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일진의 몰락
[미디어 비평] 일진의 몰락
  • 김세연(미디어비평가)
  • 승인 2020.07.10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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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1.

  방송가가 때 아닌 ‘학폭’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 예능프로 <부러우면 지는 거다>(MBC) 출연자가 학교 폭력 가해자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한 차례 논란이 일었다. 해당 출연자는 곧장 사과문을 게시하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계속되자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폭로한 A씨의 말에 과장이 있다고 주장했다. 잠시 진실공방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잠잠해진 상황이다.

  또 지난해에는 독특한 음색으로 주목받던 밴드 ‘잔나비’의 멤버가 그룹을 탈퇴했고, <프로듀스 101>(Mnet)연습생이 소속사(JYP)와 계약을 해지했다. 최근 <하트시그널3>(채널A)은 방영을 앞두고 출연진 학폭 의혹이 불거졌는데, 프로그램 초반 시청률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일진 출신이라는 의혹만으로도 큰 데미지를 떠안게 되기 때문에 방송가에서는 출연진 검증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는 중이다.

〈늑대의 유혹〉ⓒ쇼박스

  2.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한때 좀 놀았다’하는 아이돌 가수의 과거사는 강한 남자를 동경하는 소녀 팬들의 로망을 채워주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이에는 어느 정도 대중매체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속에서 학교 폭력이 미화되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이다. 한때 문화계 아이콘이었던 ‘귀여니’를 떠올려보자. 대표작 <늑대의 유혹>과 <그놈은 멋있었다>의 남자 주인공들은 둘다 일진이다.

  이들은 단순한 비행청소년이 아니라 부유한 집안 배경과 준수한 외모까지 겸비한 ‘명품 일진’이다. 언뜻 차가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기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순정파인데, 사실은 까칠한 성격도 어린 시절 상처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성애를 자극하는 면이 있다. 당시 귀여니 소설을 필두로 비슷한 형태의 학원물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인기를 얻었던 소설로는 <아빠가 된 일진짱>, <개기면 죽는다>, <내 여자친구를 일진짱에게 한 달 간 빌려주다>, <잘난 문제아 금연하기 프로젝트>등이 있다.

  지금은 어떨까. 최근 학원물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크리에이터로는 웹툰 작가 박태준을 꼽을 수 있다. 유명한 <외모지상주의>(이하 <외지주>)를 비롯해 <싸움독학>과 <인생존망>은 모두 고등학교 교실을 배경으로 일진 무리의 생활상을 그리는 작품이다. 지난 세대 학원물에는 어수룩하고 귀여운 여주인공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 자리를 ‘찐따’가 대신한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외모지상주의〉©네이버 웹툰

  우선 <외지주>는 뚱뚱하고 못생긴 찐따 ‘박형식’이 하루 중 절반을 잘생긴 몸으로 살게 되는 마법에 걸리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담고 있다. 별안간 신분이 상승된 박형식은 그러나 여전히 겸손한 태도로 약한 학생들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외모지상주의와 약육강식의 세계를 비판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싸움독학>에서는 같은 반 일진의 유튜브 촬영에 강제로 동원되던 찐따가 우연히 싸움 기술을 가르치는 영상을 발견하면서 판을 뒤흔든다. 찐따는 상대를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고 일진들을 하나둘씩 제압해 나간다. <인생존망>은 독특하게도 일진이 주인공이다. 어떤 저주에 의해 찐따의 몸속으로 들어간 일진이 친구들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과거의 잘못들을 깨달아간다. 그는 찐따를 괴롭히는 일진들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근본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장 많은 질타를 받은 것은 <외지주>인데 폭력적인 장면이 늘어나면서 애초의 기획의도와 상관없는 평범한 일진미화 만화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문화비평가 위근우는 박태준의 작품세계 전반을 아우르며 ‘전형적인 능력주의’라고 지적했다. 언더독의 반란을 그리는 것 같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일진이거나 혹은 노력을 통해 일진에 준하는 능력을 얻게 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 《경향신문》, 2020.01.17.

  이는 유의미한 분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일진의 위상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방향성이 희미해진 <외지주>에 비해 <싸움독학>과 <인생존망>은 비교적 권선징악적인 주제에 충실한 편이다. 작품의 연재시기를 참고하면 그 변화 과정이 선명하게 느껴지는데 <외지주>는 2014년에, 나머지 두 작품은 2019년에 시작되었다. 일진은 이제 분명한 ‘참교육’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각 회차마다 달리는 댓글을 보면 독자들 역시 이런 부분에 대해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MBC(좌), ©채널 A(우)

  3.

  최근 학폭 미투가 잦아진 이유 중 하나는 SNS의 발달에 있다. <싸움독학> 유호빈이 유튜브로 일진 빡고를 저격하면서 반란을 꾀했듯이, 누구든 SNS로 남을 고발할 수 있다. 사이버 폭력의 수단으로 활용되던 SNS가(카톡 지옥, 신상유포 등) 새로운 민주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최근 사회 전반에 걸쳐 소수자와 약자에 관한 감수성이 높아진 것 또한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사람들은 폭력과 인권 문제에 민감하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것처럼 사회 전반이 폭압적 지배 하에 있을 때는 작은 폭력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학교 폭력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유명 방송인들이 줄줄이 학폭 사건에 연루되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무심코 하는 행동들이 자신의 미래를 짓밟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갖는다고. ‘일진 낙인’의 위력을 알게 된 학생들이 스스로 행동을 검열하게 되는 것이다. 학폭 미투 현상은 그 변화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 물론 마녀사냥식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일은 경계해야 하며 ‘피해주장자’의 말은 충분한 검증이 필요하다. 다만 현재로서는 그것이 발생시키는 긍정적인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추락하는 일진은 날개가 없다는 것을 모두들 지켜보고 있기에.

 

 

* 《쿨투라》 2020년 6월호(통권 7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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