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기생충의 사회학
[movie] 기생충의 사회학
  • 홍용희(문학평론가, 경희사이버대학 교수)
  • 승인 2020.04.2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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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시나리오 각본집 『기생충』을 중심으로

  기생충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으로는 다른 동물에 기생하여 영양분을 빼앗아 먹고 생활하는 벌레로 정리된다. 독자적으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숙주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기생체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에서 기생충은 혐오와 비난의 대명사로 통용되곤 한다. 봉준호의 시나리오 <기생충>은 기생충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기생충의 존재와 생존 방식을 다층적으로 실감 있게 환기시킨다. 이것은 기생충의 생물학을 사회학의 영역으로 극적이고 적나라하게 전이시키면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의 구성은 너무나 계획적이어서 오히려 무계획적으로 보이게 되는 내밀한 밀도와 개연성을 지닌다. 기생충의 사회학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공간은 ‘아래/위’, 즉 반지하와 지상, 가난과 부자, 하류와 상류 등의 이항 대립적 구도로 짜여 있다. ‘아래/위’의 수직적 구도는 불평등, 예속, 차별, 박탈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아래/위’의 수직적 구도의 경계를 나름대로 수평적 공생의 구도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생충의 생물학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다. 기생충은 숙주와의 동거를 이어가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전반의 생성과 전개의 배꼽은 “수석”이다. 어느 날 김기택의 가족이 살고 있는 반지하방에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수석”이 들어온다. 기우의 친구 민혁이 ‘산수경석’이며 ‘추상석’의 모양새를 한 수석을 선물한 것이다. 민혁은 자신이 가져온 ‘수석’의 상징성을 설명한다. “가정에 많은 행운과 ‘재물운’을 몰고 온다”는 것이다. 햇볕도 들지 않고 핸드폰 와이파이도 제대로 터지지 않는 반지하방에 어떻게 행운과 재물운이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이때부터 ‘수석’의 마법이 실행된다. 수석의 마법은 바로 기생충의 생물학이다. 기생충은 조용하면서도 날렵하게 숙주에 스며들어 자신의 처소를 마련하는 놀라운 생존력을 지닌다. 이를테면, 인체의 경우, 입, 항문, 피부 등을 통해 들어가서 내장은 물론 혈관, 뇌, 근육, 눈까지도 자신의 서식처로 절묘하게 활용한다.

  대학생 민혁이 기우에게 자신이 유학을 다녀올 동안 다혜의 과외를 맡아달라고 제안한다. 기우는 위조한 명문 사립대 재학 증명서를 들고 박동익 사장 집으로 간다. 부잣집은 하늘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지상의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넓은 창문과 푸른 마당에 햇볕이 넘치도록 쏟아진다. 박동익 사장의 저택은 바로 김기택 가족의 숙주로 선택된다.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체가 숙주를 선택하는 것이 기생충의 생물학이다. 기우의 과외 선생으로서의 출입은 반지하방에 사는 가족이 지상으로 분주하게 스며드는 틈새가 된다. 시나리오는 점점 더 아슬아슬하면서도 박진감 있게 전개된다. 여동생 기정은 다혜의 동생 다송의 미술 선생이 되고, 아버지 기택은 박 사장댁의 전용 운전수가 되고, 어머니 충숙은 가정부가 된다. ‘위/아래’의 가운데 경계선에 틈새를 만드는 일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다. 이처럼 경계의 틈새가 순조롭게 만들어진 것은, 무엇보다 기생체에 해당하는 김기택 가족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인 생존력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숙주에 해당하는 박동혁 가족의 “씸플”한 성격도 한 몫을 한다. 숙주는 기생체에 비해 늘 경계와 긴장력이 약한 속성을 지닌다. 생존의 결핍과 절박함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우월감과 허세를 충족시키면 쉽게 신뢰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과선배는 김진모, 그는 니 사촌”이라는 소개 앞에서 연교는 바로 기정을 다솜의 미술 선생으로 받아들인다. “일리노이 시카고”란 말이 그녀의 특권의식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미술 선생으로서의 실력은 정작 중요하지 않다. 박동익 사장 역시 이점은 연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선”과 “냄새”를 자기 방어 기제로 전면에 내세운다. “선”이란 자기 중심적으로 정해 놓은 ‘위/아래’의 배타적인 경계의 선이고 “냄새”란 ‘위/아래’의 경계선을 구별하는 질료이다. 특히 “냄새”는 은폐시키거나 위장할 수 없는 무형의 속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가 지닌 예리한 변별 요소가 된다.

  김기택 가족은 박 사장네의 방어벽을 통과하기 위해 허위와 거짓의 연기를 능란하게 해치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허위와 거짓에 대해 성찰하거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들의 거짓은 쉽게 특유의 자기 정당화 논리 속에 포장된다. 기우가 다혜의 과외 선생이 되기 위해 명문대 재학 증명서를 위조하면서 “전 이게 무슨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 안 해요./저 내년에 이 대학 갈꺼거든요.” 라고 하는 식의 논리가 일관되게 지속된다. 기우의 1인극으로 출발한 연기는 점차 전 가족의 일상적인 집단 연기로 확장된다. 여기까지는 “가정에 많은 행운과 ‘재물운’을 몰고 온다”는 “수석”의 상징적 주술이 유감없이 실현된다. 특히 기택의 온 가족이 박 사장 가족이 캠핑을 떠난 후 거실을 독차지하고 술판을 벌이며 주인 행세를 하는 대목은 그 절정이다. 그러나 이 “절정”은 하강으로 급선회하는 계기점이 된다. 그 주된 이유는 이미 박 사장의 집에 기생하고 있던 다른 기생체와의 충돌이라는 예기치 않은 상황과 맞닥뜨리면서 부터이다.

  박 사장네도 모르는 대저택의 지하 방에 해고된 가정부 문광의 남편 근세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소 유형은 다르지만, 이미 기택의 가족보다 더 오래되고 완숙한 기생충이 집 안에 서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두 기생충간의 예기치 않은 대면과 충돌은 사건 전개의 방향을 급선회시킨다. 이제 “가정에 많은 행운과 ‘재물운’을 몰고 온다”는 “수석”의 마법도 힘을 잃어버린다. 오히려 그것은 불운과 파행을 불러오는 재앙으로 작용한다.

  캠핑을 떠났던 박동우 사장 가족은 폭우로 갑작스럽게 귀가한다. 김기택 가족과 문광 부부의 반전이 거듭되는 충돌과 그 봉인의 과정이 위험하고도 급작스럽게 전개된다. 김기택 가족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한 하염없는 귀가길이 전개된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하는 마을과 집은 온통 침수되어 물바다가 되고 있다. 기우는 반지하방에서 뜻밖에도 “수석”을 들고 나온다. 그는 대피소에서도 “수석”을 꼭 껴안고 있다. 아버지 기택이 묻는다. “산수경석은 왜 그렇게 껴안구 있냐?” “얘가 나한테 달라붙는 거예요.”“얘가 자꾸 나를 따라와요”. 기우의 이러한 대답은 ‘행운’과 ‘재물운’을 향한 상승 욕망에 대한 미련이고 집념의 다른 표현이다.

  이튿날 박 사장 댁은 다송이의 생일 축하 번개 모임을 갖는다. 기택의 가족은 모두 박 사장 집에서 제각기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기우는 자신의 가방에서 “수석”을 꺼내 지하로 향한다. 그는 “수석”으로 문광의 부부를 제거하려고 한다. 문광의 부부를 제거해야만 박 사장 댁과 동거할 수 있는 기생체의 서식처를 제대로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석”은 오히려 문광의 남편 근세의 손에 넘어 가게 되면서 기우의 머리를 짓이기는 흉기가 되고 만다. “수석”이 초래한 치명적인 역전의 상황은 마침내 대혼란을 불러오는 계기가 된다. 근세가 부엌칼을 들고 축제가 한창인 정원으로 나간다. “새하얀 대낮”에 “피범벅 귀신”이 출현한 것이다. 근세는 충동적으로 기정의 “쇄골 밑가슴”을 찌른다. 지하 생활자가 지상에 나와서 드러내는 광기이다. 축제의 정원은 온통 비명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된다. 박동익 사장은 충수와 격투 끝에 쓰러진 근세 밑에 깔린 자동차 키를 꺼내는 와중에도 근세의 지하 냄새에 몸서리 친다. 근세의 냄새는 ‘위/아래’에서 아래에 사는 사람의 표식이라는 점에서 기택의 그것이기도 하다. 기택은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자신의 본색이며 정체성에 대한 모욕감을 느낀다. 기택의 “눈빛이 확” 바뀐다. 그는 도끼날로 “동익의 목과 어깨 사이를”찍는다. 기생충이 숙주를 죽이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파국이 된다. 기정, 근세, 동익 모두 붉은 피를 흘리며 죽게 된다.

  그러나 숙주보다 기생충의 삶은 더욱 오래 지속된다. 기생체는 다른 숙주를 다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국 이후에도 실종되었던 기택이 근세가 머물던 지하에 살고 있는 것이다. 기우는 큰돈을 벌어 아버지가 숨어 있는 바로 그 저택을 사야겠다는 꿈을 꾼다. 그의 꿈은 스스로 기생충에서 숙주가 되고자 하는 바램이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 사회가 그의 존재적 전회를 허용할까? 또 다시, 부자가 되는 길이 불우한 길로 전락되지는 않을까? ‘위/아래’의 수직적 구도는 변화가 없고 이를 수평적 구도로 바꾸려는 욕망만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시나리오 기생충은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끝난 자리는 다시 꿈틀거리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마치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서 입으로 자신의 꼬리를 덥썩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뱀이 작품의 기저를 휘감고 있는 형상이고 원리이다. 그래서 시나리오 <기생충>의 삶은 또 다시 지속될 것이다.

 

 

* 《쿨투라》 2020년 4월호(통권 7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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