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파토스의 운동: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WE'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파토스의 운동: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WE'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3.03.0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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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치오 카텔란 프로필, 배경작품 〈아버지〉(2021)
리움미술관 제공 photo by studioj_kim_je_won

우리

당신에게 다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히틀러, 노숙자, 좀도둑, 비리 경찰을 거리낌 없이 ‘우리’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당신과 한통속으로 말이다. 불시에 양철북을 쳐대는 소년, 높은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린 말, 비명횡사한 듯 길바닥에 방치된 시신, 조울증으로 냉장고에 꽉 들어앉은 여인은 어떤가? 이러한 존재들 또한 ‘우리’로 간주하는 데 동의하는가? 말과 현실은 달라서 여기서는 ‘예’라고 답변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그들’을 ‘당신’과 함께 ‘우리’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1 평범(하다고 믿는)한 우리 중 누가 유대인 집단학살의 주범, 집 없는 이, 범법자, 부패한 공권력과 공동체를 이루려 하겠는가. 또 어른인데 아이에, 사람인데 동물에, 살아있는데 시체에, 정상인데 신경증자에 자신을 동일시하겠는가. 정치적 올바름과 지성, 인권·동물권·식물권 등 높은 사회적 감수성과 윤리의식을 갖췄다는 이들도 막상 자기 집 앞의 홈리스, 윗집의 층간소음, 자기 동네에 들어설 장애인시설이나 쓰레기소각장, 사회적 참사의 희생제의는 ‘우리’ 밖으로 밀어내고 싶어 한다. 숨기려 해도 그것이 ‘우리’의 진짜 인간적인 모습이다. 모순덩어리고, 조화롭지 않고, 일관된 의지와 신념보다는 이익과 상황에 한없이 취약한 사회적 존재들. 무엇보다 ‘통일되고 안정된 주체’라는 허구적 이상과 그렇지 못한 현실 속 매순간의 자신 사이 괴리, 이율배반을 껴안고 어쨌든 삶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각자.

마우리치오 카텔란 《WE》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제공 photo by 김경태
마우리치오 카텔란 〈ALL〉, 카라라 대리석, 가변크기, 2007
리움미술관 제공 photo by 김경태

냉소적 존중의 방식

서두가 길었다. 그래도 독자의 이해를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글머리의 사례들은 사실 리움미술관의 2023년 첫 전시인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개인전 《WE》의 출품작들을 염두에 두고 썼다. 실제로 리움미술관 입구부터 로비, 그리고 M2 전시장 전체 층에 대규모로 펼쳐진 총 38점의 조각·설치·벽화·사진 작품 중에서 선별해 예시했다. 단순히 작품의 모티프가 된 사실들과 작품의 외형만 글로 가져와 묘사한 것이 아니다. 내가 비판적으로 던진 ‘우리’에 관한 질문은 카텔란이 《WE》를 떠받치는 인식론적 콘텍스트로 삼은 문제의식에 가깝다. 어떤 조각에는 명시적인 비판을 새기고, 어떤 설치에는 서늘한 블랙유머를 곁들여서, 어떤 사진과 벽화에는 인간이라는 한계에 붙들린 우리 존재를 향한 연민과 슬픔을 담아서 말이다. 그의 《우리》가 던지는 질문, 관객을 자극하는 비판적 통찰, 감상자에게 제공하는 미적 경험은 날카로우면서 풍부하다. 그래서 단순한 작품 해설은 맞지 않다. 나는 전시 표제인 ‘우리’가 지시하는 화두, 전시 작품들로 구현된 카텔란의 창작 의도가 미학적 가치와 더불어 사회비판적 담론가능성 면에서 폭발력을 지녔다고 본다. 사람들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 조형적으로 완벽히 마감된 작품의 이미지, 그 차가운 분위기에 얼핏 인간과 세상을 향한 카텔란의 냉소를 읽어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냉소라 해도, 작가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고 우리 아닌 그들에게 던지는 비난이나 조롱은 아니다. 그것은 너/타자의 배제 대신 우리/모두를 존중하기 위해 카텔란이 미술로 하는 객관화 방식이라 평할 수 있다.

〈아홉 번째 시간〉 1999, 실리콘 고무, 머리카락, 옷, 십자고상, 액세서리, 돌, 카펫
가변크기_Courtesy of Maurizio Catelan 사진 김경태

ALL에서 WE로

카텔란의 거의 모든 작품은 구상이다. 표현기법으로 세분하자면 극사실주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각 작품들은 시각적 쾌감만이 아니라 감성pathos과 논리logos가 상호작용하는 감상 경로를 제안한다. 카텔란의 미술은 말하자면 창작 단계에서부터 로고스를 줄기 삼아 파토스의 운동을 적극화해온 작업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유미주의에 순응하며 조형성에 집중해온 우리의 감상방식, 즉 현실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잠시 꺼두고 화이트큐브의 순수미술에 집중하는 감상법으로 보면 뭔가가 불편하다. 가령 대리석 작품 〈모두〉(2007)를 보자. 피보다 더 선연한 붉은색의 카펫 위에 대리석 특유의 우아하고 고급스런 흰빛을 발하며 바닥에 누이듯 설치된 아홉 개 조각이다. 하지만 여기서 물건을 세듯 ‘몇 개’라는 단위를 쓰는 것이 내 이성과 양심을 괴롭힌다. 사실 그 조각들은 흰색 시트만 덮인 채 미처/언제까지나 수습되지 못하고 있는 신원불상의 시신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위령기도문처럼 “세상을 떠난 모든 이”의 안식을 빌지는 못할망정 〈모두〉를 짐짝 취급 할 수 있겠는가. 헌데 〈모두〉는 고대 로마미술 이래로 최고의 조각재료로 꼽혀온 이탈리아 카라라 대리석을 깎아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모두〉의 조각기법은 바로크미술의 거장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가 〈성 테레사의 법열Ecstasy of Saint Teresa〉에서 성녀의 옷자락을 표현한 수준에 버금갈 만큼 고전적이며 과감하다. 그러니 미술관의 애호가에게 어쩌면 〈모두〉는 예술성에 기꺼이 경탄할 대상으로도 흡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모두〉는 그의 다른 작품들, 특히 불의의 죽음이나 재난에 무방비로 노출된 인간의 취약함을 표현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눈만 있는 관객은 환영하지 않을 것 같다. M2 전시장 내벽에 거대한 벽화로 전시한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의 헐벗은 발 그림 〈아버지〉(2021)부터 커다란 방을 놔두고 쥐구멍만한 구석에서 권총 자살한 것처럼 연출된 다람쥐 〈비디비도비디부〉(1996)까지. 카텔란이 건드린 ‘모두’의 죽음은 실제로는 ‘우리’의 절대적 조건으로서 존재론의 로고스와 연민과 공포의 파토스를 합작 가동시키기 때문이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He〉, 플래티넘 실리콘, 유리섬유, 머리카락, 옷, 신발, 101x41x53cm, 2001
리움미술관 제공 photo by 김경태
마우리치오 카텔란 〈Untitled〉, 플래티넘 실리콘, 에폭시 유리섬유, 스테인리스 스틸, 머리카락, 옷, 신발, 가변크기, 2001
리움미술관 제공 photo by 김경태

그와 코미디언

그와 코미디언이러한 맥락에서 리움미술관 개인전 《WE》가 카텔란의 2011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대규모 회고전 《Maurizio Cattelan: ALL》 이후로 최대 규모 전시라는 점을 특별하게 여길 수 있다. 국제 미술계에서 카텔란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탈리아 출신 독학자에다가 여러 차례 작품들로 스캔들을 일으켜 얻은 ‘농담꾼’, ‘사기꾼’, ‘협잡꾼’ 등의 별명을 훈장처럼 이용하는 영리한 작가로 통한다. 지하에서 미술관 바닥 위로 작은 구멍을 뚫어 솟아오른 모습을 한 조각설치 〈무제〉(2001)는 근본 없이 미술계로 침입한 카텔란 자신이 환상을 지우고 보는 자신의 정체성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는 30년 넘게 미술 창작자로서 뿐만 아니라 2006년 베를린비엔날레 등 국제적 전시의 기획자로, 뉴욕 ‘롱갤러리The Wrong Gallery’ 설립자로, 「토일렛페이퍼Toiletpaper」라는 도발적인 이미지잡지 출판인 등으로 다중 인격의 이력을 쌓아왔다. 카텔란은 ‘현대미술’이라는 우물 안의 순진한 ‘개념미술가’가 아니다. 나는 그가 이성적/계산적 사고로 지극한 현실성을 장착한 동시에 스캔들과 유명세를 적극 활용해서 자신의 미술을 인간 모두에 대한 상호 연민과 공감의 매개체로 제시한 성공전략을 구사해왔다고 본다. 전략이라는 표현이 거슬린다면, 파토스의 다른 뜻인 ‘열정’을 거기 대입해도 좋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카텔란의 파토스는 뜨겁기보다는 냉소적인 대상이나 정서를 취한다는 단서를 달고 싶다. 소년 같은 모습으로 어딘가를 향해 얌전히 무릎 꿇고 비는 듯한 히틀러 모습의 〈그〉(2001)를 보라. 어떻게 ‘히틀러’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나 싶지만 가까이서 보면 심술궂고 악의에 찬 〈그〉의 얼굴은 감상자의 마음을 차갑게 식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작품이 부정적 감정을 유발함으로써 습관적 사고의 결을 거스르게 한다. 덕테이프로 벽에 붙인 바나나 하나를 떡하니 현대미술품으로 아트바젤(미술시장의 최상위 포식자?)에 내놓았더니 마침 다른 미술가가 떼서 먹어치움으로써 더욱 센세이션이 된 〈코미디언〉(2019)은 어떤가.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명언을 빌려 보자면, 〈코미디언〉은 카텔란의 파토스가 내적으로는 비극적 정서를, 외적으로는 희극인의 그것을 꾀했다고 비평할 수 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BIDIBIDOBIDIBOO〉, 박제된 다람쥐, 세라믹, 목재, 페인트, 강철, 1996
Courtesy of Maurizio Catelan photo by 강수미
마우리치오 카텔란 〈BIDIBIDOBIDIBOO〉, 박제된 다람쥐, 세라믹, 목재, 페인트, 강철, 1996
Courtesy of Maurizio Catelan photo by 강수미

전위어와 운명

고대 그리스의 미학을 따라 파토스를 두 의미로 정의하자면, 우선 수사학의 차원에서 청중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하는 감동적인 연설이 있다. 다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정의한바, 비극 무대에서 죽음, 고난, 부상처럼 파멸 혹은 고통을 유발하는 요소와 행위다. 미학은 이를 바탕으로 파토스를 “비극의 고유한 쾌감”으로 설명하고, 나아가 관객이 공포, 연민, 비애 등의 감정을 환기하도록 이끄는 ‘예술적 모방의 진정한 대상’ 또는 ‘예술가의 정서’ 등으로 설명해왔다.2 이로부터 나는 파토스의 동시대적 예술 의의를 새로 추출해 해석하고 싶다. 요컨대 현대미술에서 ‘파토스적인 것’은 순진한 감각이나 자연주의적 행위가 아니라 현실을 첨예하게 이해함으로써 발휘할 수 있는 복합적 감각 지각이다. 나아가 그러한 파토스의 운동으로 창작된 사회비판적 작품에 깃든 비극적 쾌의 세계인식이다. ‘비극’은 고대 그리스에서 상연된 예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상 도처에 있다. 또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이미지(내게는 푸른색)로도 존재한다. 2014년 4.16 세월호 참사의 이미지는 대한민국 사람들 거의 전부가 밤새 뜬눈으로 지켜만 봐야 했던 뒤집힌 침몰선의 파란색 뱃머리다.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의 이미지는 아마도 한밤 중 존엄함을 빼앗긴 채 차디찬 길바닥에 방치된 젊은이들의 파래진 몸일 것이다. 그리고 2023년 2월 6일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발생한 최악의 지진 재난에서 우리는 죽은 엄마와 탯줄로 연결된 채 사흘 만에 구조된 ‘기적’의 아이 ‘아야(Aya)’의 작은 몸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군데군데 파랗게 멍든 상처가 있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잔해 속에서 태어난 그 갓난아기를. 나는 앞서 다룬 카텔란의 〈모두〉를 보며 동시대 한국에서 일어난 사회적 재난과 그 재난을 잠식한 우리 안의 공격성과 혐오를 생각한다. 사회적 재난에 대해 방관자를 넘어 조롱과 혐오를 일삼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알고 보면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데 놀라움이 있지만, 우리 모두를 더 경악시키는 일은 위와 같은 참사가 불의에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어제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너’ 또는 ‘그들’로 지칭하며 모욕한 누군가가 오늘 자신의 잘못 아닌 화재, 침몰, 붕괴, 침수 등으로 희생된 ‘나’가 되거나 ‘우리’ 유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한다. 카텔란의 개인전 제목 ‘우리’는 인칭대명사다. 그것은 언어학에서 전위어轉位語; shifter로 분류된다. 가령 1인칭대명사 ‘나’ ‘너’ ‘우리’는 단어는 그대로인데 화자와 청자가 바뀌는 데 따라서 위치를 바꾸기 때문이다.3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때 환기되며,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유사한 자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4된다고 정의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카텔란의 미술을 감상하며 고정된 자아 대신 언제든 입장과 처지가 바뀔 수 있는 우리 운명에 대한 파토스의 운동을 일깨우는 것이 좋겠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WE》 전시 전경
Courtesy of Maurizio Catelan photo by 강수미

 


1   이 대목에서 사회학자 바우만(Zygmunt Bauman)이 논파한 현대사회의 역설과 난제의 역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08. “그들은 언제나 너무 많다. ‘그들’이란 적으면 적을수록, 더 낫게는 아예 없어야 좋을 사람들이다. 반면 우리가 충분한 적은 결코 없다. ‘우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사람들이다.”(p. 71.) “인간쓰레기든 비인간
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1990, pp. 69-80 참고.
3 국어 ‘우리’는 상황에 따라 ‘포괄적인 용법’과 ‘배타적인 용법’으로 나뉜다. 화자가 청자를 포함시켜 ‘우리’라고 말할 때도 있고, 반대로 청자를 배제하고 지칭할 때도 ‘우리’를 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칭대명사”,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108
4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책, p. 74.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등 다수의 저서, 평론,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기획이사,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3년 03월호(통권 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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