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신중현 9] 천千일日의 봄비
[아티스트 신중현 9] 천千일日의 봄비
  • 장석원(시인·광운대 교수)
  • 승인 2020.05.22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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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가 내린다. 나를 돌려세우는 봄비. 언어를 무력하게 만드는 소리들. 자연의 빗소리, 빗소리를 닮은 사람의 목소리, 어울려 음악이 된다. 나의 봄비, 선명하다. 가만히 멈춰도 좋은, 내 울음 지워주는, 지극한 봄비. 청령(蜻蛉)의 날갯짓 같은, 파르르, 착륙하는 봄비. 내 눈에 어른거리는 봄비. 비문(飛蚊)처럼, 흔들린다. 봄비가 온다.

 <봄비>가 나를 흔든다. 감정을 종잡을 수 없다. 이 음악은 파괴적이다. 듣는 사람에게 감정의 폭탄을 안긴다. 솔직히, 울고 싶다. 이유가 없다. 알 수 없다. 아직 지상에 닿지 않은, 부유하는 외로움 같은, 이슬비가, 비가(悲歌), 다가선다. 봄비가 흐느낀다. 언어는 무기력하다. 명곡, 이런 단어는 부질없다.

 전체 시구를 신중현의 작품 제목과 가사로 조합한 시 한 편을 읽는다.

 봄비 / 비가 내리네. /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 봄비 / 나를 울려 주는 봄비. // 님은 먼 곳에, / 비가 내리면 기억이 나네. / 어디엔가 멀리 그대 있으리. //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 검은 우산을 받쳐 주네. / 말없이, 말없이 걸었네. // 망설이다가 가 버린 사랑. /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 황봉구, 「신중현」(『허튼 노랫소리』, 파란, 2020)

*

 소근대는 봄비가 보인다. 볼륨을 줄여야 한다. 내면의 소리가 들리는가.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 있다. 봄비가 나를 쓰다듬는다. 꿈일까. 환상일까. 현실과 꿈을 이어주는 봄비. 가사의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다. 코러스와 가수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노래의 끝이다. 시간이 지워졌다. 노래를 빠져나왔다. 듣던 내가 사라졌다. 나는 어디로 떠난 것일까. 목소리를 껴입고 나는 누구로 변신한 것일까. 이별한 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눈물과 하나 되는 광경을 무연히 바라보는 여인일까. 사랑했지만 헤어져야 했던 그녀를 돌아서면서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남자일까. 잊기 쉬운 사실 하나, <봄비>에 내리는 비는 이슬비라는 것. 끝에 도달했을 때, 몸은 흠뻑 젖는다. 이슬비가 깊게 침투한다. 가장 먼저 파고들어 가슴을 저미는 봄비, 이별하는 두 사람의 머리카락에 닿는 봄비. 눈물 같은 봄비, 빗물 같은 눈물, 그렁거린다. 이 노래의 끝 부분에 코러스가 없었다면, 그래서 외로움의 승화(昇華)와 무화(無化)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범상한 ‘뽕필’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억지로 꺾어 넘기지 않는, 창자(唱者)가 음정의 끝을 조작하지 않는, 말 그대로 스트레이트한 노래, 맑고 깨끗하다. 이정화의 <봄비>이다.


*

 붉은 봄비가 내린다. 꽃을 데려온 비가 엷게 퍼져 나가고, 슬픔은 끝날 줄 모르고, 끝없는 봄이 공중에 걸려 있고…… 이 봄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노래가 봄비를 동결시킨다. 하지의 태양 아래서도 이 비는 해동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을 녹일 수 없다. 내 마음을 얼음 지옥에서 탈출시킬 수 있는 사람, 단 한 사람, 바로 그 사람, 나를 떠난 사람, 꽃을 데리고 온 것인가. 그 사람의 봄비, 허공에 멈춰 있다. 봄비를 뜯어낸다. 꽃잎에 불을 지른다. 마음을 태운다. 빗방울 전부 불꽃이네. 불꽃이 이네. 펑, 펑, 터지는 꽃들. 봄비가 내려온다. 꽃불과 불꽃. 소신(燒身). 몸은 재가 된다. 심화가 핀다.

 마음의 불꽃 위에 내리는 봄비. 불덩이 몸을 식혀 주는 봄비. 푸스스 부서져 내 몸을 어루만지는 봄비. 심장부터 젖어드는 봄비. 이별처럼 명징한 봄비. 이 세상에 내던져진 나의 살갗에 ‘혼자’를 새기는 봄비. 영원으로 달려가는 봄비. 시간을 제거하는 봄비. 세상의 모든 꽃잎을 눈물로 바꾸는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봄비가 그칠 때 그 사람 돌아오겠지만…… 지금 떨어지는 빗방울은 움직이는 비애. 목소리가 듣는 이를 가둔다. ‘나’를 보랏빛 절망에 물들인다. 박인수의 <봄비>는 뜨겁다. 밀도가 매우 높다. 음악 용어 ‘쏘울’은 적확한 개념어가 될 것이다. 빗물에 빛깔을 부여한다면, 헤어진 자의 눈물에 색깔을 칠한다면, 보라가 마땅하다. Prince의 <Purple Rain> 때문이다. 그의 기타 연주가 자취 없이, 봄비처럼, 다가온다. 이별에 대한 확인과 원망, 재회에 대한 의지와 열망이 뒤섞인 박인수의 목소리는 프린스의 보랏빛 기타 연주 같다. 단어 ‘통증’이 추상어에서 감각어로 전환되는 순간이 열린다. 박인수가 봄비를 외로운 가슴에 박아 넣는다. 청자의 감정은 절단되고 절단된다. 절절(切切)하다. 토막토막 끊겨 벚꽃잎처럼 흩날린다. 박인수의 봄비는 끈끈하다. 역청(瀝靑) 같다. Blood, Sweat & Tears의 <I Love You More Than You’ll Ever Know>가 이어진다. 허공을 채운다.


*

 봄비가 내린다. 음악 속에서 비는 꿈으로 변환된다. 빗방울마다 꿈이 서린다. 사랑도 없이, 눈물도 없이, 비가 몸을 적신다. 흐느끼다가 물러서서 나를 부른다. 안으로, 안으로 밀려든다. 봄비는 왜 울음일까. 봄비는 왜 아픔일까. 몸에서 봄비가 흘러내린다. 그리움만큼 비가 내린다. 비는 사라지지 않고 돌아와 나를 안아준다. 나는 허물어진다. 나는 풀어진다. 녹아내려 흘러가는 몸. 누구를 찾아가는가. 당신, 다시는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결단코. 부러지더라도 부서지더라도 나는 가지 않는다. 먼지 위의 생. 환멸이었다. 환(幻)의 멸(滅), 환한 멸망……

 내 몸을 통과하여 멀어진 사람, 내 영혼이 아직 놓지 못한 사람, 봄비. 무서운 그 말, 낯설어 두려운 재회, 봄비. 이곳의 오후를 횡단하는, 봄비. 침 흘리는 욕망 같은, 붙들고 벌리고 다물고 조이고 흡착하는, 봄비. 내가 구축한 어느 봄의 오후에, 기적과 우연과 사랑이 싹트는, 저 머나먼 거리에, 내가 망실한, 내가 매장한 사람 같은, 봄비. 편재(遍在)하는 죽음, 눈을 뜬다, 봄비. 풀 사이로 바람의 길, 마른 손가락을 편다, 흰 파열음이 도달한다, 손바닥에 닿는다, 봄비. 나를 삭제하는, 소리 없이 와서 나를 용해시키는, 봄비. 비바람 불던 지난 밤의 낙화, 언제나 상처 입은 자에게 돌아오는, 봄비. 바스라진 몸, 꽃잎, 떨어진다, 봄비. 빗방울에 맺힌 그 사람 얼굴, 사라진다, 봄비.


 그러나 그것만은 용서하야 주서요. / 당신을 그리워하는 슬픔은 곧 나의 生命인 까닭입니다. / 만일 용서하지 아니하면, 後日에 그에 대한 罰을 風雨의 봄 새벽의 落花의 數만치라도 받겄습니다. / 당신의 사랑의 동아줄에 휘감기는 體刑도 사양치 않겄습니다. / 당신의 사랑의 酷法 아래에 일만 가지로 服從하는 自由刑도 받겄습니다.
 — 한용운, 「의심하지 마서요」(『님의 沈默』)

 추락하는 포물선, 그 사람이 가까워진다. 봄비의 느린 침몰. 돌아온 사람. 내가 서 있던 시작점이자 내가 매몰된 종착점에서 흰 손가락을 대면한다. 빗방울이 빚어낸, 물방울 하나로 응집된 사람, 봄비 속의 사람. 그리움의 질량, 그 몸의 부피, 기억의 크기. 빗방울이 불러낸 기억. 나는 갑자기 따스해진다. 더운 숨결을 느낀다. 그리움 앞에서, 봄비의 사선 뒤에서 나는 쪼개지고 만다.


*

 신중현의 노래. 그의 목소리. 봄비가 내린다. 사람들이 빗방울처럼 흩어졌다. 음악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연착하는 봄비. 봄비는 나를 속이지 않는다. 봄비는 내 얼굴에 배어들지 않는다. 봄비는 언제나 어깨 위에서 멈춘다. 봄비의 온도가 높아질 때, 나는 속는 줄 알면서 또 속는다. 눈물을 삼키지 않는다. 찢어진 후에 멀건 얼굴로 웃는다. 그로기(groggy) 상태에 다다른다. 산은 높고, 물은 깊다. 봄비는 따스하고, 봄비는 가볍다. 나를 마르게 하는 열기의 기원, 그 사람. 봄비의 종점에서 나는 길을 예측하지 않는다. 봄비가 떠나고 있다. 봄비 박사(薄紗) 커튼을 앞에 두고, 혼자 소주를 마신다. 봄비는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 몸은 점점 차가워지는데 봄비는 술을 부르고, 술은 몸을 데우고, 술은 봄비 속으로 그 사람을 데려온다. 봄비 속에 그 사람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돌아온 것일까. 크게 숨을 쉬고 봄비로 빚은 그 사람을 바라본다. 봄비의 몸과 그 사람의 몸이 비슷하다. 그림자 같은 내 몸이 마음보다 먼저 취한다. 앞뒤 없는 절망과 피로가 찾아온다. 두렵다. 봄비 가득한 이곳은 어디일까. 나는 어떤 시간을 헤쳐 온 것일까. 반성 없이 나의 봄비는 번성한다. 용해되어버린 나의, 어제의 몸. 그 사람, 사랑이 아니다. 오랜 기다림, 봄비. 신중현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기타가 팔을 벌린다. 나를 품는다.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내 몸에서 어둠이 빨려나간다. 봄비처럼 빠져나간다. 손바닥 위의 봄비. 비가 머문다.

 세침(細針) 같은 봄비. 저 너머로 뿔뿔이 달아나려고 한다. 봄비에 젖어서 걷는다. 봄비가 몸 안에 고일 때, 둥근 묘지가 되고 싶다. 실뱀 같은 봄비, 가는 봄비 온다. 외로운 가슴 달랠 길 없는 봄비, 한없이 멀어지는 봄비. 봄비보다 먼저 떠나고 싶다. 봄비 내리네. 두꺼워진 봄의 산 위에 떨어지네, 짙어지네. 눈물과 봄비 한몸이네. 부푸는 슬픔. 봄비의 옅은 장막이 그리운 얼굴로 바뀐다. 나를 기다리는 봄비, 소금쟁이 같은 봄비, 솜털에 닿는 봄비, 첫 키스 같은 봄비, 언제나 붐비는 봄비. 그 사람을 생각한다. 봄비의 손가락 볼을 만진다. 녹는 얼굴. 이곳에서 엷어지는 봄비.


*

 신중현의 2002년 앨범 <Body & Feel>에 실린 <봄비>. 신중현의 육성이 청자를 더듬는다. 등대 불빛처럼 먼 곳의 어둠 속에서 명멸한다. ‘봄비가 나를 울려준다’, ‘봄비는 언제까지 내릴까’, ‘봄비가 마음마저 울려준다’. 세 문장이 세우(細雨)처럼 번진다. 노래 속 비의 질감은 수증기처럼 뿌옇다. 세사(細絲) 같은 봄비. 신중현의 목소리는, 가느다란 빗줄기의 현을 하염없이 탄주한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그의 기타 연주이지만, 이 음악에서 내가 실존으로 느끼는 것은 가수의 목소리이다. 처연한 신중현의 목소리. 사람을 무너뜨리는 시간의 목소리. 나는 무엇을 듣는가. 봄비 외로운 가슴에 듣네, 흐르다가 내 빈 몸을 서늘하게 채우네, 마음을 적시네. 그의 목소리가 허공을 뚫는다. 낮게 퍼져 나가는 소리의 소용돌이. 봄비의 느린 전진. 신중현은 노래 부르지 않는다.그는 노래를 파열시킨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봄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 삶. 주어진 삶의 끝, 죽음에 도달할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 포복해서라도 나아가야 하는 것,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 어디로이든 가야”(김수영, 「구름의 파수병」) 할 인생. 신중현은 삶을 껴안고 노래한다. 인생이란 처참한 숙명을 짊어진 자가 가슴에 품은 슬픔의 칼 같은 <봄비> 마음을 가른다. 기타가 봄비를 베어낸다.

 신중현의 몸—악기가 연주하는 이슬비. 부지불식 간에 저며 드는 이슬비, 봄비. 장맛비처럼 감정을 흔드는 봄비. 모든 것을 겪어버린 자의 토해냄. 눈보라도 아니고 여름밤의 폭풍도 아니다. 고요하게 내려 앉는 이슬비의 형상. 표면을 거치지 않고 내부로 투과되는 봄비. 간신히 이어지는 신중현의 목소리. 언어 이전의 감정을 불러오는 기타 소리.

 앨범 제목이 ‘몸과 느낌’인 이유를 확인한다. 천 일 동안 그치지 않고, 흉중에, 머무는 비. ‘나’ 대신 울어주는 봄비. 신중현이 몸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기를 바랐던, 염산 같은 슬픔, 나를 부식시킨다. 마음이 사라진다. 살이 녹아내린다. 이 비를 표현하기 위해 흔해 빠진 부사를 사용해본다. 너무 아프고 너무나 아프다. 이별, 인생, 사랑, 이별, 인생, 사랑, 이별…… 빠져나갈 수 없다.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봄비 같은 생이여, 벗어나고 싶은 삶이여…… 원하고 원해도 사랑을 복구할 수 없다. 신중현은 온몸을 열고 받아들인다. 그의 기타 연주는 아픈 자의 가슴에 따스한 불을 지핀다. 나는 흐느낀다. 그 사람 인생 전체가 악기였구나. 육중한 봄비, 헤비한 봄비, 사무치는 <봄비>.

 나는 안다, 가는 비…… 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 기형도, 「가는 비 온다」 부분(『입 속의 검은 잎』)

 

 

* 《쿨투라》 2020년 5월호(통권 7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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