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우리는 녹지 않는 폭설일 뿐: 이윤설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문학 월평] 우리는 녹지 않는 폭설일 뿐: 이윤설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 이지아(시인)
  • 승인 2022.01.01 0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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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시는, 시인에게 전부가 되었나. 시는 존재와 없음 사이에 있으며, 존재와 없음보다 더 아득하고 뜨거운 것을 만들기 위해, 모닥불을 지피는 시인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우직하게 시의 땔감을 모으고, 죽어가는 사유의 날짐승을 자신의 따뜻한 온기 근처로 끌고 온다. 이윤설의 첫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는 폭설처럼 환하다. 환하게 읽게 만든다. 그러면서 어떤 에너지를 일으키고, 그 에너지의 배면에는 언어가 말하지 못한 슬픔이 깊게 고여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의 명랑한 언어들은 어떤 이미지를 향하고 있을까. 이 시집은 끈질기게 ‘어떤 생각’을 놓지 않고 있다.

시는 어떤 생각을 생생하게 움직이는 장면으로, 이미지로 연출할 수 있다. 가령 극작가이기도 한 이윤설의 시적 이미지는 극적인 요소를 효과적으로 창출한다. 세계와의 문제를 부정하고 불화하는 방식보다는 그에게 던져진 세계의 문제의식, 고독이나 이별, 외로움, 상처에 감정적으로 굴복하지 않으며, 씩씩하게 대상을 감각적으로 마주한다. “씹을수록 맛이 나”는 세계와의 대화를 시 속에서 다른 이야기로 재창조하며, 전형적인 의미에 빠지지 않으려고, 상상의 땔감 바구니를 가득 채운다.

그래서 이미지를 통과한 그의 인식은 낯설고, 살아 있고, 어디로 튕겨 나갈지 예측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죽음이라는 관념을 이미지로 극복하기 위해 다정과 여유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의 무덤은 털모자처럼 따뜻해 보여요/그는 옆으로 누워 책을 뒤적”(「그 집 앞」)일 것이다. 슬픔이 인간의 생활을 억누르고 추락하게 만든다면, 이윤설은 여기서 아예 그 슬픔을 감당하고 감싸 안으며 새로운 대상을 탄생시켜 버린다. “슬픈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기차가 되어 있다”(「기차생각」).

즉 슬픔은 감정이 아니라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다른 풍경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되어버린다. 이 창작은 이윤설의 시 세계에서 중요한 특징이 된다. 그는 슬픔에 대해 냉소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내적으로 동일시하는데, 그 동일시는 단지 공감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독자가 시적 대상을 둘러싼 다른 면들을 새롭게 관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다른 방식의 삶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시 문장 곳곳에 발견된 발랄한 의성어와 의태어들은 자연스럽게 〔내부 동일시=외부 관찰〕의 연결 기능이 되곤 한다. 즉 ‘슬픔’에 함몰되어 자기혐오나 원망의 감정이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다른 물질 ‘기차’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눈을 통해 그 이미지는 보편적인 감정에서 완전히 다른 대상이 되는 것이다. 독자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천진하고 명랑하고, 아픈 이미지를 경험하게 된다.

  하여 목이 가느다란 개미가 조심조심 다가와 내 눈물을 옮겨가지 않을까 한다
  개미들이 그걸 나누어 먹고 배부른 잠을 일렬로 누워 자면서 가난한 집 어버이와 새끼들처럼 다정하니 나란할지도 모르겠다
  (중략)
  그때 우리 사이를 신이 지나가고 있던 것이다 바람의 길목에서 우리는 쓸쓸하고 소란하고 춥다 그리고 멈추었던 시계가 움직이며 우리는 또 멀어질 것이다 
  
하여 우리는 신의 구슬로 흩어져 구르지만 어딘가에서 하나의 심장으로 꿰어져 이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신은 더 이상 스쳐 지나가지 않으며 그의 목에 우리는 두 팔을 둘러 안고 아이처럼 기뻐 반짝일 것이다
  - 「개미와 나」, 부분

이윤설의 이미지는 실재와 초월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화자는 실제 삶의 장면을 그리고 있는 듯하지만 그 대상을 다른 차원의 세계로 끌고 간다. 위의 시에서 “개미”는 조심조심 다가와 “눈물”을 옮긴다. 개미들은 나의 눈물을 나누어 먹고 슬픔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다정”한 세계를 만들어 나란히 있다. 우리의 다정함은 “신의 구슬”처럼 흩어져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하나의 심장’으로 꿰어져 모이는 날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실재는 신의 ‘영역’을 아이처럼 만져보며 “기뻐 반짝”일 수 있다. 우리의 생은 ‘눈물 구슬’처럼 흩어져 굴러가겠지만, 언젠가 신이 살고있는 곳에 닿아 우리의 세계를 환하게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시인은 ‘개미와 나’의 눈물은 신의 구슬이 될 수 있으며, 신의 영역까지 넘어가 슬픔을 기쁨의 차원으로 초월할 수 있게, 시의 가능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재와 초월은 화자의 고통, 존재의 고통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성립될 수 있다. 시인이 원하는 이상세계는 무한의 세계이지만 현실은 무한하지 않다. “멈추었던 시계가 움직이”고 다시 또 “멀어질” 이 불일치의 관계에서 시인은 고통받고 고독하다. “이 존재는 실재에 대해 부분적이고 추상적인 측면만을 제공하는 주어진 전적인 이미지인 존재의 본질 자체가 될 것이다.”(『타자성과 초월』, 에마뉘엘 레비나스, p.64) 이윤설의 시적 이미지는 화자의 고통을 미적으로 극복하고자, 시의 “길목에서 우리는 쓸쓸하고 소란”한 대상들을 타자화한다. 그래서 신이 아닌 유한자로서의 고통에 대해 당당하게 노래할 수 있다. “나는 아물린 보도블록을 찢어 벌려, 나도 죽고요 곧, 아저씨도 죽고요 곧”(「우리는 죽어요 곧」). 고통에 대처하는 그의 시적 태도는 시의 에너지를 추락시키지 않으며, 이미지를 통해 다시 비상하며 안녕을 고한다. “눅눅해지는 늑골도 안녕이다 오버/미안해 말아라 오버/오버다 오버”(「오버」)라고 강조하며 지금 이 세계를 떠나리로 했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기로 했다 오버/널 떠나기로 했다 오버/엔진이 툴툴거리는 비행기라도/불시착하는 곳이 너만 아니면 된다 오버/열대 야자수 잎이 스치고 바나나투성일 거다 오버/행복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오버/죽이 끓고 변죽이 울고 이랬다저랬다 좀 닥치고 싶다 오버/원숭이 손을 잡고 머리 위 날아가는 새를 벗삼아/아구아나처럼 엉금엉금이라도 갈거다 오버/왜 그렇게 쥐었다 폈다 꼬깃꼬깃해지도록 사랑했을까 오버/사랑해서 주름이 돼버린 얼굴을 버리지 못 했을까 오버/
  - 「오버」, 부분

그렇다면 시인에게 “지구”는 지옥이었을까, 천국이었을까. 시인은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지구의 반대편은 어디일까. 혹시 시인 자신이 살지 않았던 곳, 자신이 없는 그런 곳일까. 그것은 이미지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말한다. 너무나 “사랑해서 주름이 돼버린” 얼굴을 버리지 못하고, “툴툴거리는 비행기”를 타고 “불시착”하고 싶은 곳이다.

“너”가 없는 곳, 지구가 아닌 곳으로 가야 한다. 시인은 포기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너’를 “쥐었다 폈다 꼬깃꼬깃해지도록 사랑했을까”. 여기서 ‘너’는 상대를 ‘너무’나 사랑했던 자기 자신을 타자화시킨 것이며, 그런 헌신적 사랑에 대한 상처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꼬깃꼬깃한 사랑’을 진짜로 떠나겠다는 것이 아니며, 나는 끝까지 이 지구를 포기하지 않고, ‘너’를 사랑했던 ‘나’ 자신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바나나 투성이, 원숭이, 야자수, 이구아나 등 살아있는 것이 가득한 이 세상을 끝내지 않고 더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윤설의 이미지는 시 속의 타자들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들며, 시인의 〔떠남:지킴〕에 대한 불안한 내적 심리를 리듬을 통해 선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시를 읽고, 시인이 이 지구를 떠나거나, 이 지구를 떠나지 않는 게 아무 상관없는 문제임을 알게 된다. 그는 오로지 이미지의 편집과 연출을 통해 세상의 나타남과 사라짐에 대해 슬프고 명랑한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그가 보여준 시의 이미지는 여러 마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역설과 초월과 실재와 고통의 미학적 조화임을. 그래서 이윤설 시인의 “다시 오고 싶지는 않다”(「시인의 말」)는 말은 ‘다시 꼭 올 것이다’라는 말임을 믿고 있다. 그의 이메일 주소와 이름에는 snow가 들어있다. 그의 환한 시정신을 보느라, 목이 메는 순간들을 참으며, 꾹꾹 나는 쓴다.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귀한 시의 힘을 건네준 사람. 그에게 표할 존중이 이 작은 문장들밖에 없지만, 그의 시들은 절대 녹지 않는 것이며, 기꺼이 이 따뜻한 폭설을 맞이할 것이다. 그는 아직도 여기에 있다. 

 

 


이지아
2000년 《월간문학》에 희곡이, 2015년 《쿨투라》 신인상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오트 쿠튀르』가 있다.

 

* 《쿨투라》 2022년 1월호(통권 9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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