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나쁜 놈, 차가운 놈, 찌질한 놈, 거친 놈
[드라마 월평] 나쁜 놈, 차가운 놈, 찌질한 놈, 거친 놈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0.04.0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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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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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에서 온 그대>(2013)의 박지은 작가가 집필하고 한류스타 현빈과 손예진이 출연한다고 해서 큰 화제를 모은 작품, 바로 <사랑의 불시착>(2020)이다. 방영 전부터 남녀 주인공의 열애설로 한층 열기를 더한 것과는 달리, 북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에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지적부터 윤세리를 위해 북한 군인인 리무혁이 제집 드나들 듯 남한에 들어온 것에 대한 의구심까지 플롯이 너무 허술한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오히려 시청률은 매회 상승세를 보이며 20%를 육박하였다. 왜, 도대체 왜.

 현빈. 바로 현빈이 ‘개연성’이고 ‘시청률’이라는 말이 풍문처럼 떠돌았다.

 드라마가 한편의 ‘현빈 화보’ 같다는 네티즌들의 신실한 간증을 뒤로하고 현빈의 매력을 탐구해보기로 했다. 최근작을 살펴보면, 드라마 <알함브라궁전의 추억> (2019), <하이드 지킬, 나>(2015)가 있고, 영화에는 <창궐>(2018), <협상>(2018), <꾼>(2017), <공조>(2017) 등이 있는데… 아, 이런! 느낌이 오는가. 낮게 깔린 ‘리정혁’의 묵직한 목소리처럼 외롭고 고독한 흥행성적.

 시청률의 마법은 배우 현빈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현빈은 맞는데, 배우 현빈이 아니라 <사랑의 불시착>에서 그가 연기한 ‘리정혁’이다. 윤세리가 위기에 처하자 길가 신호등을 모두 정지시키며 고급 세단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북한 총정치국장 아들’, 스위스 유학 갈 정도로 뛰어난 피아노 실력과 섬세한 감수성을 두루 갖춘 ‘천재 피아니스트’, 슈트를 입고 서 있었을 뿐인데 유튜브 스타가 되어버린 ‘얼굴 천재’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강력하게 여심을 사로잡았던 건 무뚝뚝한 얼굴로 “일없소”를 낮게 읊조리며 윤세리 옆을 잠시도 떠나지 않는 ‘로맨틱 츤데레’였다.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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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의 순정

 사실 ‘츤데레’는 한국 로맨스드라마에서 그 의미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캐릭터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꽃보다 남자>(2009)의 구준표가 있다. 다혈질이고 감정표현이 직설적이지만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하고 따뜻한 남자. ‘나쁜 남자의 순정’이랄까. 최근에 와서 츤데레가 ‘알고 보면 따뜻한 남자’로 차가운 이미지가 강하지만 과거에는 나쁜 남자의 면모가 훨씬 강조되었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는 안하무인의 재벌 후계자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타인을 괴롭히는 ‘나쁜 놈’이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한 여자(금잔디)에게만큼은 순정을 다 바친다. 글로벌 재벌그룹 후계자답게 그가 보여주는 츤데레의 강도는 좀 남다르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전교생을 동원해 왕따를 시키며 괴롭히지만 사랑에 빠지고 나서는 전용 헬기를 타고 화려한 프로포즈를 선보인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학교폭력을 행사하는 남주인공에게 공감이 별로 안 갈 수 있지만 구준표를 연기했던 배우 이민호는 드라마 덕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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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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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재벌남의 사연

 90년대 후반 1세대 아이돌은 가벼운 율동만으로 팬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2020년 아이돌에게 칼군무가 기본인 것처럼 츤데레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츤데레도 그냥 츤데레만으로는 승부수를 띄울 수가 없다. ‘어떤’ 츤데레, 그러니까 ‘재벌’ 츤데레와 ‘현실남친’ 흔데레로 세분화해서 자신만의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로맨스 장르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은 ‘재벌’이다. 그룹 상속자나 후계자 혹은 본부장 정도의 사회적 신분을 갖춘 금수저 능력남. ‘재벌’ 츤데레의 원조격은 역시나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다. 그는 F4라고 이름 붙여진 ‘자기보다 조금 덜 부유하고 조금 덜 화려한’ 남자들을 몰고 다니며 ‘단체 떼샷’을 좋아했다. 하지만 물량 공세로 여심을 사로잡던 ‘무한리필’ 로맨스는 요즘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재벌’ 츤데레의 인기가 시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슐랭 분자 요리’처럼 아주 정교한 매력을 가진 한 명이 네 명 몫을 해내는 츤데레 전문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뷰티 인사이드>의 서도재 티로드항공 본부장,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이영준 유명그룹 부회장, <청담동 앨리스>의 차승조 아르테미스 회장, <시크릿가든>의 김주원 로엘 백화점 대표 등등 무수히 많은 ‘재벌’ 츤데레들이 단독 남주로 나섰다.

 물량 공세에 맞선 그들의 무기는 바로 ‘사연 있는 차가움.’ 가슴 아픈 상처를 감추기 위해 차가운 도시 남자가 되었다는 설정이다. 서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했거나 어린 시절에 납치 혹은 사고를 당했거나. 사연의 대부분은 그가 재벌이기에 감당해야 했을 개인적 슬픔과 연관되어 있다. 실연을 당했더라도 그건 그가 재벌이기 때문이다. <청담동 앨리스>(2012)의 차승조 회장은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하기 위해 재벌 부모를 버렸으나 빈털터리가 된 그에게 남겨진 건 연인의 잔인한 이별 선언이었다. “나한테 너는 그냥 비즈니스일 뿐이었어.”

 재벌 츤데레의 정서적 결핍은 로맨틱 장르의 남주로서 필수조건이다.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여자 주인공과의 환상 케미랄까. 가까이 오지 마시오, 라고 말하는 듯한 차가움을 가졌지만 따듯한 손길 한 번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연약하고 투명한 얼음 왕자. 그들은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외강내유’의 모습으로 여심을 저격한다.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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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남친의 티키타카

 ‘부자여서 심플’한 재벌 츤데레와 달리, ‘현실남친’ 츤데레는 캐릭터가 훨씬 복잡하고 쪼잔하다. 재벌 츤데레가 한번 사랑에 빠지면 무조건 직진하며 헌신한다면, 현실남친 츤데레는 사랑을 하면서도 계속 다투고 헤어지길 반복하는, ‘찐’ 현실연애를 보여준다. 극중 등장하는 사건들도 매우 일상적이고 소소하다. 별것 아닌 일로 여자 주인공과 티격태격하는 우정과 사랑 사이의 느낌이랄까.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응답하라 1988>(2015)의 덕선과 정환, <식샤를 합시다> 시즌2(2015)의 구대영과 백수지를 떠올리면 된다. 정환 역의 류준열이나 구대영 역의 윤두준 등 연기자들도 다소 친근한 외모를 갖고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 <시크릿가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사랑의 불시착>에 출연하며 재벌 츤데레에 특화된 배우 현빈이 다비드상을 연상시키는 ‘조각 미남’인 것과는 구분된다.

 ‘현실남친’ 츤데레에 특화된 연기자가 있는데, 바로 배우 조정석이다. 그는 현실남친의 찌질함에 유머를 더해 귀여운 츤데레로서 자기만의 색깔을 확실히 한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납득이’가 실제 연애를 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질투의 화신>(2016)의 ‘이화신’은 여자에게 지는 건 못 참는 ‘마초’ 남자 기자이지만 유방암에 걸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자신을 짝사랑했던 표나리를 냉대하고 무시했지만 나중에는 그녀를 혼자 짝사랑하는 외로운 처지가 된다. 찌질함의 매력은 역시 디테일이다. 당시 배우 조정석은 ‘디테일의 장인’이라 불리며 얄밉지만 사랑스러운 ‘화신’ 캐릭터를 완성해 큰 호평을 받았다. 그의 웃픈 표정 연기는 <오 나의 귀신님>(2015)의 ‘허세 세프’ 강선우에서도 빛을 발한다.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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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남자의 짝사랑

 차가운 츤데레와 찌질한 츤데레에 이어 ‘거친’ 츤데레도 있다. <또 오해영>(2016)의 박도경은 로맨스장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벽에 밀치며 억지로 키스하거나 강제로 손목을 잡아끄는 행동들 때문에 ‘데이트 폭력’ 의심을 받았다. 간혹 거친 매력을 넘어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육체파’ 츤데레도 있는데 그들은 대체로 주인공보다는 서브 남주 정도의 역할인 경우가 많다. 여자 주인공과 사랑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짝사랑’ 전문 서브 남주. <미스터 선샤인>(2018)의 구동매나 <상속자들>(2013)의 최영도를 떠올리면 금방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숨긴 채 여자를 괴롭히지만 다른 사람이 괴롭히는 꼴은 절대 못 봐서 목숨 걸고 여자를 보호하는, 거친 매력으로 짠내나는 사랑을 하는 고독한 남자. 만약 <꽃보다 남자>의 ‘학교 일진’ 구준표가 십 년만 더 늦게 출현했다면 다정한 윤지후나 낭만적인 소이정에게 밀려 서브 남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 나야 한다.

 

 

* 《쿨투라》 2020년 3월호(통권 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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