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8] 고독의 창법, 조용필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8] 고독의 창법, 조용필
  • 유성호(본지 주간, 한양대 국문과 교수)
  • 승인 2019.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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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PC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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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속에서의 ‘위대한 탄생’

  조용필은 특정 장르를 훌쩍 넘어서는 가수이자 장르마다 자신만의 음색을 극점에서 구가한 최첨단의 아방가르드다. 그의 목소리는 락이나 민요를 바탕으로 한 굵은 음역音域에서 발원하여, 트로트면 트로트, 발라드면 발라드, 댄스나 동요면 그것들대로 한없이 질주해간다. 80년대초에 그가 한동안 불렀던 캐럴도 아직 귀에 선하다. 그러고 보니 조용필이 모든 장르를 섭렵했던 것이 아니고, 조용필 스스로 독립 장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의 노래는 존재 가능한 거의 모든 장르를 모아놓은 가요사의 대 집성集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한 장르에서 지속적 성취를 보인 입장에서 보면, 다른 장르에 힘겹게 적응하고 또 거기서 예외 없이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조용필의 행보는 신비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용필은 자신이 보여준 광폭의 발걸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아이디어, 영감 등이 중요한 것이지 자기 삶이 순탄치 않고 좀 그렇다 해서 음악에 연관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수는 한 명의 엔터테이너이고 노래 연기자입니다. 가수로서인정받으려면 젊은 층에서부터 노년 팬까지 좋아할 수 있도록 민요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내 장르로 들어가겠지만 내 삶을 곡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대중이 ‘저것은 바로 내 노래야’라고 느끼는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높은 평판을 받는 예술인이고 또 스스로 매우 친화적인 대중적 흡인력을 가졌던 조용필이지만, 그의 음악 저류底流에 선명하게 흐르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깊디깊은 ‘고독’이었다. 그는 파블로 피카소가 갈파한 것처럼, 커다란 고독 속에서 가장 ‘위대한 탄생’을 해간 예술인이다. 그 간단없는 고독의 시간으로, 쓸쓸한 오롯함의 힘으로, 그는 반세기 동안 노래를 불렀고 또 지금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을 넘어, 영원의 사랑으로

  1980년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군부 권력의 잔혹한 탄생과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이 엇갈린 해로 기록될 것이다. <촛불>을 타이틀곡으로 한 1980년의 앨범에 수록된 조용필의 간절한 노래 가운데 <외로워 마세요>가 있는데, 조용필은 외로움을 노래하면서도그 외로움을 헤어짐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가령 그는 여기서 사랑의 아름다움과 함께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성거리며 반추하는 것임을 ‘남은 자’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한 시대의 주변과 외곽을 자임하면서 탄탄대로가 아닌 오솔길의 숨쉴 만함을 노래한다. 그의 강렬한 허스키 보이스를 들어보자.

외로워 마세요.
그대 곁에 내가 있어요.
물밀듯 다가오는 지난 추억이
지금도 아름다워요.
이 밤이 새고 나면 가야 하지만
그것을 이별이라 하지 말아요.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우리 마음 함께 있으니
그대 그대 정말 외로워 마세요.

외로워 마세요.
그대 곁에 내가 있어요.
물밀듯 다가오는 지난 추억이
지금도 아름다워요.
이 밤이 새고 나면 가야 하지만
그것을 이별이라 하지 말아요.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우리 마음 함께 있으니
그대 그대 정말 외로워 마세요.
― <외로워 마세요>(1980)

  박건호가 작사하고 김영광이 작곡한 이 노래는,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간절한 호소의 어조로 짜여져 있다.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그대’에게 “물밀듯 다가오는 지난 추억”의 힘으로 영원히 곁에 있겠다는 다짐과 고백을 이어간다. 거듭 외로워하지 말라는 전언을 통해 이 노래는 떠나감이 곧 영원한 이별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우리 마음 함께” 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함으로써 외로움이 ‘그대’와 ‘나’에게만 찾아오는 몫이 아님을 들려준다. 이처럼 단순한 노랫말에 실린 것은, 외로움이라는 경험을 서로에 대한 믿음과 그리움으로 넘어서면서 사랑의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는 다짐인 셈이다. 이별이라는 경험을 초월하는 영원한 사랑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순간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이는 그리움의 서정을 한껏 아름다운 형상으로 전이시킨 예술적 결정結晶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밤이 지나면 서로 떠나야 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면에서 발화하는 영원의 사랑을 ‘정말’이라는 단어를 통해 증폭시키면서, 이 노래는 세상 사람들에게 ‘외로움’이 우리를 감싼다 하더라도 우리는 따뜻하게 서로를 안아들일 것임을 강조한다. 다른 곡에서 “귓가에 그대의 속삭임 외로움의 시작”(<연인의 속삭임>)이라고 말한 것처럼, 조용필은 사랑의 과정에 필연적으로 ‘외로움’이 따른다는 것과, 결국 그것을 넘어서는 힘이 사랑 안에 흐르고 있음을 노래한 것이다. 과연 누구라서 외롭지 않겠는가. 누구라서 이 힘겨운 세상에서 ‘그대’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조용필이 “외로워 마세요. 그대 곁에 내기 있어요.”라고 부르는 노래 속에서 가없이 커다란 위안과 함께 상상적인 ‘영원의 사랑’을 축조할 뿐이다. 그대, 정말, 외로워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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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예술적 존재의 거소居所

  이제 조용필은 ‘외로움’을 넘어 삶의 근원적 ‘고독’을 발견하고 채택하고 그것을 배치해간다. 곽태요가 노랫말을 쓰고 조용필이 직접 곡을 입힌 <고독한 러너>(1992)는 그 대표 격이다. 곽태요는 조용필의 또 다른 히트곡 <슬픈 베아트리체>를 작사하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 빛을 발하는 ‘고독’의 빛깔은 고요 속에서 삶을 투명하게 응시하게 하는 긴장 같은 것을 두르고 있다. 그렇게 삶을 바라보고 또 달려가는 형상으로서의 ‘고독한 러너’는 조용필 자신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어느 하늘에 꿈이 있을까
어느 바다에 사랑 있을까
꿈을 찾아 사랑 찾아 뛰어가네.

어두운 밤에 숲속을 지나
비 바람 부는 언덕을 넘어
낯설은 거리 낯선 시간을 뛰어가네.

서로 사랑한 친구가 있었네.
내가 사랑한 임도 있었네.

이제는 모두 떠나버리고 홀로 남아
시작이라는 신호도 없고
마지막이란 표시도 없이
인생이란 고독한 길을 뛰어가네.

사랑도 미움도 스쳐간 길
꿈 속에 보이는 고독한 길 헤헤

지쳐 쓰러져도 달려가리라 푸른 바다에 파도가 되어
우리 인생이란 머나먼 길에 나는 고독한 러너가 되어

지쳐 쓰러져도 달려가리라 푸른 바다에 파도가 되어
우리 인생이란 머나먼 길에 나는 고독한 러너가 되어

지쳐 쓰러져도 달려가리라 나는 고독한 러너가 되어

아침햇살에 솟아오르고 저녁노을에 지는 날까지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뛰어가리.
― <고독한 러너>(1993)

  일찍이 시인 김소월은 대표작 「산유화山有花」에서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을 노래함으로써 삶의 불가피한 고독의 형상을 아름답게 남겼다. 그 고독은 너무나도 정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그 작품에서 견고한 고독의 물질성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조용필은 그 고독에 역동성을 부여하여 그것이 ‘꿈’과 ‘사랑’을 가능케 한 삶의 불가피한 조건임을 못박는다. 그렇게 하늘로 바다로 ‘꿈’과 ‘사랑’을 찾아 끝없이 뛰어가는 ‘고독한 러너’는, 생의 열정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의 일반론이기도 하겠지만, 정말 끝없이 뛰어온 조용필의 일생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조용필은 후기로 갈수록 자전적인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이 또한 그 핵심 사례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어둡고 바람 부는 숲과 언덕을 지나 쉼 없이 낯선 거리와 시간을 뛰어가는 러너의 모습은, 그 자체로 조용필의 생애를 비근하게 은유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한 친구도 있었고 임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떠나버리고 홀로 남아 “인생이란 고독한 길을 뛰어”가는 동안, 시작도 마지막도 알려주지 않는 “사랑도 미움도 스쳐간 길/꿈 속에 보이는 고독한 길”에서, 러너는 지쳐 쓰러져도 “푸른 바다에 파도가 되어”달라가겠다고 한다. “인생이란 머나먼 길”에 “고독한 러너”가 되어서 말이다. 쉼이 주는 평화와 안식을 짐짓 등지고 지쳐 쓰러져도 달려가겠다는 굳은 다짐은, 외로워하지 말라고 위안하던 목소리로부터 더욱 역동성을 얻어, 스스로 “푸른 바다에 파도”로 몸을 바꾸는 모습을 취해간다. 그 순간, 우리도 그를 따라 인생이란 머나먼 길을 나선 “고독한 러너”가 되어가지 않는가. ‘아침햇살’과 ‘저녁노을’이 솟고 지는 순간의 반복인 인생에서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뛰어가겠다는 의지의 강렬함과 지속성이 “산에서 만나는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킬리만자로의 표범>) 하고 외쳤던 그 에너지 그대로를 품은 채 한없이 번져간다.

  아닌 게 아니라 조용필은 다른 노래에서도 “그리움보낸 저기 저편에는 고독이 홀로 쓸쓸히 서 있고”(<그리움의 불꽃>), “노을이 남기고 간 짙은 고독”(<그 또한 내 삶인데>)이 후경後景처럼 자신을 두르고 있음을 알아간다. 그래서 ‘고독’은 그에게 모든 예술적 모티프의 원천이요 궁극이었던 셈이다. 일찍이 괴테도 “영감은 오직 고독 속에서 얻을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고독solitude’은 외따롭게 혼자 버려져 있는 감각적 쓸쓸함으로서의 ‘외로움loneliness’하고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단독자로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자각을 의미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들과는 달리 인간만이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앎으로써 세계와 자신을 인식할 수 있지않은가. 물론 고독은 홀로 있음의 의미를 띤다. 하지만 이를 ‘고립자’와 ‘단독자’로 나누어보면, 고립자는 기질적 문제에 속하며 단독자는 인간으로서의 불가피한 실존적 조건이 된다. 그 점에서 ‘고독’은 예술적 존재의 필연적 거소居所가 될 수밖에 없다. 

  고독의 정점에서 달리는 예술

  일찍이 키에르케고르는 고독 속에서 타자와의 참된 관계를 설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단독자는 모든 사람들 속의 단 한 사람을 의미함과 동시에 만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 단독자의 고독은 고립되고 절망적인 외로움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독에 깊이 들어간 세계에서 새로 발견하는 탄생의기쁨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조용필의 노래는 고독의 정점에서 달리는 양도할 수 없는 고유한 예술이다. 누군가에게는 외로워하지 말라는 한없는 위안을 주면서, 스스로에게는 지쳐 쓰러져도 고독하게 달리라는 끝없는 암시를 주는 고독의 창법에서, 우리도 크나큰 위안과 격려를 얻는다. 세상을 향해 외치는 고독한 함성이 되어 달려가는 황혼의 위대한 예술가가 저기 선연하게 보이지 않는가.

 

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으로 등단하여 한국 문단의 주요한 비평가로 활동해왔다. 저서로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침묵의 파문』 『정격과 역진의 정형 미학』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대중서사학회회장을 지냈다. 현재 본지 주간으로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 《쿨투라》 2019년 4월호(통권 5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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