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은의 시조 안테나] 박화남 시인의 「나의 우편함」
[이승은의 시조 안테나] 박화남 시인의 「나의 우편함」
  • 이승은(시인)
  • 승인 2023.10.06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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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손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어본 지가 언제인지 가만히 헤아리게 되는 시편입니다.

젊은 날 나의 우편함에 꽂혀있던 누군가의 쪽지. 혀를 내밀어 우표를 붙이고 빨간 우체통에 넣던 편지. 갈피에 잘 마른 단풍잎을 끼운 편지가 안으로 토옥, 떨어지는 소리가 이 저녁, 가을바람 속에 섞여듭니다 .

그렇게 오고가던 그리움의 거리를 이젠 가늠하기도 아득해졌지요. 큰길가 우체통도 자취를 감춰버린 지 오랩니다.

나비가 팔랑이던 꽃그늘의 날들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멀어졌습니다 .

 

아파트 입구의 사각 철통우편함 속으로 배달되는 것은 고지서 따위의 ‘메마른 독촉’뿐 ‘인기척’은 없습니다. 우리의 클릭을 기다리는 전자우편함의 현실은 또 어떻습니까.

욕망하는 것이 이뤄지기를 기다리는 일이란 소리 없는 고통이지요 .

바깥과의 단절 상황에서 느끼는 고독을 ‘독거남자’로 끌어와 화자는 “기다리는 일에는 이골이 나있”는 우리의 내면을 비춰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좌절하지 않고 우편함을 열고 닫으며 욕망의 도착을 바라고 있네요.

이제 그 우편함은 물질이 먼지가 되어가는 과정, 피로도가 누적되어 불가능한 상태로 진행되는 공간입니다. 자체적이든 외부 힘에 의한 것이든, 어쩌면 존재의 소멸같은 게 아닐까요. 그러나 이 시조에서는 쓸모없어지는 무언가를 발견함과 동시에 에너지로 전환하려는 의지가 읽힙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증가되는 이 시대의 엔트로피.

만물은 유용에서 무용으로의 한 가지 방향으로만 흐르며 결국에 세계는 무질서에 휩싸일 “무덤”이라고 경고하면서도, 혹여 다시 오실 “안부”의 내일을 꿈꾸는 이가 꼿꼿하게 서’있네요.

그토록 기다리던, 문밖은 어느덧 시월입니다.

 


이승은 1958년 서울 출생. 1979년 문공부·KBS 주최 전국민족시대회로 등단. 시집으로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어머니, 尹庭蘭』 『얼음동백』 『넬라 판타지아』 『환한 적막』 외 5권, 태학사100인시선집 『술패랭이꽃』 등이 있다. 백수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중앙일보시조대상, 이영도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쿨투라》 2023년 10월호(통권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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