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월평] 뚝 떨어진 기회, 진짜 하늘에서 왔을까?
[연극 월평] 뚝 떨어진 기회, 진짜 하늘에서 왔을까?
  • 장윤정(연극평론가)
  • 승인 2020.03.1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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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리스 : 더 하이스쿨 맥베스'

  약자의 생존법은 무엇일까? 스스로 약자임을 명징하게 깨닫는 것으로부터 성공적인 생존전략이 형성되는 것은 아닐까. 이 생존전략을 유도하는 근간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 무엇보다 성공적인 생존이란 무엇인가? <피어리스 : 더 하이스쿨 맥베스>(이하 <피어리스>)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소수자인 인물들을 통해, 개인에게 작동하는 사회 구조의 배제 및 동화(同化)논리를 확인하게 만든다. 나아가 자신의 위치를 권력획득의 도구로 대상화하는 약자의 태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궤를 같이하지만, 개인의 욕망을 넘어서는 문제지점에 대해 논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호랑이기운

주류 사회가 허락한 기회

  <피어리스>의 서사는 <맥베스>와 유사하다. 미국 중부의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아시안계 쌍둥이 여고생 M과 L이 등장한다. 이들은 소수인종 특별전형으로써 아이비리그 진학을 위해 전학 온 것이다. 매년 단 한 명만 뽑히는 전형이므로, L은 한 학년 더 늦게 입학하기까지 한다. 이들의 논리는 명확하다. 동양인에다 여자이기 때문에 소수인종 특별전형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인의 외형을 한 16대손 미국 원주민 남학생 D가 합격하고 만다. 이후, M과 L은 맥베스와 같이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음모를 계획하고 D를 살해하는 등, 거침없는 행동을 이어간다. 결국, 이들의 욕망은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피어리스>에서는 다층적인 문제 현상이 나타나는데, 우선 약자 세계 내부에도 층위가 나누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M은 자신이 동양인으로서 인종차별에 노출된 약자임을 잘 알고 있지만, 흑인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하다 믿고 그들을 차별한다. 자신보다 소수인종이 D라는 것을 알지만 늘 스스로가 더 약자임을 강조한다. 상대하는 사람마다 위계 서열을 매기고 그에 따라 태도를 선택하여 취한다. M을 통해, 약자가 불합리한 사회 인식체계를 스스로 내면화하고 그에 따라 다른 약자를 소외시키는 태도를 목격하게 된다. 이 문제의 근간을 작품은 아이비리그 소수자 전형 합격통지서로써 상징화한다. 전통적으로 단 한 명만 갈 수 있는 아이비리그는 소수자들 내부에서 줄 세우기를 유도한다. 결국 소수자들끼리 경쟁하며 누가 더 약자인지 그 우열을 가리도록 만드는 것이 아이비리그 소수자 전형의 역할인 것이다.

  아이비리그 합격통지서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듯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에 등장한다. 그것은 “가능성" 으로 가득 차 있는 묵직한 서류봉투다. M과 L이 탐내는 것은 이 합격통지서를 넘어 미국의 역사에 합류하고 싶은, 주류 사회로의 입성,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에 가깝다. 대학은 선량한 태도로써 소수자 전형이란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매년 단 한 명의 소수자만 허락된다는 뜻이다. “20년간 정시로는 딱 한 명만 붙었”던 역사가 그것을 방증한다. 비정상일 정도로 극단적인 수치. 즉, 소수자집단은 결국 주류사회에서 분리·배제된 채, 지배집단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기회와 가능성을 획득하는 구조다. 유서 깊은 대학조차 소수자 개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단지, 신속하게 정원을 채울 한 명이 필요할 뿐이며 그 자리는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 D가 죽고 난 후 3일 만에 다른 이에게로 합격통지서가 날아가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피어리스(Peerless)란 ‘비할 데 없는’, ‘견줄 수 없는’을 의미한다. ‘유일한’, ‘독보적인’의 의미로 의역할 수도 있겠다. 외연을 넓혀 생각하자면, 정체성에 대한 의미와도 맥락이 닿는다. 작품에 등장하는 쌍둥이 M, L은 늘 “너”가 “나”인 것으로 태도를 취한다. 편견이 가득한 사회속에서 서로가 고립된 존재임을 반복적으로 환기시키며, 의지할 곳은 서로뿐임을 기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차후엔 의미는 사라지고 이 행위만 남아, 그것으로 위안을 얻는 도착적 태도를 취한다. 중요한 지점은 둘은 결코 하나일 수 없기에 ‘너’를 위한 것은 사실 ‘나’를 위한 일이었다는 점이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구분할 수 없던 쌍둥이는, 극중에서 서양인의 시선으로 구분할 수 없는 동양인과 궤를 같이한다. 결국, ‘피어리스’는 구분할 순 없어도 각 존재는 고유하다는 지점을 상징하는데, 작품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왜곡하고 부정하려는 소수자의 태도를 통해 그 의미를 역설한다. M이 수학시험에서 ‘피트’를 ‘미터’로 작성하는 실수를 범함으로써, 근본적으로 결코 서양 사회에 동화될 수 없는 동양인의 사고체계를 보여준다. M은 이것으로 사소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실감하고 만다. L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M으로서 살아가길 선택한다. 사회가 제공하는 기회를 획득하기 위해선 자신의 정체성마저 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L의 머리 위에서 울리는 까마귀 소리가 그녀의 삶이 죄책감으로 지속될 것임을 짐작하게끔 한다. 그럼에도 <피어리스>는 이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 치열한 혈투를 벌여온 이들 앞에, 너무나도 손쉽게 그 기회를 획득한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결국 소수자의 비윤리적인 생존방식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이기 전에 사회 구조가 종용하는 문제임을 사유하게 만든다.

‘전복’을 무대화하다

  <피어리스>는 2019 서울문화재단 유망예술지원사업인 뉴스테이지(NEWStage)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뉴스테이지에 선정된 이오진 연출은 미국 유학 시절에 접했던 <피어리스>에 매료되어 일찍이 공연화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계 미국인 박지해 작가의 힘이 큰 작품이다. 고전 <맥베스>를 현대적으로 영리하게 재구성해내고 단문의 감각적인 대사들로 작품에 속도감을 더했다. 삶에 내재하는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중의적인 언어를 활용하여 블랙코미디를 완성해냈다. 여기에 이오진 연출은 무대와 객석의 위치를 전복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극장에 들어서면, 무대에는 좌석들이 배치되어 있고 관객은 기존의 객석을 바라보도록 앉게 된다. 기존의 객석은 교실, 지하실, 실내 등의 극중 배경으로 활용되고 그 외 여타 공간 모두 무대로 사용된다. 배우들은 무대와 객석을 종횡무진하며 연기한다. 덕분에 관객은 사방으로 극에 노출되어 공연과의 심리적·물리적 거리감을 좁히게 된다. 객석과 무대를 전복시킨 연출은 ‘전복’에 대한 상징으로도 읽힌다. 소수자들의 사회적 위치 전복에 대한 열망을 극장 공간의 위치 전복으로 치환시킴으로써, 관객이 직접 ‘전복’에 대하여 경험하도록 만든 것이다. 또, 주류 사회에서 소수자들을 하강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객석을 가장 낮은 위치에 배치하여 역설적으로 소수자들을 올려다보는 구조로 만들었다. 이외에도 별다른 무대미술 없이 주어진 극장 그대로를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해내는 연출력과 재치가 눈에 띈다. 인상적인 부분은 기존의 객석 위치에서도 다양한 조명이 활용된다는 점이다. 무대 미술이 약소한 대신 작품에 연극성을 더한 부분은 음향과 조명이었다. 특히, ‘쿵’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빛나면 느닷없이 합격통지서가 무대에 등장하는데, 이러한 마술적 효과가 관객의 흥미를 높였다. <맥베스>에서 나타나는 주술적 효과 또한 ‘쥐’와 ‘불’, ‘깃털’과 ‘까마귀 소리’ 등으로 가늠하게끔 했다.

  이 작품에 설득력을 더한 것은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연기력 덕도 있다. 잠깐씩 등장한 김신록 배우는 유쾌한 연기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역할을 해냈으며, 정대용 배우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묘사해냈다. 부진서 배우와 오남영 배우는 서로를 향해 힘이 전복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표현함으로써 긴장감을 지속시켰고, 변승록 배우는 흑인의 몸짓을 흉내 내지 않고서 흑인의 역할을 소화해냈다. 덕분에 <피어리스>는 실험적인 연극 양식을 취하면서 관객과의 소통에도 성공한 듯하다.

  인종 대신 자본의 프레임으로 읽는 순간, <피어리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유효한 작품이 된다. 경제적 주류 사회에 대한 식지 않는 열망, 마치 모두에게 열려있을 것만 같은 성공의 기회.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늘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허락하는 기회만을 획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배제된 상태에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줄 세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품은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돌아보길 권하고 있었다.

ⓒ호랑이기운

<피어리스 : 더 하이스쿨 맥베스>
작 박지해(Jiehae Park)
번역 이리, 이오진
연출 이오진
출연 김신록, 변승록, 부진서, 오남영, 정대용
제작 호랑이기운
공연장소 세종문화회관
공연기간 2020. 1. 9. ~ 2020. 1. 19.

 

 

* 《쿨투라》 2020년 2월호(통권 6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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