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다시 살다: 구본창의 사진을 통한 순환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다시 살다: 구본창의 사진을 통한 순환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4.01.3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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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의 회고전

서울시립미술관이 개최한 《구본창의 항해》(2023. 12. 14. - 2024. 03. 10.)는 한국 현대미술 중에서 특히 사진 분야의 개척자로서 고희를 넘긴 원로작가 구본창(1953- )의 대규모 회고전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국내 첫 사진 중심 공공미술관” 건립을 위해 지난 2021년 11월 도봉구에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착공에 들어갔고 2024년 연내 개관을 앞두고 있다. 그렇기에 서소문 본관에서 열린 구본창의 회고전은 한국 사진계에서 그가 점유하는 위상과 예술적 성과를 선제적으로 조명한 기획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구본창이 작업한 사진작품은 물론 그가 수십 년간 사진과 연관해 국내외에서 펼친 다양한 활동 자료를 한 전시에 종합한 전시 구성 방식도 같은 맥락에 있다. 즉 《구본창의 항해》는 이 원로작가가 한국 현대사진의 형성과 전개에 기여한 실체적 내용과 그의 사진들이 만들어낸 고유한 미학을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관점에서 두 축을 하나의 전시 속에 성좌 배치한constellation 것이다.

《구본창의 항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구본창은 체계적인 성향이 강하고 기록에 능하며 물리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완벽한 질서를 추구해온 전문가다. 그는 자신이 40여 년간 총 50여 개 사진 시리즈를 제작했다고 추산한다. 미술관 측은 그 방대한 연작들의 스펙트럼에서 43개를 선별해 이번 회고전의 전시작 구조를 짰다. 세부적으로는 43개 시리즈 중에서 총 500여 작품을 추렸고, 여기에 600여 개의 작가 자료 및 수집품을 합쳐서 기승전결이 있는 총체적 전시로 구현했다. 그렇게해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1층과 2층 전시장들이 한 사진가의 삶과 창작 항해를 회고하는 다섯 개의 장으로 탈바꿈됐다. ‘호기심의 방, 모험의 여정, 하나의 세계, 영혼의 사원, 열린 방’ 순으로 집대성된 것이다.

구체적인 기획은 미술관 학예팀이 구본창의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작품과 자료를 시기별로 정리한 연보를 만든 데서 출발했다. 그리고 전시는 그 연보에 근거해 작가의 수십 년간 활동(수집, 사진창작, 국내외 기획 등)이 전개된 과정과 국내외 사진계의 주요 변화를 한편으로는 병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교차시켜 전시장에 펼쳐 보이는 데 초점을 둔 것 같다. 때문에 감상자는 전시 초입부터 차근차근 한 사진가가 걸어온 삶과 작업의 여정을 한국 사진계의 변곡점들, 그리고 대내외 사진 패러다임의 이행과 겹쳐 가면서 천천히 따라가 볼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구본창의 항해》가 작가의 연대기나 현대사진의 짧은 역사를 지루하게 보고하는 전시는 아니다. 오히려 감상자는 이 회고전에서 ‘사진’ 또는 ‘미술’이라는 범주를 강박적으로 인지하는 대신 ‘사물’과 ‘이미지’에 대해 시각적으로 즐기는 등 다양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는 기획에서 대략 두 가지 테크닉이 발휘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나는 구본창이 십대였던 1960년대부터 수집해 온 수십 가지 사물, 인쇄물, 자료와 그의 개인사적 이미지들을 전시 초입에 배치한 점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중 하나가 오래되고 진귀한 물건 구경이 아닌가. 게다가 낡은 미국 잡지(《TIME》, 《LIFE》), LP판, 영화관 표, 바짝 마른 비누들처럼 어쩐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레트로 오브제가 정갈한 질서 속에 대량으로 전시되어 있다면? 거장 작가의 풋풋했던 소년시절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이 은연중에 멜랑콜리한 인생서사를 떠올리게 한다면? 두말할 나위 없지 않은가. 관람객은 이렇듯 전시기획의 묘가 발휘된 공간에서 어린 시절 구본창의 내밀한 호기심이 오늘의 그를 만든 정황뿐만 아니라 감상자 자신의 감각 지각이 자극 받는 순간을 맞이한다.

《구본창의 항해》 중 〈호기심의 방〉,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구본창

기획 테크닉의 다른 하나는 구본창이 1980년대 초 독일 유학시절 실험하고 귀국 후 국내에서 이어 작업해온 스냅사진 연작, 즉 일상의 스쳐가는 순간을 즉흥적으로 포착한 〈익명자〉 시리즈를 전시 종결로 제시한 점이다. 나는 그의 수많은 사진 연작을 관통하는 정신구조mentality로서 덧없음과 기록, 소멸과 잔존, 현존의 한계를 인정하는 마음과 이상적 아름다움에 대한 지속적 실천이 양가적으로 작동하는 점을 꼽는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초기 연작인 〈익명자〉는 구본창의 사진의식이 싹트고 여태 개화해온 뿌리에 속할 것이다. 따라서 전시가 〈익명자〉를 통해 구본창의 40여 년 작업 시간을 선형적으로 분할하는 대신 순환 구조로 잇댄 데는 그 같은 함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자신의 꼬리를 무는 뱀의 형상이 영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처음과 끝이 맞닿아 순환하는 구조로서 한 작가의 기원과 열린 결말을 뜻한다고 말이다. 《구본창의 항해》는 이렇듯 작가의 초기작이자 최근작을 전시 마지막 장에 위치시킴으로써 그의 예술 행로가 닫힌 끝이 아니라 큰 틀에서는 같지만 세부적으로는 다르게 시작한다는 전언을 내비쳤다. 그리고 이는 한 작가의 취향과 미학이 배태된 배경으로 감상자를 이끌고, 나아가 그 이미지가 과거로 사라지지 않고 동시대로 재배치되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평가할 만하다.

구본창, 〈익명자 71〉, 2019,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5x19cm.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구본창

생각, 생명, 그리고 사진

거기까지 나는 전시 기획에 초점을 맞춰 《구본창의 항해》에서 주목할 감상 포인트를 논했다. 그러나 구본창의 작업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가 그의 작품들을 그저 즐길 거리나 값비싼 현대미술품으로 간주할 수 없는 묵직한 계기를 발견한다. 구본창의 사진미학이 큰 전환을 맞이한 결정적 순간이 있었고, 그것이 그의 사진들을 시각적 대상이나 포토제닉 이미지에 그치지 않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순간이란 아버지의 죽음이다. 《구본창의 항해》 중 세 번째 장인 ‘하나의 세계’는 구본창의 사진이 형식적인 실험과 초현실주의적 미감으로부터 내면적인 분위기와 성찰적 내용으로 옮겨간 분기점을 다룬다. 그 계기가 바로 1996년 7월 작가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일이다. 구본창은 1990년대 〈태초에〉와 〈굿바이 파라다이스〉 시리즈로 현대사진의 실험적 형식 및 전위적 경향성을 선취한 작가 반열에 올랐다. 특히 〈태초에〉는 구본창이 1987년 김승근 현대무용가의 리플릿 사진을 찍은 일을 계기로 강인한 남성 누드를 흑백으로, 게다가 의도적으로 조각 천에 인화하고 그것을 바느질해서 다시 하나로 합치는 전위적 형식의 사진연작이다. 당시는 사진의 객관적 기록성을 중히 여기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고, 또한 미술계의 조형언어를 사진에 적용하기에는 사진과 현대미술의 간극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구본창은 스트레이트포토를 벗어난 새로운 장르로서 ‘연출사진making photo’을 제시하며 한국 사진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또 자신을 비롯해 다른 작가들을 초대해 기획한 《사진, 새시좌》(워커힐미술관, 1988)전은 한국 현대사진의 전환점으로서 현재도 회자된다. 이렇듯 1990년대 내내 구본창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한국 사진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즈음 맞닥뜨린 아버지의 죽음은 앞서 어머니를 여윈 상처와 더불어 작가로 하여금 사진에서 조형적 이미지의 제시를 넘어선 성찰에 빠져들게 했다. 요컨대 부모의 부재,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라는 절대적 경험이 그를 생명과 유한성, 삶과 순환을 주제로 한 사진에 천착하도록 이끌었다.

구본창, 〈태초에〉 연작, 1991~1998, 젤라틴 실버 프린트,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사진: 강수미 ⓒ구본창

그때 제작한 연작이 〈숨〉(1995)이다. 당시 불혹에 접어든 아들 구본창은 투병 중인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그의 육신에서 수분과 근육이 빠져나가고 종국에는 쇠약하게 몰아쉰 한 자락의 숨으로 귀결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래서 〈숨〉 연작은 우리에게 어떤 이의 형상을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비극성과 슬픔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또는 가쁜 숨에 우리의 가슴조차 먹먹해지게 한다. 물론 구본창의 50여 개 사진 시리즈 중에는 단적으로 말해 부박하고 익명적인 대상들이 강렬한 구도와 색채로 재현돼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 경우가 없지 않다. 오래되고 귀중한 대상(조선백자, 천마총 금관, 전통 탈, 굿당 장식용 지화)을 완벽한 심미주의에 입각해 찍은 연작도 꽤 많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구본창의 사진들은 진중하고 구체적이며, 조형적 아름다움 너머 철학적 생각과 의미심장한 해석으로 이끄는 힘을 지녔다. 그 힘은 생각하는 인간의 역사와 인간을 닮은 이미지의 역사가 만나는 기원에서부터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난제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요컨대 인간 자신의 죽음/필멸과 그에 관한 자기인식, 그리고 이미지를 통한 상징적 저항과 극복이 그것이다.

 

구본창, 〈지화 02〉, 2008,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76x35cm.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구본창

사진을 통한 순환

진화론적으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수십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에서 분화된 인간 종을 지칭한다. 18세기 스페인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e(1707-1778)가 라틴어로 ‘지혜로운 사람’ 또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아 부여한 이름인데, 현존 인류 또한 포함된다. 요컨대 호모 사피엔스는 사고력이 있으며 기술을 발명하고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을 지녔다. 또 언어를 사용하고 상징을 구사할 수 있으며 자기의식과 성찰능력이 있다. 그렇기에 호모 사피엔스는 또한 스스로의 한계, 죽음, 자연의 강압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극복할 방법을 탐색해왔다. 이러한 인류의 역량과 절대적 한계 조건은 이미지의 역사와도 연결되는 사안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출현한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와 작은 조각에서부터 지금의 디지털 사진영상 및 인공지능의 생성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해왔다. 그 이미지가 자신에 대한 것이든 타자에 대한 것이든, 자신을 위한 것이든 타자를 위한 것이든, 자신이 만든 것이든 다른 매체를 통해 제작된 것이든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생명이 있고 물질적 형체가 있으며 자아와 세상에 대한 생각이 있는 인간, 그러나 자신이 필멸의 존재임을 깨달은 후 인간은 언제나 이미지를 원해 왔고 만들어 써왔다고. 프랑스 미학자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을 본 그 어느 날, ‘만드는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이 된 자신을 보게”1 되면서 미적이고 정신적인 이미지의 세계를 축성해오고 있는 것이다.

구본창의 사진에서 우리가 가치 높게 새길 미학적 의의, 특히 사진 분야에서의 혁신적 기여와 한국 현대미술로서의 매체적 성과는 축소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사진이 인류의 현존과 필멸이라는 거시적이고 통시적인 화두를 초점으로 논해진다면 그 의의는 더 값질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고대 원시 인류부터 지금의 우리까지를 관통하는 예술의 목적에는 생명에 대한 긍정과 죽음에 대한 저항이 내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구본창의 사진은 사라지는 존재를 이미지로 다시 살아가게 하는 순환의 업과 같다. 구본창이 2008년부터 작업하고 있는 〈지화紙花〉 연작은 그런 의미에서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전시의 네 번째 장인 ‘영혼의 사원’에 소개된 〈지화〉 사진은 불교나 무속신앙에서 사용해온 종이꽃을 촬영한 작품이다. 국가 무형유산 동해안별신굿의 보유자 김석출金石出(1922-2005), 김용택金用澤(1947-2018) 등 여러 장인이 제작했고 현재 김태연 궁중상화연구소 소장품인 그 꽃들의 의미 중에는 ‘다부사리’, 즉 ‘다시 산다’는 뜻이 있다. 일종의 액막이 꽃이라는데, 굿판이 끝나면 정성스럽게 만든 그 종이꽃을 태움으로써 아마도 죽은 원혼을 달래는 동시에 살아있는 자들의 안위를 빌었을 것이다. 나는 구본창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지화를 알게 되고, 그것을 사진으로 남김으로써 그러한 제의적 목적과 방식에 함께 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구본창은 사진을 통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다양한 존재의 순환에 동참해 오고 있다.

 

 


1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 옮김, 글항아리, 2011, p. 36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 평론,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사회봉사센터 센터장, 한국미학예술학회 기획 이사 및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4년 2월호(통권 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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