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선을 넘는 사람들, 내가 제일 싫어하는데
[드라마 월평] 선을 넘는 사람들, 내가 제일 싫어하는데
  • 김민정(드라마평론가·본지 기획위원)
  • 승인 2020.03.10 1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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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거짓말' (극본 전영신 원유정, 연출 이윤정)Ⓒ '모두의 거짓말'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모두의 거짓말(극본 전영신 원유정, 연출 이윤정)

  2018년 2월, 특이한 방식으로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 잡은 드라마가 있었다. 이름하여, ‘이재용’ 드라마.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시크릿가든’과 길라임이 있다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는 ‘황금빛 내 인생’이 있다랄까. 올림픽 중계 때문에 드라마가 결방한다는 소식이 “이재용도 챙겨본 ‘황금빛 내 인생’ 평창 동계올림픽 중계로 결방”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

 당시 이재용 부회장은 구치소에 있었다. 거기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재벌의 ‘갑질’ 장면을 보고 국민이 생각하는 재벌 오너 일가란 이런 모습이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평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이구나, 누린 사람이구나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라며 “대한민국에서 저 이재용은 우리 사회에 제일 빚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디어라. 세계적인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남긴 명언으로 왕관을 쓴 자는 명예와 권력을 가지지만 그에 걸맞은 막중한 책임 또한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도대체 그 무게가 어느 정도이기에 견디라고 하는 걸까. 이재용 부회장이 들으면 황당하겠지만 드라마 장르에 따라 재벌 재현 양상이 다르고 재벌을 향한 대중의 기대도 다르다. 왕관이라고 해도 다 같은 왕관이 아니고 그 무게 또한 복불복이란 소리다.

 로맨스 장르에서 재벌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몸과 마음, 그리고 돈을 모두 아낌없이 퍼주는 로맨틱한 남자다. 그런 까닭에 돈이 많을수록 여자를 향한 그의 순정은 더욱더 가치를 인정받는다. 하지만 범죄 수사 장르에서의 재벌은 성공과 쾌락을 위해 살인과 협박, 부정부패를 일삼는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이코패스다. 직책이 높을수록 그는 더욱 악랄하고 비열하게 그려진다.

 비서를 윽박지르는 행위도 로맨스 장르에서는 친근한 관계에서 발생한 귀여운 투정이지만 범죄 수사 장르에서는 약자에게 행한 무자비한 횡포이자 갑질이 된다. 하이틴 로맨스 드라마 <상속자들>(2013)의 호텔 상속자 최영도가 범죄액션 영화 <베테랑>(2014)의 재벌3세 조태오와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출연하는 장르가 다를 뿐. 조태오 입장에서 보면, 거 참 “어이가 없네.”

 다행인지 아닌지 요즘 장르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져 가는 추세다. 최근 종영된 두 드라마 <보좌관> 시즌2(2019)와 <모두의 거짓말>(2019)은 하나는 정치드라마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 수사드라마이기에 표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드라마는 재벌기업에 의한 환경오염과 그로 인한 마을 주민들의 집단적인 사망,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려는 정경유착 세력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작품의 결이 매우 비슷하다. 두 드라마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바로 ‘재벌 죽이기’다 .

Ⓒ '모두의 거짓말'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모두의 거짓말

 인간은 모두 죽는다지만 꼭 죽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한국드라마 속 재벌이다. 그들은 부도덕하고 이기적이기에 늘 공공의 적이 되어 죽임을 당한다. 그 죽음이란 게 공들여 키운 회사가 무너진다거나 막대한 권력을 잃게 되는 등 ‘상징적인’ 죽음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의 죽음이 항상 그렇게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만은 않다.

 로맨스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2013)의 재벌 2세 이재경 상무는 그룹 후계자가 되기 위해 친형까지 살해하는 사이코패스로 등장해 아버지에게조차 버림받고 교도소에 평생 갇힌다. 범죄 수사드라마 <보이스> 시즌 1(2017)에서 재벌 2세 모태구는 살인에 재미를 느끼는 사이코패스인데, 정신병원에 감금된 채 자신을 담당한 사이코패스 의사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이렇듯 장르를 뛰어넘어 재벌의 수난은 점점 혹독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신기하게도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육체적’ 고통이 있다. 그중 <모두의 거짓말>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으로 기억될 듯싶다. 재벌 죽이기의 끝판왕이랄까.

 극중 재벌 2세 정상훈 대표는 납치·감금되는 거로 부족해 살아 있는 채로 신체가 여러 차례 절단되고 마지막엔 안락사를 당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재벌을 죽이는 방식의 폭력성과 선정성이 아니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 방식에 숨겨진 진실이다. 마지막 16회에 밝혀지는데, 모든 일의 배후에는 정상훈 대표 본인이 있었다. 잔혹한 살해 방식을 계획한 것도 그 자신이었다. ‘악덕 재벌’ 아버지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지금까지 했던 방법으로는 절대 아버지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자기 자신을 제물 삼은 정상훈 대표의 자발적 희생은 드라마 속 재벌을 죽임을 당하는 타자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주체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재벌 죽이기’ 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듯 보인다. 성찰하고 반성하는 재벌이라니! 단순 자살이 아닌 신체 훼손과 안락사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택한 만큼 회개의 강도는 매우 높아 보인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였다. <모두의 거짓말>을 잔인하긴 하지만 꽤 잘 만든 드라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공공의 선을 위해 성찰하고 희생하는 재벌의 출현. 이렇게만 이해하고 넘어가면 좋았을 텐데,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정영문 회장에게는 정상훈이란 이름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아들이 사고로 죽자 정영문 회장은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보육원에서 아들과 닮은 아이를 데려와 아들의 이름을 붙여준다. 그 아이가 바로 유은성이다. 극중 정상훈 대표라고 불리는 남자는 정상훈의 삶을 사는 유은성이다. 고로 정상훈은 정상훈이지만 정상훈이 아니다.

 고아 유은성이자 재벌 후계자 정상훈인 그 남자는 범행을 공모한 보육원 친구 영민에게 정상훈이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온 세상을 주목시킬 수 있는 서희를 진실에 다가가게 할 그런 사람, 아버지가 절대 잃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유일한 사람. 그런 사람을 이용해야 해.” 그 남자가 이용하고자 한 사람은 누구일까. 유은성일까 정상훈일까. 당연히 재벌 후계자 정성훈이다. 고아 유은성은 정상훈이란 이름을 ‘이용’해 재벌 후계자 정상훈의 안구를 적출하고 손과 발을 자르고 마지막에는 안락사시킨다.

 오, 마이 갓! 이건 자살이 아닌 타살이다. 그것도 아주 잔혹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절단된 손을 일부 흐림처리 해 보여주거나 적출된 안구를 발견하고 놀라는 내용 등을 청소년 시청 보호 시간대에 방송한 것에 대해 드라마 제작진에게 ‘의견진술’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이미지 재현의 문제만은 아니다.

 모두의 거짓말. 여기에서 ‘모두’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정영문 회장, 인동구 실장, 진영민 대표, 유대용 팀장…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하나둘씩 등장인물의 거짓말과 숨은 의도가 들춰진다. 그리고 모두가 해피엔딩인 줄 알고 있을 때 그 ‘모두’에 우리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된다. 정상훈을 죽인 건 정상훈이지만 정상훈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모른 척하고 무엇을 숨긴 것일까. 도대체 어떤 거짓말을 한 것 일까.

 자살로 위장된 정상훈의 타살은 단순히 재벌 후계자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악을 물리치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선(善)이 요즘 핫한 트렌드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선’을 넘는 느낌이다. 정영문 회장에게 정상훈은 소중한 아들이고 아내 서희에게는 소중한 남편이다. 그 어떤 명분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로부터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 '모두의 거짓말'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모두의 거짓말

 잔혹하게 훼손된 남편의 시체 앞에서 절규하던 아내 서희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재벌 후계자 아내이자 4선 국회의원 아버지를 둔 서희. 부와 명예, 모든 걸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녀의 눈물이 가벼이 외면당해야 하는 걸까. “슬픔마저 차별받아선 안 된다.” 세월호 사건 때 실종된 베트남 이주여성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세월>의 한 구절이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 한 건의 완전 범죄를 꿈꾸고 있다.

 

 

* 《쿨투라》 2020년 2월호(통권 6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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