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은의 시조 안테나] 정용국 시인의 「습자(習字)」
[이승은의 시조 안테나] 정용국 시인의 「습자(習字)」
  • 이승은(시인)
  • 승인 2024.01.3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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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못다 떼고서 덮어버린 국정교과서가 생각나는 2월은, 날 수가 모자라서 애틋한 막둥이 같은 달이지요. 그래도 올해는 29일, 하루가 보너스처럼 얹혔습니다.

이달에 새겨 읽는 작품은 습자習字입니다. 작품 밑에 달린 주에서 알 수 있듯이 1938년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자 휘문고 교사였던 가람 이병기 선생은 자리에서 물러나 습자만을 맡게 되었습니다. 습자란 그저 글자연습이 아니라 한 획씩 쓸 때마다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자는 인성교육 과목이었어도 시인이던 가람 선생이 모국어를 읽고 쓰고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과 다름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 비애를 헤아려 낸 화자는 자음들을 써 내리며 ‘떨어진 생 살점이 파르르 떨렸다’며 심정을 대신합니다. 별이 반짝여도 별이 아니고 ‘난초도 냉이 꽃도 이름들이 사라졌다’지만, 어쩌면 가슴 깊숙이 들어와 화인으로 새겨졌다는 역설로 읽힙니다. 그러니 ‘올곧게 심지를 내린 그 뿌리’를 만나는 것이지요.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국문학자요 민족주의자인 가람 선생은 교수를 할 능력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경성제대 녹을 먹고 싶지는 않다”며 사립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휘문고 교사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일제日帝에 대한 문화적 저항단체인 〈조선어연구회〉도 1921년 당시 임경재 교장, 이병기 선생 등을 비롯해 최두선, 장지영 선생 등이 휘문 기숙사에 모여 창립했고 이것이 1931년 〈조선어학회〉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한글학회〉가 된 것이지요.

이렇게 지켜 온 우리말을 얼마나 아십니까, 아니 얼마나 아끼십니까. 외래어에 치여 자꾸만 변해가는 말과 글을 당연시 하지는 않으십니까. 토박이말이 점점 잊혀져가고 신조어가 난무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말은 얼이지요. 바른 우리말이 도약의 대한민국을 세우는 힘이 됩니다.

이제 ‘미안한 이름들’은 어디에도 없도록, 오늘은 한글 습자를 해 볼 참입니다.

 

 


이승은 1958년 서울 출생. 1979년 문공부·KBS 주최 전국민족시대회로 등단. 시집으로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어머니, 尹庭蘭』 『얼음동백』『넬라 판타지아』 『환한 적막』 외 5권, 태학사100인시선집 『술패랭이꽃』 등이 있다. 백수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중앙일보시조대상, 이영도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쿨투라》 2024년 2월호(통권 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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