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소설과 삶: 계속되는 자아들: 카렐 차페크 『평범한 인생』
[문학 월평] 소설과 삶: 계속되는 자아들: 카렐 차페크 『평범한 인생』
  • 이지아(시인)
  • 승인 2022.03.0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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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 ⓒWikimedia Commons
카렐 차페크ⓒWikimedia Commons

우리에게 삶은 최초의 장르가 된다. 언제나 새롭고 궁금하고 예상 불가능한 것. 인간은 각자의 장르를 만들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각자의 장르들은 현실이라는 공간에 ‘모여’ 있다. 삶은 ‘나’ 하나로 완성되지 않으며, 각자의 욕망과 억압이 모여 부러지고 터지고 폭발하고 발현되며, 꿈이 되거나 재앙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삶은 이 세계를 가장 뜨겁게 함께 이룬다. 울고 웃고 고통과 고양을 기르게 하는 것. 소설은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삶을 끝내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에게 어떤 의식과 의미가 될까. 소설은 왜 인간의 이야기를 멈추지 못하며, 삶이라는 장르를 계속 탐닉하는 것일까.

카렐 차페크는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더불어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철학을 전공하고 극작가, 소설가, 비평가 등으로 활약했으며, 1920년에 발표된 희곡 『R.U.R. (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로봇’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작가로 유명하다. 소설 『평범한 인생』은 1934년 발표되었으며, 『호르두발』, 『별똥별』과 함께 차페크의 ‘철학 3부작’ 소설 중 마지막 명작이다.

이 소설은,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매우 색다르고 흥미롭다. 작가는 인간의 삶이란 결코 겉으로 보이는 평범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경고한다. 이 소설은 처음과 끝에서 의사, 노신사 주연의 목소리가 연결되고, 중간은 자서전 속 이야기로 이루어진 액자 형태의 소설이다. 자서전은 34개의 장으로 나뉘는데 7장까지 어린 시절을 다루며, 8장은 학창시절, 9장은 대학생, 19장까지는 직업생활과 아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장부터 다른 자아들이 조금씩 등장하고 33, 34장에서는 자아들의 개성과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아들의 성공을 바랐던 소목장이 아버지, 형의 죽음으로 자신에게 의지한 어머니, 불우한 누더기 차림의 소녀와의 만남. 학교에 들어가면서 알게 된 자신의 역할과 지위(학업성취)를 통해 주인공은 권력의 힘을 알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 당시 체코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고전이 끝나고, 산업혁명이 끝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지나간 시대는 허무와 고통의 시간이었다. 인간 존중의 낭만주의는 언제나 세계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고 불화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내면과 행동들은 그 시대를 통과한 것들이었으며, 유년 시절 이후 성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방황과 도전도 없이 뭔가 위축되고 타인이 원하는 기준에 맞추어 산 세월이었음을 회의한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부터 그 평범한 인생에 감춰져 있던 욕망과 억압의 세계가 하나씩 드러난다. 어렸을 적 사랑의 감정을 나누던 소녀와의 추억은 비밀스런 기억이었고,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때론 아내를 역겨워했으며, 성공을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는 것…. 주인공은 심장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삶을 고백하며 겉으로 드러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찾는다. 화자는 그런 모습의 발견에 환멸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즉 인간의 내면은 하나의 자아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다양한 얼굴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자아들은 화려한 퍼레이드를 시작한다.

우리 각자가 어떤 다른 가능성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이다. 네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건 내 속에서도 있는 거야. 내가 너를 미워하더라도 난 네가 나의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나는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리라. 그의 멍에를 느끼고 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에게 닥친 부당함에 대해 함께 괴로워하리라. 내가 그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나는 더 많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본문 239쪽

주인공은 부모님의 요구와 사회적 기준에 맞는 인물이 되려고 스스로를 억압했다. 하지만 외부 환경의 작은 일탈에 대한 흥분과 호기심을 느꼈던 자신을 떠올리고, 죄책감을 갖던 기억, 부끄럽고 우울한 자신을 지나쳤던 경험, 혹은 더 꽁꽁 숨겨 두었던 자신의 목소리들을 끄집어낸다. 이 자아들의 대화와 불화는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다채롭게 짜여져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세 번째 인물이 있는 거군. 나의 내면 깊숙이에 있는 호전적인 목소리가 말한다. 세 번째 인물이라니? 음, 첫 번째는 행복한 사람이고 두 번째는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이고, 이 우울증 환자가 세 번째 인물이지, 그것은 세 개의 삶이고, 서로 다른 존재들”(159쪽)이며 그 외에도 시인, 악인, 영웅, 거지 등 8개의 자아가 나오지만 더 다른 자아들이 무한히 존재하고 있음을 소설 속에서 보여준다.

나의 내면에는 내가 알고 있던 객체들이 있었다. 이것은 아버지이고 또한 느낄 수 있는 객체들 중에서 이것은 어머니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 안에서 다시금 내가 거의 알지 못했던 그들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대단한 괴짜이자 여자와 친구들이 주위에 가득했던 할아버지 한 사람과, 그의 아내였던 경건한 할머니 한 사람뿐이었다. 어쩌면 그들도 어떤 모습으로든 내 안에 존재하고 있고, 내 자아들 중 누군가가 그들의 모습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다양성이라는 것이 세대를 거쳐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우리의 선조들일 수 있다.
- 본문 221쪽

위의 예문에서 자신의 자아들은 타인의 자아를 발견하는 것까지 확대되고 이어진다. 세상을 떠난 부모와 조부모까지 등장하면서 자신의 삶에 있을 수 있었던 어떤 가능성과 상상의 자아들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이 타인과의 내면 대화를 통해, 자신의 어떤 모습이 타인들의 어떤 모습과 이어져 있음을 공감하게 된다. 이러한 자아들의 대화들은 무의식의 층위에서 개인의 욕망이 발현되고 해소될 수 있는 시공간(라캉)이 된다. 현실에서 억압되고 허용되지 못한 욕망들은 비현실적인 자아들의 대립과 대화에서 실제가 되는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쓰기 방식은, 다양한 자아의 발견과 문제를 드러내고, 심층적 삶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인간성의 진실을 회복하며, 인간의 삶을 긍정하길 원한 것이다. 아울러 차페크의 문학적 세계관에서 소설 창작이라는 행위는, 다양한 자아들의 이해와 칸트가 말한 주체의 종합적 역할과 의미에 닿아 있음을 예견하고 있다.(『문학적 절대』, 그린비, 56~58쪽.)

결국 카렐 차페크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의 삶을 더욱 창조적 차원으로 옮겨놓길 염원한 것이다. 이 소설은 다른 작품들의 소재인 현대 문명 비판이나 공상과학의 영역과는 달리, 인간의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소설이란, 세계의 진리와 진실에 다가가는 예술의 경지를 만드는 것이다. “아주 평범한 삶”은 평범하지 않은 일상의 순간들을 미적 가치로 만들며, 사회가 만든 판단과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수많은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게 만든다.

 

 


이지아
2000년 《월간문학》에 희곡이, 2015년 《쿨투라》 신인상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오트 쿠튀르』가 있고 제4회 박상륭상을 수상했다

 

* 《쿨투라》 2022년 3월호(통권 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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