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일명 오스카)상의 역사에 새 기록을 남겼다. 서울의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의 관계를 통해 한국의 극심한 빈부 격차를 비판한 <기생충>이 2월 9일 할리웃의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본 및 국제영화(옛 외국어영화) 상 등 4개 부문의 중요한 상을 휩쓸었다. <기생충>은 이들 4개 부문 외에도 편집과 미술상 후보에도 올랐었다. 아카데미는 물론이요 한국영화사에도 새로운 기록을 남긴 큰 경사다.
봉 감독도 첫 번째 수상인 각본상(한진원 공동 집필)을 받은 뒤 소감에서 “각본을 쓰는 것은 고독하고 외로운 작업이다. 그것을 쓰는 것이 나라를 위해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 상은 한국으로선 첫 상이자 큰 영광”이라고 말했다.
외국어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고 작품상과 국제영화상을 모두 받기는 더더욱 처음이다. 각본상도 아시안 영화로선 처음이다. 아카데미상은 지금까지 미국영화인들의 자기 잔치라는 비판을 들어 왔다. 봉 감독도 이를 ‘지역 행사’라고 말한 바 있다.
<기생충>은 대부분 작품과 감독상을 받을 것으로 예측한 샘 멘데스 감독의 1차대전 서사극 <1917>을 제치고 깜짝 영광을 차지했는데 <1917>이 용감함과 우정과 희생을 그린 전통적 구식 전쟁영화라는 점에서 아카데미가 이를 기피하고 소품이나 마찬가지이나 독창적 아이디어를 지닌 <기생충>을 선택했다는 것은 아카데미가 구각을 벗으려고 보여준 노력의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카데미가 내년에도 외국어영화에 작품상을 준다는 보장은 없다. 한 발 앞서가면 그 다음에는 두 발 물러서는 것이 아카데미의 관행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가 외국어영화상의 이름을 올해부터 국제영화상으로 바꾼 것도 아카데미의 구각 탈피 노력의 일례로 볼 수 있다. 이 상을 받은 봉 감독도 소감에서 “아카데미가 상의 이름을 바꾼 뒤 첫 번째 받는 상이라는데 의미가 있다”면서 “오스카가 새 방향을 추진하는 시점에서 상을 받아 기쁘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회원들이 ‘기생충’에게 상을 무더기로 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영화가 좋기 때문이긴 하지만 또 다른 이유로 아카데미의 외국어영화 기피증을 맹렬히 비판한 언론의 공이 크다. 특히 필자가 속한 LA 영화비평가협회(LAFCA) 동료 회원인 LA 타임스의 비평가 저스틴 챙은 여러 차례에 걸쳐 아카데미의 외국어 영화와 자막 기피증을 비판하면서 “<기생충>이 오스카를 필요로 하는 것보다는 오스카가 훨씬 더 <기생충>을 필요로 한다”고 <기생충>을 후원했다. 그런데 LAFCA는 <기생충>과 봉 감독을 2019년도 최우수 작품과 감독으로 선정했고 송강호를 최우수 조연 남우로 골랐다.
봉 감독도 1월 5일에 열린 역시 필자가 속한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HFPA)가 주관하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소감에서 “1인치도 안 되는 자막이라는 장벽을 넘으면 보다 훌륭한 영화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아카데미가 백인 남자 일색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한국을 비롯한 젊은 다인종 국제영화인들과 여성들을 대거 신입회원으로 초빙하면서 아카데미에 새 피가 공급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로 들 수 있다.
<기생충>은 작년 칸 영화제 대상과 골든 글로브상에 이어 외국어 영화로서 오스카상을 탐으로써 구로자와 아끼라, 잉그마르 베리만, 페데리코 펠리니 및 프랑솨 트뤼포 같은 세계적 거장들이 달성하지 못한 업적을 이룬 셈이다.
‘기생충’은 사회비판영화요 블랙 코미디이자 가족 드라마이며 비극이요 공포 스릴러인 장르를 뒤섞은 작품인데 이 장르의 변형적 연출은 봉 감독의 특기다. 영화가 관객은 물론이요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은 이유는 우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선한 아이디어. 기발한 착상인데 모두들 한결같이 “이런 영화는 처음 봤다”고 칭찬했다. 또 빈부격차의 문제는 비단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도 관객에게 어필한 것으로 보인다. 봉 감독도 영화에 대한 세계적으로 공통된 반응을 보고 “우리가 모두 현재 하나의 거대한 자본주의 국가에 살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피력했다.
이 신선하고 놀라운 아이디어는 봉 감독의 두뇌에서 나옴에 분명한데 HFPA의 일본인 동료회원 유끼는 내게 “봉의 머리가 유난히 커 거기서 이런 뛰어난 상상력이 나오는 것 같다”면서 깔깔대고 웃었었다.
봉 감독은 영화의 아이디어를 자기가 대학생 때 경험한 일에서 얻었다고 말했다. 그때 ‘기생충’의 주인공 중 하나인 기우처럼 큰 저택에 사는 부잣집의 중학생 아들의 가정교사로 일했는데 어느 날 그 학생이 자기에게 2층에 있는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사우나를 구경시켜 주더라는 것이다. 봉 감독은 이를 보고 “마치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기분으로 부잣집에 침투하는 기분이었다”면서 “여기에 내 친구들을 하나씩 데리고 이 집에 침투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하고 상상을 했었다”고 말했다.
필자와 봉 감독은 그의 2009년작인 <마더>와 2017년 작인 <옥자> 그리고 <기생충>으로 인해 인터뷰 차 몇 차례 만나 구면지기. 만나면 끌어안고 “봉형” “박 선생님”하며 반기게 됐다. 그는 나이 50답지 않게 젊은 총각 모습인데 사람이 내적으로 든든하면서도 소박하고 겸손하며 또 유머가 있어 정이 간다.
봉 감독은 <마더>의 주인공인 김혜자씨가 LAFCA에 의해 최우수 주연여우로 선정돼 LA를 방문 했을 때 처음 만났다. 그는 당시 “처음에 김혜자씨가 최우수 주연여우로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을 금치 못했지만 참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봉 감독은 이어 “나는 아직도 영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현재 내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다”면서 <마더>까지가 자기 영화 생애의 초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 봤다. 그의 말대로 봉 감독은 <마더> 이후 만든 <설국열차>와 <옥자>로 세계적 감독 대열에 참여했고 이제 <기생충>으로 명실공히 일급 세계 감독의 반열에 올라섰다.
봉 감독은 각본을 쓰고 감독을 겸하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역시 이 범주 안에 드는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 감독 등과 함께 세계가 알아주는 감독이다. 봉 감독은 <살인의 추억> <괴물> 및 <마더> 그리고 그의 미국영화 <설국열차>와 <옥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특히 스릴러에 능하지만 이 스릴러 장르를 비틀어 변형을 시켜 오락성과 개인적 색채가 짙은 예술성을 잘 겸할 줄 아는 감독이다. 그는 장르의 균형에 대해 “장르를 섞는 것이 2시간 내내 한 장르로 진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면서 “그것이 장르이건 분위기이건 간에 난 여러 가지 요소를 동시에 엮는 것이 편하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영화란 감정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감정이란 늘 복합적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고백했다.
봉 감독은 스릴러가 주특기이니 만큼 히치콕의 영화광으로 7세 때부터 그의 영화에 빠졌는데 “난 히치콕의 얘기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가 좋아하는 또 다른 스릴러 감독은 일본 공포영화의 장인 구로자와 기요시. 그리고 1960-70년대 활약한 스릴러를 잘 만든 한국의 김기영 감독도 좋아하는데 <기생충>은 김 감독의 <하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또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뱀장어>로 칸영화제 대상 수상)와 <양들의 침묵>을 연출한 조나산 데미도 좋아한다고.
봉 감독은 이번에 감독상을 받으면서 자기가 영화를 공부할 때 숙지하던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에게 감사를 표하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 스콜세이지 역시 <아이리시맨>으로 감독상 후보에 올랐었다. 봉 감독은 상이 뜻밖이라는 듯이 다소 겸연쩍어 하는 웃음을 지으면서 무대에 올라 “영화를 공부 할 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인 것’이라는 말을 새겨 간직했는데 그 말은 바로 마틴 스콜세이지가 한 것”이라며 “그의 영화를 보고 공부했는데 수상후보에 함께 오른 것은 큰 영광이며 상을 탈 줄 몰랐다”고 스콜세이지에게 감사를 표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봉 감독은 또 역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감독상 후보에 오른 쿠엔틴 타란티노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내 영화를 아무도 모를 때 알아준 사람이 쿠엔텐 타란티노”라면서 “아이 러브 유 타란티노”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래픽 디자이너인 아버지로 인해 집안 분위기가 봉 감독을 초등학생 때부터 영화 쪽으로 몰고 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방 안에 처박혀(다소 대인 기피증이 있다고) 주한 미군방송인 AFKN-TV에서 방영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영화인의 꿈을 키우게 됐다고. 그때본 영화 중 깊은 충격과 감동을 받은 것이 프랑스의 앙리-조르지 클루조가 감독하고 이브 몽탕과 샤를르 바넬이 나온 인생 낙오자들의 생존의 몸부림을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 <공포의 보수>. 영화를 보면서 너무나 불안하고 긴장이 돼 화장실에도 갈 수 없었다고 기억한다. 꼬마 때부터 이런 영화를 좋아했으니 그는 상당히 조숙한 사람이었음에 분명하다.
이들 영화에 서서히 매료되면서 과연 카메라 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며 누가 이런 작품들을 만드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그 생각에 잠도 못자고 여러 감독들의 이름을 암기해 가면서 자기도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TV로 외국 영화를 보면서 대사를 몰라 상상으로 내용을 그리곤 했는데 그 뒤로 자기는 헛것을 자주 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이 헛것이야 말로 예술가의 비전이라고 하겠다. 봉 감독은 <옥자>의 아이디어도 어느 날 차를 차고 가는데 갑자기 공중에 커다란 돼지가 나타나 그것에서 착상했다는 것이다.
봉 감독은 스스로를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각본을 쓸 때도 감정적이 되곤 하는데 밤늦게 글을 쓰면서 자기가 쓴 글을 보고 울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그 대사를 보면 크게 실망하곤 한다는 것이다.
봉 감독은 체격이 늠름해서 그런지 여행할 때면 하루 종일 뭘 먹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식당에 관해 열심히 조사를 한다고. 세트에 있을 때도 차려 놓은 점심이 매우 중요하다며 크게 웃었다.
한국에서 <기생충>을 만드는데 별 애로 사항은 없었는지에 대해 물었다. 봉 감독은 이에 대해 “난 운이 좋아 한국에서 영화를 찍을 때 영화계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는다. 전체 촬영기간은 74일로 제작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제작 후반 작업 땐 전연 간섭을 안 했다. 완전히 자유로워 책임감이 더 막중했다. 이런 지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국제적 관객들에게 떳떳이 내놓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영화의 인물들인 김씨네와 박씨네 사람들을 모두 처음부터 구상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알려줬다. “첫 아이디어는 2013년에 구상했다. 그 후 4년간은 영화의 기본 줄거리를 생각하고 썼다. 14쪽의 줄거리를 쓴 것이 2015년이다. 그 땐 김씨네와 박사장네 두 가족 밖에 없었다. 세 번째 인물들인 박사장네 지하실의 부부는 각본이 완성되기 3개월 정에 착상했다. 그들로 인해 영화의 후반부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들을 착상하고 큰 행복감을 느꼈다. 그 두 부부의 아이디어는 운전을 할 때 나와 차를 멈추고 메모를 했다. 각본을 쓸 때 뜻밖의 새 인물이 떠오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
봉 감독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제작비에 대한 예의로라도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돈을 추구한다거나 내용을 타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술가의 의지를 밝혔다. 그는 지금 영어영화와 한국영화 각기 한 편씩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구태의연한 할리우드의 자기 잔치인 아카데미상의 자막과 외국어영화 기피증을 깨어놓은 봉 감독의 건투를 빈다.
시상식이 끝나자 HFPA 동료회원들로부터 축하한다는 텍스트 메시지가 내게 쇄도했다. 마치 내가 상을 탄 것처럼 기분이 흐뭇하고 자랑스러웠다.
* 《쿨투라》 2020년 3월호(통권 6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