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일상이 예술이 된 미술관: 서울 대림미술관 & 디뮤지엄
[미술관 탐방] 일상이 예술이 된 미술관: 서울 대림미술관 & 디뮤지엄
  • 김명해(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2.08.02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서 깊은 경복궁과 인접한 통의동 오래된 주택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대림미술관은 (재)대림문화재단이 2002년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전문 미술관이다. 미술관 자체도 하나의 독특한 건축물로서 도시의 풍경을 다채롭게 만드는 역할을 하듯, 대림미술관 역시 기존 주택의 형태를 유지한 채 미술관으로 리노베이션한 건물이라 독특하다.

높이가 다른 층고와 크기가 다른 방을 갖고 있던 기존 주택의 구조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 외에는 외관상 큰 변화를 주지 않아 오히려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고 독특한 공간들이 많이 생겨 재미있고 관심이 쏠리는 미술관이다. 또한 전망 좋은 곳에 홀연히 위치한 대형 미술관과 달리 사람들이 많이 생활하는 주택가에 함께 자리하여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이라는 대림미술관의 개념과 일치하여 편안하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대림문화재단은 대림미술관에서 선보여온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를 더 확장된 공간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수준 높은 감성으로 제시하고자 2015년 용산구 한남동에 ‘디뮤지엄D-MUSEUM’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다시 2021년 성동구 성수동 서울숲 인근으로 이전하여 사진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드는 감각적인 전시를 소개하며 그 경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으며, 일상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전시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통의동 대림미술관을 먼저 방문하고 싶었지만 현재 ‘전시준비 중’이라 다음 기회로 미루고, 20세기 순정만화와 감성사진을 전시한다는 내용에 이끌려 설레는 마음으로 성수동 서울숲 디뮤지엄을 찾았다.

디뮤지엄은 유리외관의 4층 건물로 1층은 티켓박스와 뮤지엄샾, 2-3층이 전시장, 4층은 공연장으로 구성되어있다. 현재 진행 중인 《어쨌든, 사랑: Romantic Days》전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화와 친근하고 탄탄한 스토리텔링으로 80-90년대 수많은 독자들을 열광시켰던 한국대표 순정만화가-천계영, 이은혜, 이빈, 이미라, 원수연, 박은아, 신일숙- 7인의 대표작 일곱편의 만화를 모티브로 로맨스와 사랑의 다양한 순간과 감정들을 공감각적으로 선보이는 전시다. 또한 K-콘텐츠를 대표하는 순정만화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80-90년대 출생의 젊은 아티스트들의 사진, 그림, 영상, 일러스트, 설치, 사운드, 미디어작품도 함께 전시하여 우리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섬세하게 자극한다. 사적이고 감각적인 작품들을 극적인 공간에 펼쳐내 관객 각자에게 다채로운 사랑의 순간들과 서로 다른 설렘의 찰나를 마주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Romantic Days, Section1

지하철 수인분당선을 이용하여 서울숲역에 하차하면, 4번 출구와 바로 연결된 미술관은 입구부터가 범상치 않다. 양쪽 벽면이 핑크하트와 하트맨 그림들로 현전시의 분위기를 예고해주고, “당신은 지금 어떤 로맨스의 순간에 있나요?”라는 문구가 필자의 머릿속을 마구 회전시킨다. ‘로맨스가 뭐였지? 잊은 지 오래전이라…’ 헛웃음만 나온다. 하지만 전시실로 들어선 순간, 잊고 있었던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휘어진 동선을 따라 첫 번째 방으로 들어서면, 천계영 작가의 〈언플러그드 보이〉를 마주하게 된다. 평범한 여고생 지율과 순수한 소년 현겸의 미묘한 감정선을 통해 사랑의 시작을 깨닫는 순간의 떨림을 대형스크린에 영상으로 재탄생 시켜놓아 벌써부터 심장이 쿵쿵거린다. 또 어린 시절의 풋풋한 장면들을 유쾌한 감성으로 기록하는 지미 마블Jimmy Marble(미국)의 〈from Way Out〉(2017), 〈from Midsummer〉(2017) 시리즈와 자유로운 포즈와 빈티지한 색감으로 신비로운 노스탤지어를 담는 루카스 와이어 보이키Lukasz Wierz bowski(폴란드)의 사진들이 사랑인지도 모르고 서툴고 수줍었던 그 때의 특별한 마음이 시작되는 그 순간을 소환시키고 있다. 노랑 파스텔톤 바탕에 전시된 이 사진속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밝고 상큼하고, 시작되는 사랑의 감정을 포착한 듯 자연스런 표정조차 사랑스럽다.

Anna and Magda, Lubliniec, 2014 ⓒLukas Wierzbowski
Alea dream, Topanga, 2019 ⓒTristan Hollingsworth

두 번째 방은 청춘들의 가슴 아픈 사랑과 방황을 감성적으로 그려낸 이은혜 작가의 〈블루〉가 뉴미디어 아트그룹 아이엠파인IMFINE(한국)의 영상작업이 어우러진 푸른 심연의 공간에서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는 세 인물(해준, 연우, 승표)의 엇갈린 사랑을 몽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곡선의 벽을 따라 이어지는 독특한 색조로 평범한 순간을 초현실적으로 담아내는 트리스탄 홀링스워스Tristan Hollingsworth(미국)의 사진작품과 깊은 고독 속에서 스스로 치유해 나가는 마가렛 더로우Margaret Durow(미국)의 서정적인 사진작품들은 공간 속에 더해진 짙은 푸른색과 더불어 그리움에 빠져 잠들지 못했던 그 밤을 연상케 한다.

세 번째 방은 이빈 작가의 〈크레이지 러브 스토리〉가 80~90년대 홍콩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운 사랑의 무드를 이끌며 뜨겁게 열병을 앓던 시절로 안내한다. 뜨겁게 사랑하는 청춘들의 사적이고 은밀한 순간을 가감 없이 기록한 채드 무어Chad Moore(미국), 끝없는 자유와 사랑을 모험한 순간들을 포착한 테오 고슬린Theo Gosselin(프랑스), 불꽃같은 사랑과 욕망 후 남은 잔상을 담은 막달레나 워싱카Magdalena Wosinska(폴란드)의 사진작품들은 열렬히 사랑했던 광란의 열기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편견 없는 사랑을 지지하며 내면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사라 맥스웰Sarah Maxwell(미국)의 일러스트레이션은 거울과 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공간 안에서 응집된 감정을 폭발시켜, 에밀리 플뢰게와의 진정한 사랑을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오스트리아, 1862-1918)의 대표작 〈키스〉가 짧은 순간 떠오르는 설치 작품이다.

네 번째 방은 이미라 작가의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주인공 서지원이 가로등 불빛아래 고독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장면을 시작으로, 방이 아닌 밖이 보이는 통유리 복도로 이어지는 전시이다. 한국적 정서에 친숙한 소재나 배경으로 익숙한 듯 편안한 스토리 전개의 〈인어공주를 위하여〉는 1990년에 히트 친 청춘드라마 같은 순정만화로, 필자도 열심히 읽은 기억이 난다. 외모와 연결되는 등장인물의 독특한 이름(이슬비, 서지원, 백장미, 푸르매)도 반갑다. 긴 복도를 따라 가슴 미어지는 로맨스의 흔적이 깃든 연인의 애틋한 감정이 묻어나는 흑백사진을 천천히 감상하며 지나면, 양지윤Yang Jiyoon(한국) 작가가 한지로 직접 만든 오브제와 비단천의 은은함과 부드러운 선의 특징을 살린 설치작품이 빛과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아름다운 그림자와 율동을 만들어내어 관람객들에게 아련한 사랑의 기억으로 스며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다섯 번째 방은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꿈결 같던 그 시간 속의 낭만적인 순간들을 신비로운 6개의 아치로 구성된 각 구역에서 보여준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그림과 톡톡 튀는 스토리의 순정만화 〈풀하우스〉는 원수연 작가의 대표작으로 2004년 TV드라마로 방영되어 본적이 있다. 특히 니나 콜치츠카이아Nina Kolchitskaia(러시아)는 ‘마음의 손’이라 여기는 왼손으로 작업하는 작가로, 왼손으로 어설프게 선을 그려 수채물감으로 점차 선명하게 처리한 〈Left Hand Lovers〉 시리즈는 작업의 흐름을 사랑의 과정으로 비유하여 낭만적이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Romantic Days, Section4<br>
Romantic Days, Section4

여섯 번째 방은 투명한 수채화 같은 그림과 잔잔하지만 흡입력 있는 스토리로 사랑받은 박은아 작가의 〈다정다감〉이 미디어로 전시되어, 평범하지만 소중한 추억으로 빛나던 그 시절을 보여준다. 스크린 맞은편에서는 학창시절의 익살스러운 일상을 솔직하게 포착한 사진작가 니코 비 영Nico B. Young(미국)의 〈HIGH SCHOOL〉(2017) 시리즈를 통해 우리의 해맑고 풋풋했던 학창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이어지는 벽에는 포토·비디오그래퍼 헨리 오 헤드Henry O.Head(미국)가 히치하이크로 세계각지를 여행하며 만난 사람과 풍경을 담은 작품들이 펼쳐진다. 그는 서로 다른 두 장면을 한 장의 필름에 중첩시키는 이중노출Double Exposures 방식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해 신선함과 신기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또한 젊은 날의 자유와 설렘을 담은 파올로 라엘리Paolo Raeli(이탈리아)의 사진작품과 글귀는 다시 못 올 청춘의 한 구절을 영원의 순간으로 간직하게 한다.

Honeymoon road, Palermo, 2018 ⓒPaolo Raeli

“삶은 기억으로 존재하는 거야.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말하곤 해. 이 순간을 사랑했지, 이순간도 사랑했지, 정말 미친 듯이 사랑했지… 언젠가는 내게 중요했던 것들이 사라질 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들을 함께 보낸 거야.”
- 파올로 라엘리

마지막 방은 궁전 안을 비추는 달빛아래 시름에 잠긴 여왕의 모습이 대형스크린에 상영되면서 전시가 이어진다. 붉은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 속 신비한 나라 아르미안의 여왕 레 마 누가 주어진 삶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랑과 운명을 주도해 나가는 스토리의 순정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다. 이 만화는 신일숙 작가의 작품으로 방대한 역사와 신화적 배경에 작가의 상상력을 밀도 있게 결합해 1986년부터 1995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연재한 장편대작이다. 또한 빛과 그림자, 색채가 만드는 선명한 대비감, 연극적인 시각 요소라 할 수 있는 미장센으로 내면의 감정을 표출하는 델피 카르모나Delfi Carmona(아르헨티나)의 작품은 모놀로그처럼 흘러가는 공간을 따라가게끔 구성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흩어진 추억의 조각들을 모아놓아 잠시 잊었던 로맨스의 설렘과 두근거림을 선물 받은 느낌이다.

순정만화! 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필자나 당시 소녀들은 이러한 순정만화나 로맨틱소설을 읽으며 공상에 빠지거나 순수 감정으로 누군가를 짝사랑하곤 했었다. 처음으로 접한 순정만화는 〈캔디〉와 〈베르사이유의 장미〉이며 마음 한구석에 심쿵과 설렘을 안겨주었던 만화였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친구들끼리 열심히 돌려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만화가 아니라 일본만화란다. 당시에는 만화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해적판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서구 대중문화의 도입과 해적판과 같은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기에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한류문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Romantic Days, Section6

80~90년대 당시 만화의 인기는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느낄 수 있었다. 만화방이 생겨 원하는 만화를 하루 종일 볼 수 있고, 비디오테이프이나 DVD 대여점과 함께 만화책을 대여해주는 곳도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만화잡지가 등장하여 잡지책 한 권 속에 여러 작가의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던 시절도 있었다. 시간은 흘러 인터넷이 생겨나고, 지면에 실리던 출판만화는 웹툰으로 바뀌고, 인기 있는 웹툰은 TV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으로 재창출되어 한류문화의 한 부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진다.

이처럼, 일상에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고 영감을 디자인하는 대림미술관과 디뮤지엄은 매번 전시 때마다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쉽고 재미있는 전시기획으로 미술관 문턱을 낮추고, 세련된 공간 배치와 사진촬영허용으로 인한 SNS 인증 확산으로 많은 관람객들이 미술관을 방문하고, 전시뿐만 아니라 작가토크, 공연, 아트마켓, 체험활동 등 복합문화예술센터로의 입지를 굳혀 ‘가보고 싶은 미술관, 볼 것이 많아 다음 전시가 기대되는 미술관’으로 입소문이 나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 실현을 위한 대림미술관의 노력은 계속 될 것이며, 새로운 전시 경험으로 예술적 가치를 선사하는 디뮤지엄도 다음 전시를 기대하면서 열렬히 응원한다.

 

 


참고자료
(재)대림문화재단 https://daelimmuseum.org/

 

* 《쿨투라》 2022년 8월호(통권 98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