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Theme] 과거의 서정을 소환하여 미래를 열다
[4월 Theme] 과거의 서정을 소환하여 미래를 열다
  • 김종회(문학평론가)
  • 승인 2020.03.26 16: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대 통합을 호출하는 새 방식, 트로트 열풍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이 점화한 전인미답의 길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 밤/ 잊었던 추억인가.

  심야의 음악 프로그램에서 1970년대에 발표된 배호의 구성진 노래 <누가 울어>를 14세 어린 소년이 불렀다. 가수는 트로트 신동이라 불리는 정동원. 원곡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20년 3월 12일 저녁 10시, TV조선의 ‘내일은 미스터트롯’ 결승전에서의 일이다. 이 오디션의 마지막회에는 모두 7명이 진출했고 그 중 가장 연장인 장민호가 44세이니 30년 한 세대의 격차가 한데 묶인 셈이다. 그러나 이날 방송은 투표 집계를 제시간에 완료하지 못해 우승자 발표를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는 ‘사고’를 냈다. 이와 같은 흠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미스트롯’에서 출발한 이 경연 기획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새 길을 열었다.

  공중파와 종편 전부를 압도하는 30% 이상의 시청률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트로트는, 새로운 시대의 음악에 밀려 고색창연한 전설처럼 시대의 지평선 너머로 이울어 갔다. 그 한 줄 한줄의 가사가 동시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고달픈 삶을 위로하는 영향력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잊혀진 ‘고운 노래’가 되고 말았다. 극히 일부 이름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고는 트로트 가수가 설 땅이 사라졌고, 대다수는 비공식적이고 허약한 무대에서 ‘설움’을 달래야 했다. 이를테면 그 꿈결 같은노래의 서정을 끌어안은 채 구세대의 상징이자 과거의 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절이 달라졌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애틋한 트로트의 노랫말과 리듬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죽이고 있었을 뿐,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TV조선의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은 이과거의 노래 형식을 오늘날의 무대로 불러내어 그 존재 값과 가능성을 새롭게 조명한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 점에서 이 프로그램의 기획자에게 아무리 뜨거운 박수를 보내어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 시청자들은 임영웅·영탁·이찬원 등 주요 수상자들의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의 노래에서 ‘이야기’와 ‘눈물’을 공유하는 동안에 기준이 불분명한 심사평, 불필요한 늘이기, 얼핏 편파적으로 보이는 편집 등의 문제들이 묻혀 넘어갔다.

ⓒTV조선

  여러 손길이 함께 발굴한 소통·공감의 방식

  트로트를 두고 일정 부분 통속적이고 대중적이라고 보는 인식, 더 나아가 값싼 눈물을 강요하는 노래라는 생각은 소위 ‘고급’ 음악과 비교해서 아주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러한 수평 비교는 별반 의미가 없다. 운동 경기에도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는 ‘전문체육’이 있고, 동네의 근린공원에서 이웃과 함께하는 ‘생활체육’이 있지 않은가. 더욱이 트로트는 그 시대의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을 위하여 일상생활에 밀착한 언어와 멜로디를 조합한, 이를테면 ‘육화(肉化)’한 감응의 형식이다. 누군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으되, 이 삶의 현장에서는 인생이 짧은데 항차 예술이 길 턱이 없지 않겠는가. 트로트를 생활음악으로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기실 필자의 경우 ‘미스트롯’이 진행되고 송가인·정미애·홍자 등의 새 히로인이 탄생하기까지 그다지큰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미스터트롯‘으로 접어들면서 거듭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TV 화면을 바라보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치 7년 전 김진명의 역사소설 『고구려』가 3권까지 출간되었을 때,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책상으로 책 읽는 자리를 옮겼던 것처럼.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와 ‘마스터’라 불리는 평가자 그룹, 그리고 현장의 관객과 프로그램 밖의 시청자를 하나의 꿰미로 연계하는 합력(合力)및 소통의 방식이 놀라웠다.

  ‘미스터트롯’의 경우 ‘미스트롯’의 학습효과에 힘입어 1만 5천 명이 넘는 참가 지원자가 몰렸다. 첫 예선을 통과한 101명에서부터 최종 결선 7명에 이르기까지 서로 가슴 졸이고 낙담하며, 또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순간순간 감정의 정직성이 진솔하게 공유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대중가요에 전문성을 가진 ‘마스터’들은 왜 이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가를 구체적 증빙으로 보여주었다. 작곡가 조영수의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는 논평, 그냥 잘나가는 가수인 줄 알았던 장윤정의 트로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등이 그러했다. 소위 ‘레전드’로 초빙된 선배 가수들의 활용, 프로그램의 흐름에 부응하는 청중의 반응을 유도하고 이를 카메라로 포착하는 영상 운영 등 시청률을 끌어올릴 요인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TV조선
ⓒTV조선

 매체환경에 대한 대응, 타 방송으로의 확산

  이 오디션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트로트 가수로 입신(立身)하겠다는 출연자의 출신 성분을 보면, 성악·국악·랩 등 여러 분야가 있고 현역 가수·개그맨·신동·아이돌 등 다양한 전력(前歷)이 있으며 태권도·격투기 등으로 자기 영역에서 정점(頂點)을 찍은 선수들도 있었다. 이들의 대진표와 단계별 대결 형식을 흥미롭게 작성하고, 그 과정에 있어 합숙 등 공동체 생활을 매설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출연자의 개인사를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등속의 기교를 보여주었다. 방송의 진행 또한 아슬아슬한 긴박 국면을 여러 모양으로 도입했다. 때로는 너무 자심(滋甚)하다 싶을 정도로. 이러한 일들이 시청률의 제고를 목표로 했다 할지라도 출연자와 청중의 일체감, 그리고 프로그램에 마음을 모으는 집중력을 일구어내는 데 유익했다.

  특히 결승전에서 판정단 50%, ‘국민투표’ 50%의 점수 반영은 주목할 만하다. 국민투표의 경우 20%를 반영한 대국민 응원투표에 2,790만표 이상이, 그리고 실시간 국민투표에 773만표 이상이 ‘콜’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대중적 호응의 양상은, 다른 방송매체의 유사한 프로그램 발굴을 견인하기에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 MBC는 7명의 트로트 가수가 경연을 펼치고 청중평가단에 심사를 받는 경연 프로그램 ‘나는 트로트 가수다’를 방영하고 있다. 그리고 SBS에서는 국내 정상급 가수들이 해외에서 트로트 무대를 선보이는 ‘트롯신이 떴다’를 론칭하고 있다. MBN의 ‘트로트퀸’이나 예능 프로그램들의 트로트 코인 탑승도 눈에 띈다.

  흘러간 옛 노래로 치부되던 트로트가 새롭게 방송을 타고, 현실적인 삶의 한복판에 불시착한 비행기처럼 내려앉은 이 시대적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물간 세대의 전유물로 보이던 이 음악 양식의 부활에 부응하여, 자기 노래를 잊어버렸던 ‘올드 세대’가 스스로 가슴 속의 감성을 일깨우며 환영의 촉수를 내미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그러나 출연자이거나 향유자이거나를 막론하고 젊은 세대, 그것도 10대의 어린 세대들까지 트로트의 ‘귀환’에 열광하고 동참하며 그 삶의 꿈을 내거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더욱이 3개월의 경연 과정을 거치면서 출연자들의 기량이 급격하게 성장했고, 동시에 트로트의 가창 및 관람 수준도 현저히 향상되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이 보기 드문 세태가 지난날의 서정을 소환하여 세대 통합을 호출하는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도록, 지혜롭게 그리고 정성껏 가꾸어 가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 놀라운 트로트 운동이 ‘동어반복’을 넘어서서 보다 창의적인 방향성을 찾을 수 있도록, 이 열풍이 또 하나의 한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우리들 가슴에 화사한 꽃처럼 피어난 이 순수한 정서가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 《쿨투라》 2020년 4월호(통권 70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