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4] 미8군 쇼무대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4] 미8군 쇼무대
  • 오광수(경향신문 부국장, 시인)
  • 승인 2020.04.2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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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물론 가장 큰 상처는 남북분단이다. 분단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해결 과제다. 한국전쟁은 사회 전방위적으로 상처와 과제를 남긴 채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면 대중문화계에 남긴 흔적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먼저 첫손으로 꼽을만한 건 ‘미8군 무대’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 있던 미8군 사령부가 한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줄잡아 30만 명의 미군들이 서울 용산을 중심으로 동두천, 파주, 문산, 의정부를 비롯하여 부평, 송탄, 진해, 부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주둔했다. 미군기지 일대에는 미군을 상대로 한 유흥업소가 밀집된 ‘기지촌’이 형성됐다. ‘양공주’나 ‘부대찌개’등 슬픔이 배어있는 단어도 이곳에서 기원했다. 기지촌은 철저하게 미군 병사들의 ‘유흥과 향락’을 위한 공간이었다. 영어 간판을 단 술집과 클럽, 미군 병사를 상대하는 한국 여성들이 살았다.

 소설가 천승세의 『황구의 비명』을 비롯하여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이원규의 『겨울새』 등이 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또 시인 김명인의 『동두천』이나 장영수의 <메이비> 등 기지촌의 슬픔을 담은 시와 시집이 있었다 .

 전쟁 직후 누구에게나 밥 세 끼를 해결하는 건 지상과제였다. 대중문화계에 종사하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8군의 주둔으로 대중문화계 종사자들에게 밥벌이 무대가 생겼다. 처음엔 기지촌 주변에 생긴 미군 클럽에서 연주자와 가수들이 ‘음악 날품팔이’를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미8군 쇼 무대를 공급하기 위한 흥행회사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한국흥행, 극동연예, 신일연예 등이 그것이었다.

 1960년대 들어서서 쇼 공급업체가 난립하여 경쟁이 과열되자 업체들끼리 담합하여 화양(한국흥행)이라는 업체로 통합되었다. 화양은 전속 가수와 악단 등을 두고 조직적으로 쇼 무대를 공급했다. 자료에 따르면 한창 피크를 이뤘던 1964년에는 월 400회 공연, 연간 120만 달러~15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즈음 한국의 수출실적이 1천만 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적지 않은 외화벌이를 한 셈이다.

 미8군 쇼는 주로 미8군 영내의 다양한 클럽에서 펼쳐졌으며, 재즈와 팝, 로큰롤과 소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공연됐다. 미국 본토에서 유행하는 최신 음악들이 1주일도 채 안 돼서 쇼 무대에서 연주될 정도였다. 미8군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의 평균 수입이 월 쌀 다섯 가마 정도였다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급료를 받은 셈이었다.

 연주자뿐 아니라 가수와 무용수 등 쇼 무대에 필요한 다양한 공연자들이 활동했다. 미8군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기획사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다. 오디션에 합격하면 등급이 매겨지고, 전국 각지의 미군 클럽을 순회하면서 공연했다. 심사위원은 미 국방성에서 직접 파견한 음악전문가였기에 상당한 음악적 수준이 없이는 오디션을 통과하기 어려웠다. 빅밴드의 경우 5대의 색소폰, 4대의 트롬본, 4대의 트럼펫, 기타, 베이스, 드럼, 피아노와 퍼커션 등 18명이 그룹을 이룬다. 여기에 무용, 코미디, 마술 등이 가미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게 시작된 ‘미8군 쇼 무대’는 한국 대중문화의 화수분 역할을 했다. 그 이전까지의 대중문화계가 서구음악보다는 신민요나 트로트 등을 기반으로 한 토종음악 중심이었다면 미8군 쇼 무대 이후에는 서구음악이 직수입되어 일반 대중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대기를 무시하고 1960년대를 전후하여 미8군 무대에서 활약했던 음악인들을 꼽아보자. 대중음악 작곡가로도 이름이 높은 이인성, 박춘석, 이봉조, 김인배, 김희갑 등은 미8군 밴드에서 활약했다. 또 여가수로는 한명숙, 패티김, 펄시스터즈, 현미, 김시스터즈 등이 미8군 쇼 무대를 주름잡았다. 신중현을 비롯하여 조용필, 김홍탁, 윤항기 등 한국 록 음악의 뿌리가 된 신세대 음악인들이 미8군의 자양분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여기에 한국 재즈 1세대로 분류되는 뮤지션인 박성연, 이동기, 신동진, 최선배, 강대관, 최세진, 이판근 등이 미8군 무대에서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이주원, 임창제, 조동진, 조영남 등도 통기타를 들고 미8군 무대에 서서 포크음악의 기초를 다졌다. 이들은 미8군 영내에 있는 클럽뿐 아니라 동두천 브라보홀, 파주장파리 DMZ, 왜관 킹클럽. 이태원 세븐클럽, 로포클럽, 유엔클럽, 007클럽 등 유명 미군 클럽에서 공연했다. 또 1961년 개국한 KBS TV, MBC 라디오 등에도 미8군 출신 음악인들이 출연하기 시작했다 .

 중요한 것은 처음엔 서구의 밴드 음악을 차용하여 시작했지만 탁월한 음악성으로 우리 것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영국 리버풀에서 태동한 비틀즈가 전 세계를 강타한 시기였지만 독학으로 음악을 시작한 신중현은 독보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를 형성했다. 미8군의 혹독한 무대에서 갈고 닦은 연주실력을 가진 작곡가들이 70년대와 80년대를 관통하면서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냈다. 또 미국을 중심으로 히트했던 노래들이 번안 가요로 선보일 수 있었던 배경 또한 미8군 무대가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파병으로 인해 주한 미군 숫자가 줄어들면서 미8군 쇼도 쇠퇴기를 맞았다.

 그러나 6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비약적인 발전은 오늘날 한류가 전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신중현의 음악은 비틀즈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을 갖고 있었다. 그 열정과 패기가 있었기에 오늘날 풍성한 대한민국의 대중문화가 구축된 것이다.

 

 

* 《쿨투라》 2020년 4월호(통권 7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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