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6]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 그리고 청년문화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6]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 그리고 청년문화
  • 오광수(시인, 경향신문 부국장)
  • 승인 2020.07.0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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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시대나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다. 최근에도 출판물 등을 중심으로 90년대생인 밀레니얼 세대에대한 다양한 분석이 이어진다. 대중문화 역사에서 소위 청년문화 논쟁은 시대의 분위기를 바꾸는 분기점 역할을 했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대변되는 1970년대판 아이돌의 등장을 예감하고 청년문화에 대해 주목한 이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리 논란거리도 아니지만 소위 딴따라를 문화 중심에 놓은 시각 때문에 거센 논쟁이 펼쳐졌다.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가수가 대중문화의 우상이 될수 없다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논리였다.

  논쟁이 시작된 지점은 1974년 3월 29일 자 동아일보 기획기사인 ‘오늘날의 젊은 우상들’이었다. 훗날문학평론가이자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활동했던 김병익이 동아일보 기자 시절 쓴 기획기사였다. 이 기사는 최인호, 이장희, 양희은, 김민기, 서봉수, 이상룡 등 6명을 젊은 우상으로 선정했다. 이들의 대표자 격인 소설가 최인호는 1945년생으로 당시 스물아홉 살이었고, 코미디언 이상룡은 1944년생으로 서른 살이었다. 1952년생인 양희은이 가장 어린 나이였으며 기사 속에 거론된 다른 인물들도 모두 비슷비슷한 나이였다.

  최인호는 누구인가? 이미 고등학교 때 신춘문예에 입선(당선작 아닌 가작)한 그는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으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청년작가였다. 이장희 역시 최인호와 짝을 이뤄 <별들의 고향>의 O.S.T를 만드는 등 새로운 음악을 주도했다. 김민기는 대학생이던 양희은을 앞세워 자신이 만든 노래들을 젊은 세대들에게 공급했다. 서강대생이던 양희은은 청바지와 통기타를 들고 그 이전에는 들어볼 수 없었던 포크 음악을 선보였다. 함께 거론됐던 서봉수는 젊은 프로바둑기사였으며, 이상룡은 젊은 MC로 이름을 날리는 스타였다.

별들의 고향 포스터, 책

  70년대는 기획기사에 거론됐던 스타들뿐 아니라 많은 청년이 대중문화계의 전면에 부각됐다. 최인호의 친구 이장호 감독은 영화 <별들의 고향>을 만들면서 스타가 됐으며, 송창식과 윤형주는 듀오 그룹 트윈폴리오로 많은 젊은이의 사랑을 받았다. 이처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포크 음악이 주류를 이루게 된 데는 밥 딜런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포크 가수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보릿고개를 지나 기타 한 대쯤은 살 수 있는 한국의 경제적인 형편도 일조했다. 또 그즈음 외국에서는 일본의 68혁명으로 불리는 학생 운동(1968) 및 우드스톡 페스티벌(1969) 등과 같은 청년문화 혁명이 일어났다. 그 당시 대중음악계에 모던 포크는 물론 스탠더드 팝, 팝 발라드, 로큰롤, 샹송 그리고 칸초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그 출발은 외국 팝송의 번안곡이 다수였다.

1974년 경향신문

  여하튼 김병익이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되는 문화를 새로운 흐름으로 규정한 이후 신문지면을 중심으로 청년문화에 대한 논쟁이 펼쳐졌다. 최인호는 ‘청년문화 선언’(한국일보 1974년 4월 24일 자)이라는 글에서 청년문화는 ‘침묵의 다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문화’라고 썼다. 그는 고전적이고 권위적이며, 위선적이며 남녀차별이 판치는 우리 사회에 청년문화가 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완상(전 서울대 교수, 사회학)은 경향신문에 ‘청년문화는 창조적이라야’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글을 통해 그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팝송·청바지·고고춤·생맥주·통기타 등으로 대표되는 표피적 청년문화’일 뿐이라면서 ‘기성문화에 맞서 이를 극복하는 창조적 대항 정신의 청년문화는 부재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서울대 학생들이 제작하는 <대학신문>은 ‘지금은 진정한 목소리가 들려야 할 때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청년문화를 비판했다. 이 글에서 청년문화를 한낱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퇴폐 문화, ‘버터에 버무린 깍두기’와도 같은 현상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다. 대신 암울한 현실을 주목해 청년들에게 진취적인 태도와 투철한 민족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소비적인 청년문화가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말은 점잖게 했지만 ‘딴따라에게 스타의 자리를 내줄 수 없다’라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

  그러나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지만 청년들이 쉽사리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싸워서 쟁취하는 거라면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과소비를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은 허례허식을 일소하기 위해 전면전을 선포했다. 양담배나 양주, 외제차, 냉장고 등을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설을 쇠는 것도 이중과세라며 전면 금지했다. 젊은이들에게는 고고춤, 장발족, 미니스커트 등을 퇴폐풍조라면서 강력하게 단속했다. 경찰과 젊은이들이 쫓고 쫓기는 진풍경이 속출했다. 명동 한가운데서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는 경찰관들이 치마 길이를 재는 우스꽝스러운 풍경이 연출된 것이다. 청년문화는 흔히 ‘통·블·생’으로 불렸다. 그 속에서 꽃핀 것이 쎄시봉, 오비스캐빈 같은 통기타 클럽문화였다.

양희은, 통기타와 청바지의 상징이 된 가수

  그러나 이 같은 논쟁은 채 꽃피기도 전에 싹이 잘렸다. 1974년 1월에는 유신헌법을 부정·반대·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가 내려지면서 세상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청년 문학의 기수 최인호, 젊은 영화 감독 이장호와 하길종, 가수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김민기의 혁명은 거기쯤서 중단됐다. 천재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신중현의 실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소비가 미덕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소비가 곧 퇴폐였던 시대에는 대중문화도 그저 소비 풍조를 부추기는 퇴폐 문화의 하나였다. 위정자들은 국민은 억압하고 탄압하여 생산을 부추겨야 돌아가는 대상들이었다. ‘민중의 개돼지’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던 누군가가 생각난다.

 

 

* 《쿨투라》 2020년 6월호(통권 7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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