백』(2011)은 청년세대가 자살에 나서는 이유를 고찰한 작품이다. 작중 주요인물 세연은 대학에서 주변 인물들에게 죽음을 권하다가 스스로 자살을 실천에 옮겼다. 세연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의 젊은 세대는 추구할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사회가 발전할 만큼 발전했고 너무나 경직된 시스템이 정착됐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고 기껏해야 기성체제에 편입되기 위한 방도를 고민하고 무한경쟁에 나서야 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행동은 자살이다.

 『표백』의 서술자 ‘나’는 세연의 친구였다. 그는 세연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졸업 이후 취업난과 생활고, 관료적 사회에 대한 불만 등을 느끼면서 세연의 자살론에 얼마간 동의를 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든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다고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표백』은 그런 ‘나’의 생각과 세연이 남긴 편지를 병치시킨 구성을 취함으로써 ‘청춘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자살 뿐이다’라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맞대어놓는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나’는 세연의 생각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한 채, 그저 막연히 살아야 한다는 입장을 반복할 뿐이다. 장강명은 자기 자신부터가 청춘이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소설이 그렇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오해는 하지 말자. 작가는 ‘청춘들이여, 자살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한국은 (청년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표백』은 젊은이들이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는 사회적 환경을 고발한 것이다. 이 작품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척박한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게 유도한다.

 삶은 무의미한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다룬 문학 작품은 적지 않다. 그런데 가령 카뮈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이 자살의 문제를 형이상학적으로 다룬다면, 장강명의 『표백』은 자살을 강요하는 사회적 환경을 집요하게 폭로한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세대를 자살로 몰아넣은 사회적 요인은 무엇인가? 자살에 내몰린 청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거의 젊은 세대는 추구할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사회가 발전할 만큼 발전했고 너무나 경직된 시스템이 정착됐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고
기껏해야 기성체제에 편입되기 위한 방도를 고민하고 무한경쟁에 나서야 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행동은 자살이다.

 이런 변별점 때문에 고전적인 서사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표백』이 자극적인 소재를 ‘저널리즘적’으로 다루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를 근거 삼아 『표백』의 ‘문학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2010)는 엄청난 판매량을 올렸지만 곧 젊은 세대를 옥죄는 사회적 억압을 무시한 채 ‘청춘’을 낭만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청춘을 미화시키거나 청년들이 무엇을 하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청춘이 왜 힘든지를 따져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실제로 이 문제를 사회학적/져널리즘적으로 분석한 논저가 자주 출간됐다. 정치권에서는 앞다퉈 청년을 위한 정책들을 내놓았다. 문학이 그런 시대정신과 도보를 맞추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장강명의 『표백』이야말로 극히 2010년대적인 작품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장강명이 출간한 작품 중 『열광금지, 에바로드』(2014)와 『한국이 싫어서』(2015)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평가할 수 있다. 전자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의 ‘덕질’을 한 청년들의 이야기이고 후자에는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택한 인물이 등장한다. 『표백』이 사회에 적응할 동력을 찾지 못한 청년들이 자살로 ‘도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두 작품의 인물들은 각각 ‘덕질’과 이민으로 ‘도피’한다. 『열광금지, 에바로드』와 『한국이 싫어서』에서도 장강명은 청년들이 ‘도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상하게 복기한다.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이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이 시대의 청춘들은 경쟁체제에 영합하기 위해 서로 싸우거나 ‘도피’할 수밖에 없는가. 만약 2010년대에 그랬다면 2020년대에는 상황이 더 나아질까. 낭만적인 청춘문학이 다시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 《쿨투라》 2020년 3월호(통권 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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