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포토 에세이] 천제단 일출과 눈꽃의 황홀경(恍惚境)
[갤러리 포토 에세이] 천제단 일출과 눈꽃의 황홀경(恍惚境)
  • 손정순(본지 발행인)
  • 승인 2020.03.0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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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박 2일 태백산 눈꽃 산행

 겨울 태백산은 은빛 눈꽃이 장관이다. 한국잡지협회 발행인 산악회(회장 한재순)와 발행인 포토클럽(회장 안용갑)이 공동으로 주관한 ‘2020년 새해맞이 태백산 산행 및 눈꽃축제’를 무박 2일 코스로 다녀왔다.

 새해 첫 산행이다. 1월 10일 금요일 밤 11시, 여의도 한국잡지협회에서 출발한 전세버스는 1월 11일 새벽 3시 30분 유일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팀들은 산행준비에 한창이었다.

 정광영 한국잡지협회 회장을 비롯한 총 25명이 동행한 우리팀은 간단히 요기를 하고, 4시 30분경 해돋이와 눈꽃을 찾아 새벽길을 나섰다. 장군봉으로 향하는 길 중 가장 빠른 길은 유일사 코스이다. 유일사주차장에서부터 어둠속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눈꽃 산행이라 명명했는데 초입에는 눈이 보이질 않는다.

 중간 중간 가등이 켜져 있지만 헤드 랜턴이나 손전등이 없다면 위험하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할퀸다. 마스크를 하고, 목도리와 장갑, 귀마개 모자까지 중무장을 했다. 얼마나 일찍 어둠속 산을 오른 걸까?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희미한 불빛 하나를 의지한 채 꾸물꾸물 산을 내려오는 하산객들이 보인다. 저절로 거친 숨이 나온다. 어느 구도자의 만행처럼 깜깜한 어둠의 길을 내딛는 한발 한발이 너무나 힘겹다.

 조금 더 올라가니 바닥이 얼어붙어서, 아이젠을 착용해야 했다. 근 15년 만이다. 강사 시절, 산을 좋아하시는 교수님을 따라 몇 년 산행을 다녔다. 방태산에서 조난당할 뻔 했던 사건과 겨울산행에서 발목을 삐끗했던 기억을 떠올리며아이젠을 단단히 착용했다.

 겨울 산에 오르려면 아이젠과 스틱은 필수 장비다. 신발 속으로 파고드는 눈과 정강이의 찬 기운을 막아주는 스패츠도 물론인데 나는 가지고 오지 않았다. 산악회 선배 발행인들은 신발 발목 끈을 다시 한 번 꽉 조여야 한다고 조언하며 아이젠을 착용한 내 신발을 한번 더 확인해주었다.

 뽀드득, 뽀드득… 얼마 만에 들어보는, 느껴보는 소리인가? 눈길을 내딛는 발소리가 너무나 정겹다. 그러나 감흥에 젖을 겨를도 없었다. 일행의 발걸음이 얼마나 빨랐는지 내가 꼴지로 뒤처졌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왠지 꼴지는 면해야 할 것 같아 서둘렀더니 페이스를 조절하지 못해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정말이지 되돌아 하산하고 싶었다. 산악회 회장님과 정 대표님께서 시간이 충분하니까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이며, 내 페이스를 찾을 수 있도록 리드해주었다. 드디어 앞선 일행이 보인다. 두 사람을 간신히 추월하면서 이제야 한숨을 쉰다. 천제단, 유일사라고 적힌 표지판을 보고 계속해서 걸어올라갔다. 이렇게 45분 정도 걸었을까? 유일사 갈림길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산악대장은 이제부터는 임도가 끝나고, 등산로가 시작된다고 알려주었다. 즉 장군봉까지는 등산로를 따라 걸어야한다. 나는 뒤처지지 않으려고 앞서 걸었다. 등산로를 걷다가 만난 이정표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현 위치 태백산 05-07 해발 1,520m이다. 유일사주차장까지는 3km, 천재단은 0.7km라고 표기되어 있다.

 일행들은 조금만 더 가면 장군봉이 코앞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저 멀리 능선을 따라 주변이 어렴풋이 밝아온다.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한다. 예사롭지 않은 나무의 형상들이 어둠속에서도 하나둘 느껴지는 이 오묘함! 그 유명한 태백산의 주목들이다.

 우리는 유일사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주목 군락지를 지나 2시간여 만에 태백산의 최고봉 장군봉에 도착하였다. 장군봉을 이렇게 일찍 도착한 이유는 바로 일출 때문이다. 태백산 장군봉에는 오늘의 일출을 감상하려는 분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고, 먼저 온 등산객들은 지혜롭게 준비해온 비닐을 천막처럼 뒤집어쓰고 일출을 기다렸다. 우리는 뒤따르는 일행을 기다리며 발을 동둥 구르기도 하며, 핫팩에도 의존했지만 영하 20도의 강추위에는 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장갑을 빼는 순간 손이 꽁꽁 얼 것만 같은 살인 추위에 사진을 찍는 것도 부탁하는 것도 민폐였다. 그래도 장군봉인데…. 정 대표님께 부탁하여 어렵사리 사을 찍었다. 이런 추위 속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것은 산행보다 더 힘들었다. 지친 우리는 장군봉의 장군단과 장군봉에서 300m 떨어져 있는 천제단으로 다시 걸었다.

 어둠속이지만 천제단까지 가는 등산로 양쪽으로 눈꽃의 향연을 느낄 수 있었다. 능선이건 나무건 사방이 온통 설화일 것이다. 드디어 천제단에 섰다. 천제단은 국조 단군을 받드는 제단이다.

 일출이 시작될 것 같은 붉은 빛의 여명, 그리고 운해의 장엄함이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 시간, 사람들은 추위에 떨면서도 곧 만날 일출과의 대면에 가슴 설레고 있다.

 아침 7시 35분, 드디어 백두대간의 능선을 넘어 붉은 기운이 솟아오른다.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등산객들의 탄성이 쏟아진다. 대자연이 내뿜는 불덩이가 꿈틀대며 온몸을 휘감는다. 마치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천제단 앞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을 보면서 저마다 경자년 새해의 소원을 빈다. 천제단에서 우리 일행은 누군지 형상을 분간할 수 없는 몰골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날이 밝아온다. 저어기 함백산 정상이 바로 눈앞에 있고, 매봉산을 지나 두타산, 청옥산 고적대 능선이 힘차게 뻗어 나갔다. 낙동정맥의 능선도 이 지점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주목(朱木)과 이 주목이 군락을 이룬 태백산 천제단, 아침을 여는 붉은 기운이 용트림하는 장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경이다. 삽시간에 온통 붉게 물들기 시작한 순백의 눈꽃을 보자 힘들게 어둠을 짚어 산을 오른 노고가 감격으로 벅차오른다.

 내려가는 길, 올라갈 때 어둠속에서 보지 못했던 저기 저 주목은 몇 백년이나 저곳에 서서 이 길을 지나는 산군들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나뭇가지에 피어난 눈꽃이 햇살 속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오전 9시 30분 우리 일행은 단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태백산 국립공원 당골광장에 도착했다. 초보자를 위하여 앞에서 뒤에서 받쳐주신 발행인산악회분들께 감사드린다. 이곳 당골광장도 ‘제27회 태백산 눈축제’로 한창이다. 관광객들은 눈조각들을 앵글에 담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출발 전까지만 해도 망설이고 또 망설였지만 멋진 일출과 눈꽃, 때에 따라서 몽환적인 운해까지 볼 수 있는 태백산 눈꽃 산행은 그야말로 황홀경이었다. 맑게 빛나는 순백의 세계,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는 표현이 여기에 딱 어울리지 않을까? 몸과 마음에 새로운 기(氣)를 충전(充電)할 수 있는 다음 겨울산은 인왕산으로 한번 떠나볼까?

 

 

* 《쿨투라》 2020년 2월호(통권 6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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