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이 시대의 사랑: 김봉곤 『시절과 기분』
[문학 월평] 이 시대의 사랑: 김봉곤 『시절과 기분』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0.07.3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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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시절과 기분』

  이 사회에서 억압과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경제적 문제와 정신적 문제를 함께 겪는다. 편의상 각각을 분배와 인정의 문제라고 칭하자. 가령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동일한 노동을 하는 다른 노동자들보다 돈을 덜 받는다는 점에서 ‘분배’의 차별을 받고,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존중(인정)을 받지 못하는 셈이다. 여성은 남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또한 여성혐오(인정)의 희생자가 된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이 등장하는 서사작품은 분배와 인정의 문제를 동시에 묻게 되는 경향이 있다. 노동소설은 분배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노동자를 천시하는 이데올로기를 함께 고발하는 경우가 많고, 페미니즘 문학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여성혐오에 집중할 때가 많지만 여성이 겪는 경제적 문제를 자주 언급한다.

  그런데 성소수자들은 온갖 억압과 차별을 받는 존재이지만, 그들이 겪는 문제는 경제적 구조(분배)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사회에서 커밍아웃을 한 사람은 온갖 편견과 폭력에 시달리기 때문에, 그들 중 대다수는 사회에서 자신의 성적지향을 숨기고 살아간다. 그래서 성정체성으로 인한 경제적 차별은 잘 가시화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동성애자들이 등장하는 문학과 영화를 비롯한 서사들이 경제적 분배와 계급의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지 않는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계급문제와 동성애라는 소재를 비교적 잘 조합했다는 평가를 받은 영화 <아가씨>(박찬욱, 2016) 같은 예외가 있지만, 이 작품은 여성들의 동성애를 해방적 연대의식의 분출구로 그려낸 것이었다. ‘부적절한 사랑’을 모사하는 퀴어 서사에서, 경제적 구조의 문제 같은 것은 주요한 논점이 되지 못했다.

  퀴어 문학이 사회의 구조를 총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는 비판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 성소수자가 사회적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퀴어 문학은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핍진하게 다룬 재래의 리얼리즘 작품들과 차별화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퀴어 서사의 목적은 ‘비정상적’인 사랑을 그려내는 것이다. 반면 과거의 리얼리즘 작품이 추구했던 목적 중 하나는 바람직한 ‘사랑’을 창조해내는 것이었다. 숭고한 사랑을 설파했던 톨스토이와 이광수의 소설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백낙청만 해도 「시민문학론」에서 바람직한 시민이 가져야할 자질을 ‘사랑’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저항적 리얼리즘 문학이 대중적 연애 이야기와 구별되는 것은 상식이지만, 좋은 사랑 이야기는 바람직한 사회적 가치에 대한 교훈을 갖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같은 작품을 떠올려보라.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가 지적했듯,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이 소설의 줄거리는 바람직한 삶(특히 바람직한 결혼)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심지어 막장 불륜 드라마 같은 서사조차도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비판을 통해 ‘좋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만큼은 교훈적이다. 이에 반해 퀴어 서사는 애당초 ‘비정상적’이고 ‘부적절’한 것으로 치부 받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장르인 만큼, 그런 식의 범용적 계몽성을 가질 수 없다.

  장황하게 퀴어 서사의 일반적인 특징을 정리한 것 은, 이 도식이 김봉곤의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시각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책의 표제작에서 주인공은 청년 작가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는 세대와 직업에 속하는 인물을 등장시켰음에도 이 작품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절과 기분』의 수록작품들은 대신 충동적인 감정과 우발적인 사건을 공들여 묘사한다. 대학에서 사제의 연을 맺었던 이들이 현학적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서로에게 매혹을 느낀다거나, 데이팅 얩을 통해 처음 만난 사람들이 어쩌다보니 몸을 섞게 된다는 식의 사건들이 김봉곤의 소설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이를 두고 ‘바람직한 사랑’이나 ‘부적절한 관계’라고 도덕적인 평가를 제시하긴 힘들 것이다.

  김봉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절대 다수가 게이들이지만, 이런 식의 가볍고 퀴어(queer)한 사랑이 동성애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 「시절과 기분」은 어떤 이성애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중 주인공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 한 여자를 사귄 적이 있었다. 이 커플은 서로에게 열렬한 감정을 가져서 연애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창한 목적 같은 것이 없이 그저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갔던 것일 뿐이다. 둘은 한 시절을 공유하고 그 시절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과거의 예술이 찬양하던 열정적 사랑과 비교하자면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라고 하기도 힘들 만큼 하찮게 느껴진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점에서, 적당한 나이의 성인들이 사랑하는 이성을 찾고 결혼을 해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소울 메이트로 살아가야 한다는 고전적 사랑관을 근거로 삼아 이들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벼운 유희나 자위처럼 보이는 공존 자체가 빛나는 경험일 수도 있음을 김봉곤의 소설은 아름답게 보여준다.

  사실 「시절과 기분」은 그 사랑이 끝난 후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남자는 옛애인을 다시 만나면 뒤늦게 발견한 자신의 성적지향을 고백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왜 그는 자신이 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두렵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미 헤어진 과거의 애인에게 커밍아웃을 한다고 해서 무슨 손해를 보겠는가. 다만 자신이 게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여성과 함께 보내온 시절의 추억은, 아름다운 한때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기 이전에 저지른 ‘흑역사’로 굳어질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옛애인에게 커밍아웃을 망설이는 까닭일 것이다. 아름다운 ‘시절’의 ‘기분’에만 머무르려는 그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어쨌든 이 소설은 그가 고민하고 망설이는 모습까지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렇다면 여느 소수자 문학과 다른 문법을 통해, 아름다운 시절의 기분을 이토록 근사하게 보여주는 일에 오롯이 집중하는 이 소설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아름다움의 밀도만으로도 이 소설집은 일독할 가치가 있다.

 

 

* 《쿨투라》 2020년 7월호(통권 7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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