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애도의 방: 사진과 사랑과 상실에 대하여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애도의 방: 사진과 사랑과 상실에 대하여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2.12.0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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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é Kertész, Paris, My Friend Ernest , gelatin silver print, 1929.
이미지 출처: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붙들 수 없으나 남겨진 것

2022년 10월은 ‘잔인한 달’로 새겨질 것이다. 10월 11일 밤, 나는 내 삶의 태산 같았던 아버지를 황망하게 여의었다. 그리고 10월 29일 밤, 국내외 많은 이들이 납득할 수 없고 납득하고 넘어가서도 안 될 이태원 참사로 인해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도 좋을 소중한 아들 딸, 형제자매, 연인, 친지, 친구, 동료를 잃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결코 원한 적 없던 ‘유족’의 자리로 떠밀려 섰다. 어쩔 수 없는 사적 비극으로 겪었든, 참혹하고 무도無道한 사회적 비극으로 겪었든, 얼마 전 나를 포함한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아연실색게 한 것은 죽음의 갑작스러움과 절대성이다. 그 앞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사실이 서럽다. 또한 유족이 돼 겪는 상실의 고통과 슬픔은 간접적으로는 아무리 상상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지난날 어설픈 위로와 애도를 표했던 모습이 돌아봐진다. 말하자면 유일무이한 존재가 세상을 떠난 전과 후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 통절한 마음을, 그래서 돌연 세상이 사라지고 말문이 닫히는 심정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는가? 고인을 절대로 떠나보낼 수 없음에도 사람의 능력으로는 붙들지 못해 비통한 장례를 치른 후, 그/녀 없는 세상을 홀로 살아가야 하는 ‘나’를 어떻게 할 것 인가? 그렇게 살아있던 생명을 붙드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그 존재의 흔적을 간직하고 부재 속의 사랑을 지속해나갈 방법은 있는가?

어린 롤랑 바르트와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 1923년 경.

롤랑 바르트와 ‘마망’

국내에서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로 번역된 ‘라 숑브르 클레어La Chambre claire’, 또는 영어로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독창적인 문체의 평론가였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1980년 발표한 사진론이다. 현대 사진 미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으로 빈번히 인용된다. 나아가 시공을 초월해 다양한 세대와 성향의 독자가 애호하는 고전이다. 그런 배경에는 저자가 그 책을 쓴/쓸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 의도, 숨겨진 이미지가 있다. 요컨대 바르트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철학적이고 기호학적인 담론을 전개해가면서 그 안에 1977년 사별한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Henriette Binger의 부재에 저항하는 자신만의 비밀스런 애도를 직조해 넣었다. 또는 이렇게 말 할 수도 있다. 그 저작에는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이란 ‘존재 증명이자 부재 증명’임을 정의하면서 언급한 타인의 사진들이 —가령 그가 “끈 달린 펌프스”에 마음이 찔리는 제임스 반 데어 지James Van der Zee의 〈가족 초상Family Portrait〉, “여전히 살아있을까?”를 묻는 앙드레 케르테츠André Kertész의 〈에르네스트Ernest〉— 수록돼 있다.1 하지만 바르트는 정작 글 전체를 이끄는 아리아드네의 실과도 같은 어머니의 한 사진을 어디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사진의 범속함과 삶/죽음의 재현 불가능성을 동시에 짚었다. ‘겨울정원’이라 불리던 유리온실에 서서 7살 오빠와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5살의 앙리에트, 바르트의 마망.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사진 속의 어린 소녀는 바르트가 없는(아직 태어나지 않은, 또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시공간 속에서 확실히 존재했음을 사진으로 증명한다. 그렇기에 바르트는 거기서 어머니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존재와 부재의 이미지를 비밀의 열쇠로 삼아 사진의 본질이라는 학술적 과업과 자신만의 어머니를 기리는 사적 소망을 상호 텍스트화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나, 2022. 사진: 장금형

아버지의 사진

앞서 죽음 앞에 무력한 우리 인간이 세상을 떠난 이의 흔적을 간직하고 부재 속의 사랑을 이어갈 방법이 뭐냐고 물었을 때, 사실 내 머릿속은 한 장의 사진이미지와 바르트식 글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를테면 나 또한 바르트처럼 애도의 글을 씀으로써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를, 그 유일무이한 존재를, 그 사랑의 주체이자 대상을 붙잡고 싶었다. 지난 봄 한없이 순진한 마음으로, 조금의 걱정 근심도 없이 아버지와 함께 서울시립미술관의 《권진규 전》을 보러 갔다가 찍은 사진이 심장에 각인돼 있다. 다시 생각해도 조금 기이한 우연이다 싶은 것은 그 사진을 대학 졸업 후 수십 년 동안 거의 만난 적이 없는 동창이 찍어줬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나는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잠깐 봄 햇살을 받으며 미술관 건물 앞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어색해하는데도 셀카를 몇 장 찍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떤 여성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나섰다. 그녀의 목에 걸린 DSLR 카메라가 빛났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랬더니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미대를 졸업한 후 결혼해서 사느라 바빴다가 최근에는 사진작업에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딸의 동창이 든 카메라 쪽으로 기꺼이 몸을 돌려 당신의 모습을 찍게 해주었다.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눈빛으로는 약간의 행복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그 순간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아버지가 당신의 영정 사진을 준비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시는 생각만으로도 슬퍼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때 그녀가 찍어준 아버지의 모습이 여섯 달 후 고인의 영정에 올린 사진이 되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맑고 선명한 눈. 엷게 미소 짓기에 갈매기 날개처럼 펴진 입술. 자주 쓰시던 파란색 모자 아래로 보이는 백발과 새로 사드린 푸른색 셔츠가 잘 맞는 단단한 풍채.

90세를 미처 채우지 못하고 급성심근경색으로 영면하셨지만 고인은 일평생 멋지고 강인했다. 특히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올바르고 충실했다. 물론 이렇게 말할 때 내 아버지의 삶은 곧 가족을 의미한다. 자식 중 막내이자 하나뿐인 딸을 “보물”이라고 아끼셨으며, 마르고 닳도록 성장의 동력이 되어 주셨다. 지금까지 내가 스스로의 관점에서, 자신의 사고와 언어로 설 수 있었던 힘의 근간이 바로 나의 아버지다. 때문에 서울시립미술관 전경에 앉은 아버지의 사진은 내게 갑자기 세계를 빼앗긴 것 같은 아픔을 준다. 동시에 그 사진이 있기에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고 이후의 삶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마음먹게 한다.

James Van der Zee, Family Portrait , gelatin silver print, 1926.

애도의 방

바르트는 마망의 ‘겨울정원 사진’이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독자들에게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일반적 이미지(스투디움studium)에 불과하기에 보여줄 수 없다고 썼다. 아마 그 사진이 바르트 자신에게는 심장으로 날아드는 섬광, 홀연한 깨달음을 유발하는 내적 동요, 본질을 관통하는 이미지(푼크툼punctum)이기에 결코 상투적 시선들 앞에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이다. 수십 년 전 『카메라 루시다』를 읽고 ‘아름다운 사유가 논리를 만든다’며 심미적 태도를 방법론 삼았던 학생은 미술 비평가가 되고 미학 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부친을 여읜 중년의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이의 부재와 상실이 어떻게 이미지를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지 뼈저리게 지각한다. 더이상 생生을 같이 할 수 없는 고인을 마음에 품은 사람에게 사진은 기술적이고 물리적인 조건을 부각시킨 ‘어두운 방camera obscura’이 아니다. 그렇다고 바르트의 ‘밝은 방’도 아니다. 그 의미는 온전히 바르트와 앙리에트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게 사진은 ‘애도의 방’이다. 죽은 이의 부재를 받아들이되 결코 사라지게는 하지 않을 유일한 이미지의 처소로써. 아직까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편안하게 볼 수 없다. 상실의 슬픔이 파도처럼 재생되며 가슴을 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 사진이 애도의 방으로서 내게 지붕이 되어주고 벽과 바닥을 내어줄 것이다.

 

1  Roland Barthes,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trans. Richard Howard, London: Vintage Books, 2000, pp. 44-45, 83-84.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2년 12월호(통권 10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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