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Theme] 다시 처음으로
[9월 Theme] 다시 처음으로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18.09.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년 가을, 나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왔다. 자취방은 버려야 할 것들로 가득했다. 첫사랑과 나눴던 연애편지, 누렇게 변색된 속옷, 새벽에 끼적인 감성 충만한 유언장…… 더불어 안녕을 고했다. 볕 좋은 날 버릇처럼 들렀던 연남동 서점, 찰리 채플린 영화를 상영해주던 성수동 카페, 비슷한 애들끼리 모여 한국영화는 어쩌고 문학이 저쩌고 떠들어대던 신촌 술집에.
  사실은 도망친 거다. 등단 후 사라지는 작가가 너일 수도 있다며 겁주던 선배들로부터. 무지함을 감추려 애쓰던 술자리로부터. 누군가와 경쟁 붙이며 왜 더 잘하지 못하냐고 채근하던 사람들로부터. 읽고 쓰는 게 좋아 선택한 일이었다. 도마 위에 올라난도질당하며 눈알만 끔뻑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너덜너덜해진 멘탈을 끌어안고 패잔병처럼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찾은 건 책꽂이였다. 그간 모아온 책을 정리해나갔다. 차곡차곡. 출판사별로. 깔 맞춰서 보기 좋게. 책도 더럽게 많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의 기원을 나는 알지 못했다. 앞만 보고 뛰었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손을 멈추고 창밖의 풍경이 바뀌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리를 마치지 못한 채 며칠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몸은 무거워졌다. 이대로 모든 게 딱딱하게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을 따라 밭에 나가보기로 했다. 여차하면 농부로 사는 것도 고려해보자 싶었다. 요즘은 귀농이 트렌드라는데.
  밀짚모자에 고무장화를 신으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김태리처럼 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냥 모자 쓴 나였다. 밭에 들어서자 도랑에서 튀어나온 개구리에 비명을 질렀다. 고작 개구리에 놀라? 농부 할 거라며? 엄마가 깔깔댔다. 할 말 없다. 개구리뿐 아니라 벌도 지네도 지렁이도 무서우니까. 응암동에 살 때는 눈앞에서 퍼드덕대는 나방 한 마리때문에 기절 직전까지 갔었다. 왜 맘대로 들어 오냐고! 니가 월세 내는 것도 아니면서!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소리만 지르던 게 기억난다. 그땐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는데.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앓는 소리를 냈다. 뼈마디 구석구석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누구 못지않게 도시에서 상처받고 돌아왔건만 귀농이 답은 아닌 듯 했다. 와중에 백일홍 꽃씨를 받으라는 엄마의 전언. 속세를 떠나 농부가 되겠다고 외친 나의 섣부름을 원망하며 말린 꽃대를 잘랐다. 수북이 쌓여가는 씨를 보며 생각했다. 내년엔 여기서 몇이나 살아남을까.
  ‘살아남을까’라는 질문은 곧 ‘살아남아야 할까’로 바뀌었다. 나무가 되기 위해 씨앗이 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한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또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한 목적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우리를 미치게 만들 것이다. 시큰거리는 팔목을 움켜쥐었다. 아프다. 살아있기 때문에 아프다. 이 아픔마저도 나의 것이다.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자 내 안에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 차 있음이 느껴졌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책을 반듯하게 꽂았다. 일기장을 펴고 꾹꾹 눌러 적었다.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여기에. 그게 중요하다.’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문장을 뱉어낸다. 첫 문장도 거기에 다음 문장을 잇는 일도 쉽진 않다. 가다가 막히면 쉼표를 찍는다. 더듬더듬 하지만 매일같이 쓴다. 작은 생채기에 호들갑 떨며 징징대다가. 좋은 작품을 발견하고 두근대다가. 읽고. 울고. 아파하고. 다독이고. 새벽엔 일어나 유언장도 쓰고. 매일같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서
 

문은강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 《쿨투라》 2018년 9월호(통권 51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