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푸른 바다, 그 영원한 생명: 통영 전혁림미술관
[미술관 탐방] 푸른 바다, 그 영원한 생명: 통영 전혁림미술관
  • 김명해 (화가, 객원기자)
  • 승인 2023.09.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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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항〉 2006년, 640㎝×190㎝, 오일, 켄바스

경남 통영은 사계절 어느 시기에 가도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오르락내리락 절벽 위에 솟은 예쁜 집들과 푸른 바다, 광활한 바다 위에 펼쳐진 크고 작은 섬들, 이른 아침 출항하는 뱃고동 소리와 갈매기 울음에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고, 일출과 일몰 광경을 한 자리에서 섭렵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자리하기 때문에 필자는 이러한 통영의 아름다운 비경을 만끽하기 위해 자주 들르는 편이다.

또한 통영은 극작가 유치진, 시인 유치환, 음악가 윤이상, 시인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등 많은 문화예술인을 배출하고 예술이 일상의 풍경이 되고 삶의 결이 스며있는 예향의 도시다. 이러한 통영에 미술계에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한국적 추상화라는 독창적인 창작세계를 개척한 현대미술의 거장이 계셨다. 바로 전혁림全爀林(1915-2010) 화가이다.

전혁림은 고향인 통영과 부산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의 피카소’, ‘색채의 마술사’, ‘바다의 화가’ 등 한국 색면 추상의 선구자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조형의식을 토대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온 예술가이다.

전혁림미술관 전경.

통영 시내를 거쳐, 미륵도로 넘어가는 통영대교를 지나 미륵산 자락 봉평동 봉수골 초입에 그의 생애를 담은 새로운 창조 공간인 ‘전혁림미술관’이 있다. 이곳은 화가가 1975년부터 30년 가까이 생활하며 지내던 작업실을 헐고 새로 지은 건물로, 2003년 5월 11일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미술관 전시공간은 1층에서 3층까지이며 화가의 작품 80여 점과 관련자료 50여 점을 상설전시하고 있다.

건물자체가 예술품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아주 독특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있는 미술관은 봉평동 일대의 뒷산을 배경으로 바다의 길을 안내하는 등대와 전통사찰의 주요소인 탑의 형태를 접목하여 건물의 외형을 표현하고 있다.

건물 외벽은 화가의 작품을 넣은 세라믹 타일 7,500여장을 붙여 통영의 이미지와 화가의 예술적 작품을 표현하였다. 흰 바탕에 배치된 작가의 색면회화는 깔끔하고 세련된 구성을 보여주며 초록의 담쟁이 넝쿨로 덮인 아트 샵건물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운치미를 창출한다. 특히, 건물 3층의 전면 벽은 화가의 작품 〈창Window〉(1992)을 11종류의 타일작품으로 조합하여 재구성한 가로 10m, 세로 3m의 대형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파란색 현관문을 열고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면 화가의 연보와 작품세계에 대한 설명이 있고, 사방으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새와 오리, 파도와 물고기, 나무와 나비, 꽃과 화병, 해와 달을 닮은 둥근 문양과 조각보를 연상시키는 세모네모 모양의 도형문양들이 화면에 등장하며,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작품들 사이에는 흰색, 붉은색, 황색, 검은색인 우리의 오방색五方色1이 함께한다.

“서구문명에 대한 관심 이상으로 우리의 민족적인 전통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내 작품에 충무(통영)라는 지역의 고유성이 스며있겠지만 우리 한민족의 미의식과도 커다랗게 상이하지는 않다고 믿는다…. (중략) 내가 십대부터 관심을 기울였던 민화 같은 것에서도 우리는 많은 공감대를 확인할 수가 있지 않은가, 민화는 당시 지배계층의 미감을 무시하면서 서민들의 애환을 유감없이 화면에 담았기 때문이다. 나는 민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화면의 구성법이라든가 모티브, 색채사용 혹은 시대적인 것 등이 그것이다.”2

작품 제목 〈민화로부터〉(2006), 〈등잔이 있는 정물〉(2006), 〈정물〉(2009)에서 알 수 있듯, 전통 민화에 많이 등장하는 동·식물과 정물 형태를 단순하게 기하학적이고 유기적인 추상 색면과 선으로 화면 공간의 실재에 맞추어 배열하고 콜라주한 작품들로 구성되어있다. 현재 전시된 작품은 전혁림의 후기작품들로, 이 시기 작품은 초기작품에서 볼 수 있는 민화적 요소의 반추상적 표현과 중기에 시도했던 청색의 강렬한 원색에 한국의 전통색채인 오방색의 자연스러운 대비로 고유의 민족정서를 재해석하여 현대화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통영의 바다풍경을 단순화한 작품 〈통영항〉(2006), 〈한려수도〉(2005)는 통영 앞바다의 짙은 청색을 ‘코발트블루’라는 강렬한 색채로 표현되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작품 〈통영항〉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그림을 보고 감흥을 받아 의뢰한 작품으로, 청와대 영빈관 인왕실에 1,000호 사이즈로 전시되어있다고 한다.

〈기둥과 바다〉 2007년, 165㎝×135㎝, 오일, 켄바스.

“바다가 좋고, 바다는 무한한 그런 힘을 가지고 있고, 아주 시적인 요소가 많아요. 그래서 나는 바다를 참 좋아합니다.”3

바다를 좋아하는 전혁림 화가는 시시각각으로 변화는 통영 앞바다의 풍부한 색채를 화폭에 담았다. 푸른 바다 위에 솟은 미륵도를 중심으로 위성처럼 떠 있는 수많은 섬과 다리, 항구에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과 해안선을 따라 촘촘히 들어선 건물까지 통영항의 정겨운 풍경을 강렬하고 단단한 선과 맑은 청색으로 따뜻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푸른색을 좋아하여 작품으로 승화시킨 화가는 많이 있다. 몽환적 분위기 속에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샤갈Marc Chagall(1887-1985)의 밤하늘 맑은 청색, 암울한 시기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삶을 청색으로 표현한 피카소Pablo Ruizy Picasso(1881-1973)의 청색시대, 커다란 캔버스를 하나의 청색으로 균일하게 칠한 이브 클랭Yves Klein(1928-1962)의 모노크롬 청색이 있는 반면, 전혁림의 청색은 우리의 하늘과 바다에 스며든 삶과 애환의 색이자 고향인 통영의 색인 것이다.

〈새 만다라(New Nandalla)〉 2007년, 200㎝×120㎝, 목함지에 유채.

또한 불교회화 문양을 그린 20㎝ 정방의 목기 60개를 조합하여 제작한 작품 〈새 만다라4〉(2007)도 있는데, 이 작품은 종교적인 의미를 담기 보다는 작가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기호적이고 화려한 색채로 표현한 듯하다.

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면, 이곳은 전혁림 화가의 초기와 중기의 작품들과 함께 화가가 사용했던 화구와 작업복, 전시 팜플렛과 작품이 실렸던 미술·문학잡지 등 화가의 행적을 볼 수 있는 전시 아카이브archive로 구성되어 있다.

초기작품을 보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로부터 불화나 민화, 민속예술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이고 민족적인 정신성과 표현양식을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면서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전혁림 화가.

“동양의 예술정신이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색채와 조형장식성이며, 그 도식적인 면과 그 세계관에 입각한 표현방법이 나와 선험적 체험적으로 회화작업에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나의 회화의 원점과 그 발상은 우리나라의 미술문화의 조형문화, 한국적인 미의식 감정·정서·색채·형상·생활문화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더욱 최근의 나의 작품은 나의 신조형이고 그 명확한 선과 원색에 가까운 그 색채, 도식적인 색면, 형상, 그 구성이 나의 과제이고 탐구 대상이다. 회화는 색채와 형상에 의한 공간의 창조라고 나는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몬드리안이 말한 선과 순수한 색채와 순수한 관계의 새로운 미학에서 순수한 구성만이 새로운 회화예술이 될 수 있을 것 같다,”5

특히 전혁림의 작품 세계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입체적인 목기와 도자기에 화가의 색으로 그림을 입힘으로써, 한층 더 전통적이고 화려한 작품으로 재탄생한 작품들이다. 즉 단순한 목기와 도자기가 입체조각품이자 하나의 오브제 영역으로 승화한 것이다.

미술관 2층전시실.

2층 전시실에서 3층 전시실로 가는 길은 외부계단으로 연결되어있다. 미술관 외벽 타일을 더 가까이 볼 수 있고 계단과 옥상 테라스로 연결되어 있는 공간에는 아기자기한 화초들과 쉴 수 있는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이곳이 예전 화가의 작업실이자 생활공간이어서인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며,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렇듯 전혁림 화가는 1세기 동안 시대의 변화에 따른 문화의 격변 속에서 민족정서에 기초한 창작의지로 한국적인 미감을 구현한 작가이다. 소재의 외형만을 그리지 않고 추상과 입체, 선과 면적인 방법을 택하여 자신의 작품에 현대적 형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노력한 화가이다. 늘 일렁이는 통영의 파도처럼 의식을 잠재우지 않고 한평생 새로운 창작활동에만 전념한 역동의 예술가이다.

〈나비와 정물〉, 1985년, 62㎝×44㎝×44㎝, 혼합재료.

“예술이 지식이나 이론, 과학적 계산, 기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리적인 것, 영감과 표현의 농도에 따라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 탄생되리라 믿는 마음이 지배적이다.”라고 말씀한 것처럼 그의 작품에는 평생을 함께한 한국적 정체성이 은은하게 스며있다.

미술관을 나오자마자 갑자기 몰아친 비바람에 옷이랑 신발이 다 젖어 황급히 미술관 아트 샵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에는 전혁림 화가의 작품을 옮겨놓은 찻잔과 생활 소품들이 있어 구매가 가능하며, 차도 마실 수 있는 작은 카페이다. 빗소리와 함께 마신 뜨거운 커피는 분위기 탓인지 시원하면서 개운하다.

〈비상〉, 1978년, 10호p, 켄바스, 오일칼라.
〈비상〉, 1978년, 10호p, 켄바스, 오일칼라.
〈등잔이 있는 정물〉, 2006년.

전혁림미술관이 위치한 이곳 봉수골은 통영시가 지정한 ‘화가 전혁림 거리’이자 ‘봉수골의 아름다운 거리’라 불리고 있다. 제주의 ‘이중섭 거리’처럼 거리와 골목 곳곳에 전혁림 화가의 작품들이 담이나 시설물에 새겨져 있으며, 개성 넘치는 식당과 카페, 공방, 공예품가게들도 있다. 무엇보다 통영을 기반으로 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공간이 이곳에 몰려 있다는 점이 흐뭇하다. 고요하고 한적한 골목 풍경에서 봉수골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발길 닿는 곳마다 사랑스럽고 매력이 넘치는 동네이다. 소설가 박경리선생이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작가에게 큰 충격을 준다. 통영은 예술가를 배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곳이다.”라고 했다. 통영은 이곳에서 생활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예술적 기질이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곳인가 보다.

 


1 청(靑), 백(白), 적(赤), 흑(黑), 황(黃) 등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기반으로 한 다섯 가지 색
2 『고 전혁림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예술제』 도록, p66 작가노트에서
3 KBS경남 영상뉴스 중에서 2005년 인터뷰 기사.
4 산스크리트어로 ‘원’이라 뜻의 불교회화양식인 만다라는 불교에서 종교의례를 거행할 때 사용하던 상징적인 그림.
5 『고 전혁림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예술제』 도록, p58-59 작가노트에서


참고자료
통영시청 https://www.utour.go.kr/ 전혁림미술관

 

* 《쿨투라》 2023년 9월호(통권 1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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