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영화 격월평] 거기에 원래 있었던 것: 미이케 다카시, 〈퍼스트 러브(First Love)〉(2019)
[장르 영화 격월평] 거기에 원래 있었던 것: 미이케 다카시, 〈퍼스트 러브(First Love)〉(2019)
  • 양진호(영화평론가)
  • 승인 2020.07.1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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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케 다카시, 〈퍼스트 러브(First Love)〉(2019)
©와이드 릴리즈

  아오야마 신지는 사회의 길고 지루한 폭력이 몸에 새겨진 사람들(<유레카> <도모구이>등)을 그려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폭력의 주체인 아버지가 사라지거나 지워진 가족(혹은 공동체)의 풍경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는 <아사코>를 통해 일상에 대한 환상이 무너진 곳에서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설명 가능한 차원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의 증상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중문화 시장은 그들의 광기를 해석 불가능한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상업 영화 감독인지, 아니면 전위적인 예술가인지 알 수 없는 감독들에 대해 손꼽아보면 자연스럽게 먼저 떠오르는 감독은 소노 시온과 미이케 다카시다. 그들은 칸이나 베를린 영화제 등의 경쟁 부문에 자주 초청될 만큼 보편적 인지도를 획득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클리셰들-폭력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묘사와 여성의 신체에 대한 관음증적 묘사-때문에 그들을 ‘거장’으로 부르기를 주저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단순한 오락적 쾌감이나 현실에 대한 이성적 비판 모두와 거리를 둔 것이거나 혹은 그 둘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용해된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미이케 다카시는 최근 몇 년 동안 만화와 소설을 실사화하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를 컬트적으로 따르는 팬들조차 지지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만의 방식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다. <퍼스트 러브>는 그런 그가 오랜만에 들고 온 ‘원작 없는’ 작품으로, 대표작인 <13인의 자객>이나 <오디션>와 같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애매한 상업 영화 커리어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기괴한 재미를 담고 있다. 이번 영화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포주에게 팔려간 소녀와 아마추어 복싱 선수인 청년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데이빗 린치의 영화 <광란의 사랑>에서처럼 이 영화에서 사랑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 그것은 폭발을 위한 도화선 역할을 할 뿐이다. 파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실감하는 주체들은 그들의 여정에서 어떠한 달콤함도 보여주지 않으며, 영화는 단지 이상한 사건을 거치며 두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이 처음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와이드 릴리즈

  영화는 링에 오른 레오가 상대 선수의 얼굴에 호쾌한 훅을 날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야쿠자의 잘린 목이 바닥에 떨어져 굴러가다가 눈을 깜빡이는 쇼트가 이어진다. 누군가는 스포츠의 규칙에 근거해서, 다른 누군가는 뒷골목의 규칙에 근거해서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다. 전혀 다른 세계의 이 두 가지 행동이 ‘나’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미이케 감독은 이미 <박스>와 <임프린트>를 통해 보여주었다. <박스>에서는 어릴 적 서커스단에서 죽여버린(서커스단에 대한 기억은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언니가 자기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막는 여성 작가가, <임프린트>에서는 자신을 강간한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머리 오른편에서 튀어나온 ‘언니(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의 도움을 받는 한 게이샤가 등장한다. 태어나자마자 쓰레기 더미 사이에 버려진 레오에게 세계는 자신을 환대하지 않은 두려운 아버지일 뿐이다. 그러나 그 세계 자체를 파괴할 수도 없고, 설령 파괴한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는 자신이 돌아갈 곳이 없게 된다. 그래서 그는 복싱이라는 형식을 통해 타자를 ‘안전하게’ 파괴했고, 선수 대기실에 돌아와 승리를 즐기지 않는 자신을 꾸지람하는 코치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와이드 릴리즈

  ‘모니카’라는 가명을 쓰는 소녀 ‘유리’에게 그런 아버지는 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어두컴컴한 포주의 골방에 갇혀서 마약으로 고통을 억누르던 그녀에게 팬티만 입은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유리는 그때마다 잠긴 철문을 두들기며 ‘류지 군(어릴 적 자신을 도와 아버지를 때려눕혔던 학교 친구)’을 찾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포주인 젊은 여성 ‘주리’이다. 그녀는 유리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그 망할 놈의 망상은 좀 때려치울 수 없어?”라고 소리 지른다. 자신에게 허용된 유일한 망각의 수단인 마약에 취해 누워 있는 그녀의 공허한 얼굴과 눈빛. 이 쇼트의 앞에는 상대 선수의 럭키 펀치를 맞고 쓰러진 레오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배치되어 있다. 그들은 저항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현실에서 이미 조금씩 떨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레오는 뇌종양 진단을 받으면서, 유리는 야쿠자와 중국 마피아의 싸움에 갑작스럽게 말려들게 되면서 현실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된다.

©와이드 릴리즈

  야쿠자 조직의 중간 관리자로 있는 ‘카제’와 그의 파트너인 비리 경찰 ‘오토모’에게 있어 ‘아버지’라고 할 수있는 사회와 소속 집단은 그들이 서 있는 위치를 정해준 ‘대리인’일 뿐이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걸 알기에, 그들은 아버지의 눈을 속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길 뿐이다. 오토모는 공권력을 통해 야쿠자들의 마약 밀매 현장을 급습할 수 있었고, 카제는 그런 오토모에게 접근해 자기 조직의 마약을 빼돌리려고 한다. 밀회 장소에서 함께 구워 먹는 고기는 그들의 냉소적인 유대감을 보여주듯 희미한 연기를 내뿜는다.

  이들과는 다르게 집단과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화시킨 이들도 있다. 야쿠자 서열 2위인 ‘곤도’는 자신의 보스를 죽인 중국 마피아 보스 ‘외팔이’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하며 복역 기간을 견뎌왔고, ‘외팔이’는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 버린 야쿠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중국에서 돌아왔다. 그들에게 싸움의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조직’이라는 대의를 위해 그들은 자신을 싸움터로 내몬다. 이렇게 카제와 오토모도, 그리고 곤도와 외팔이도 ‘부재하는 아버지에게서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는다’는 느와르 영화의 공식을 따른다. 그것이 그들의 ‘관계’, 즉 보편적 사회와는 다른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선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유리와 레오가 관계 맺는 방식은 우발적이다. 카제는 조직의 마약 밀매가 이뤄지는 장소인 포주(주리의 남자친구인 ‘야스’는 카제의 부하 조직원)의 방에 잠입하기 위해 오토모를 통해 주리 커플과 유리를 불러낸다. 그리고 조건만남을 핑계로 해 오토모가 유리를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을 때 카제가 포주의 방에 몰래 들어가 마약을 가지고 나오려고 한다. 그런데 오토모가 유리를 데리고 다닐 때 갑자기 유리의 망상이 작동해 길거리에서 팬티만 입은 아버지가 나타나고, 유리는 오토를 뿌리친 채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한다. 그녀가 사라지면 곤란한 일을 겪을 수도 있는 오토모는 유리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데, 그때 우연히 길거리에 서 있던 레오가 유리의 비명을 듣고는 그녀를 뒤쫓는 오토모를 치한으로 판단하여 강한 펀치로 쓰러뜨린다. 뒤늦게 오토모가 흘린 경찰 배지를 발견하고는 당황하지만, 자신을 ‘류지 군’이라고 부르며 함께 도망가자고 하는 유리에게 이끌려 레오는 함께 뛰기 시작한다. 레오는 자신이 유리를 돕는 것은 ‘타인’의 위치를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그녀를 외면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토모에게 펀치를 날리던 주체, 링 위에서 패배하고 뇌종양으로 희망을 잃은 그가 간신히 붙들고 있던 초라한 소시민이라는 주체 뒤에 숨겨져 있던 ‘류지 군’이라는 이름을 그 소녀가 불러 주었기 때문에 레오는 그녀의 요청에 응답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진정한 ‘류지 군’은 유리와 레오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내면에 억압하고 있었던 ‘자기 자신’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박스>와 <임프린트>의 주인공들이 온 힘을 다해 숨기고 있던 자신의 ‘언니’처럼 무서운 사건들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기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와이드 릴리즈

  영화는 모든 인물들이 대형 마트에 집결해 전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그들 각자의 충동’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카제와 오토모는 자신이 입수한 마약을 지키기 위해, 주리는 자기를 죽이려고 한 카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곤도와 외팔이는 조직의 수호라는 ‘대의’를 넘어 그들의 숙명을 완전히 해소하기 위해 싸운다(곤도의 야쿠자 집단은 자신들의 마약을 훔쳐간 것이 중국 마피아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레오와 유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견한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잃지 않기 위해 싸운다. 이 전투 신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표현하기 위해 미이케 감독은 기존에 사용하기도 했던 끔찍하면서도 만화적인 미장센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약물과 피와 섹슈얼리티가 뒤범벅되지만, 그것들은 오직 부조리한 현실을 깨뜨린 뒤에 반드시 사라져야 할 운명을 가진 유령의 흔적과 같이 나타날 뿐이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외면한 채 성대한 올림픽을 준비했던 일본 정부는 자기 언어를 갖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든 이들을 또다시 코로나19라는 재난에 그대로 노출시키고 말았다. 일본의 영화감독들은 언어가 되지 못한 이들의 음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 원초적인 힘을 닮은 광기를 다시 한 번 보여준 미이케 감독의 <퍼스트 러브>는 빈틈없는 일상의 서사와 코로나19라는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지쳐 있을 영화팬들에게 ‘일상 바깥의 나’를 확인시켜줄 흥미로운 작품이 될 것이다. <퍼스트 러브>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국내 정식 개봉은 정해져 있지 않다.


1. ‘폭발’은 일본 대중문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모티프이다. 대중문화 평론가 오카다 토시오는 <에반게리온> 시리즈 등의 대표작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안노 히데아키의 작품에 대해 “그가 그리는 ‘폭발’은 메카(Mechanic, 기계로 이루어진 물체를 소재로 다루는 장르)에 그치지 않고, 되풀이되며 모티프로서 등장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연애나 애정은 모두 깨지는 순간밖에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가 망가지는 순간을 묘사함으로써 그 존재를 처음으로 실감하는 식입니다.”(『오카다 토시오의 성인을 위한 교양-아니메』)라고 언급하고 있다.
2. 옴니버스 공포 영화 <쓰리 몬스터>의 1부
3. 미국 쇼타임 케이블 TV를 통해 방송된 단편 호러 영화 시리즈인 <마스터즈 오브 호러> 시즌 1의 13번째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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