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섬의 시간’이 필요해: 〈연인〉 〈남남〉
[드라마 월평] ‘섬의 시간’이 필요해: 〈연인〉 〈남남〉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3.10.0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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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제공

대본 좋고, 연출 좋고, 음악 좋고, 그리고 그 좋은 대본과 그 좋은 연출과 그 좋은 음악을 살리는, 좋은 배우가 있다. 드라마 〈연인〉에서 배우 남궁민은 ‘믿고 보는 배우‘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한다. 배우 남궁민이 연기하는 주인공 이장현은 껄렁껄렁하고, 능청스럽고, 그래서 가벼운 남자처럼 보인다. 극중 여러 여인과 연애하는데, 조선 시대 배경이다 보니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인 줄 알았다가 여자들이 뒤늦게 배신감에 치를 떤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남주’이장현의 자유로운 로맨스는 ’여주‘ 유길채를 만나면서 산산조각이 난다. 요즘 말로 남주가 ‘구르는’ 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바람처럼 떠돌던 이장현의 삶에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유길채의 존재는 바람과 같다. 바람과 바람이 만났으니 거센 스파크가 튀는 것은 당연지사. 다른 남자에게 고백했다가 차여서 슬퍼하는 유길채에게 그는 거침없이 돌진한다. “나한테 오시오.” 물론, 유길채는 오지 않는다. 흔히 로맨스 드라마를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냥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시련과 고난이 있는 사랑, 즉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로맨틱 모험 서사가 바로 로맨스 드라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북한 군인 리정혁은 사랑하는 윤세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남한에 오고, 드라마 〈구미호뎐〉에서 구미호 이현은 사랑하는 남지아를 위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을까?” 드라마 〈연인〉에서 이장현은 사랑하는 유길채를 위해 패배가 예견된 전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낭자가 우는 꼴이 보기 싫거든.”

전쟁이 일어나고 마을에 사는 젊은 남자들이 붓 대신 칼을 쥐고 임금 인조를 지키겠다고 나설 때 그는 의병이 되는 대신 피난을 가겠다고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남몰래 숨어서 몽골군이 쳐들어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마을 사람들이 피난 갈 수 있게 도와준다. 그 마을 사람들 안에 유길채가 있기 때문이다. 험난한 피난길에 오른 여자들이 몽골군의 추적에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고 그 과정에서 포로로 잡히기도 하는데, 이때 그들을 구해내는 것도 이장현이다. 그 포로 안에 유길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이장현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한테 오시오.” 냉큼 낭궁민에게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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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서 ’님‘으로

로맨스의 꽃은 ‘티키타카’. ‘바람’ 이장현과 ‘바람’ 유길채의 만남은 시작부터 격렬한 티키타카가 예견되어 있었다. ‘비혼주의자’ 이장현과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유길채는 서로를 향한 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고, 그 과정에서 드라마 명대사가 탄생한다.

이장현은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붙이면 남이지 않소? 헌데 님과 남 사이에 뭐가 있는 줄 아시오?”라고 넌지시 묻는다. 그리고는 ‘주저할 섬’에 대해 이야기한다. “낭자가 낭자의 속마음을 모르겠거든 나와 낭자가 주저하는 시간, 섬의 시간을 갖는 것이 어떻겠소.” 섬의 시간을 갖는 사내와 여인은 지금 당장 마음을 정할 필요도 없고, 지금 당장 인연을 끊을 필요도 없고, 그저 잔잔히 서로를 지켜보고 가끔 좋은 시간을 가지면서 님이 될지 남이 될지를 정하면 된다고 말이다. 이장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길채는 “그럼 언제까지 그 섬을 하는 건가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이장현은 “둘 중 하나라도 마음이 간절해지거나 마음이 식으면 깨지는 것”이라고 답한다.

뭔가 굉장히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듯한 느낌이 들지만 여기서 잠깐, 드라마 배경이 조선 시대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여자들이 바깥에 나갈 때면 머리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장옷을 써야 했던 시절. 얼굴만 살짝 드러내야 하므로 단추를 잠그고, 이중고름을 잡아 또 한 번 꽉 여며야 했던 시절. 조선 시대의 장옷과 쓸치마는 무슬림 여자들이 쓰는 히잡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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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연애하자는 이장현의 말에 유길채는 버럭 화를 낸다. “섬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리고는 차갑게 자리를 떠나는 유길채. 그 뒤에 혼자 남겨진 이장현. 대한민국 최초의 비혼주의자 이장현은 위대한 유산 ‘썸’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남긴 채 장렬히 전사한다. “가수 정기고와 소유가 부릅니다.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로맨스 남주답게 그는 죽은 뒤에 다시 살아 돌아온다. 사랑을 성취할 때까지 절대 죽을 수 없는 게 ‘로맨스 남주’의 숙명. 이장현은 유길채에게 몽골군을 피해 안전한 섬, 강화도로 피난을 가라고 당부하며 그녀 마음속에 큼지막한 ‘섬’을 하나 쿡 심는다. “내 달빛에 대고 맹세하지. 이번에 그대가 어디에 있든 내 반드시 그대 만나러 가리다.” 그렇게 이장현은 유길채의 ‘남’에서 ‘님’의 자리로 슬그머니 건너간다.

병자호란으로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간다. 그렇다. 지금 사랑하지 않은 자, ‘유죄’라는 말은 드라마 〈연인〉 이후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 사랑하지 못하는 자, ‘무능’이다. 전쟁 중에도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며 다들 사랑의 계절을 충만하게 보내고 있다. 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서도 ‘섬의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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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시간

흥미로운 것은 비혼주의자 이장현이 ‘섬의 시간’을 갖는 또 하나의 대상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조선이다. 처음에 그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듯 보인다. 이장현은 의병에 나서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왜 백성이 임금을 구해야 하냐”고 토로한다. “나라의 근본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득하는 성균관 유생 남연준에게 “위험할 때 가장 먼저 몸을 피하는 게 나라의 근본이 하는 일이죠”라고 호기롭게 맞받아친다.

드라마 〈연인〉은 이제까지 ‘병자호란’을 바라보았던 시선과는 차별화된 관점으로 국가와 국민의 이상적인 관계, 훌륭한 리더의 조건 등 지금 여기 2023년 대한민국을 되비추는 뜨거운 논쟁거리들을 슬며시 로맨스에 녹여낸다. 아, 이래서 파트 1과 파트 2 사이에 한 달 넘은 ‘섬의 시간’이 있는 거였구나,는 큰 깨달음. 하지만 이장현이 괜히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이겠는가. 따뜻한 츤데레 이장현은 그 무엇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 비혼주의자인 척 행동하지만 정작 전쟁이 일어나자 그 누구보다 전심을 다해 싸운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 〈연인〉을 정치물로 빠질 뻔한 위기에서 구해내 제 궤도인 로맨스물로 돌려놓는다. 로맨스 남주가 아니었다면 그는 드라마 초반에 벌써 죽었을 운명이었다. 칼에 맞아 죽고, 역병에 걸려 죽고, 스파이 짓 하다가 죽고, 왕에게 충언했다가 죽고….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시청자와 ‘섬의 시간’을 갖다가 ‘남’에서 ‘님’으로 전환된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 〈남남〉은 첫회 시청률 1%대였는데, 입소문을 타고 매주 시청률이 상승하더니 마지막 회 최고 시청률 5.5%를 기록하며 종영했다. 드라마 〈남남〉은 드라마 〈연인〉과 비슷한 듯 다른 길을 걷는다. 〈연인〉이 ‘남’에서 ‘님’이 되는 로맨틱 이야기라면, 〈남남〉은 ‘님’이었던 사람들이 ‘남’을 향해 있는 힘껏 나아가는 씩씩한 이야기다.

ENA 제공

‘님’에서 다시 ‘남’으로

드라마 〈남남〉은 고등학생 때 덜컥 임신한 후 홀로 아이를 키워온 싱글맘 은미와 시크한 딸 진희의 ‘섬의 시간’을 다룬 가족 드라마다. 첫 회에서 엄마 은미는 퇴근하고 집에 들온 딸에게 자위하는 모습을 들킨다. 은미는 당황하지 않고, 딸에게 ‘치킨 시켜줄까?’ 물으며 아무 일 아닌 척 군다. 딸 진희도 민망해하는 듯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에게 자위 기구를 사줘야 하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한다. 드라마 〈남남〉은 여성의 성적 욕망뿐 아니라 엄마의 성적 욕망까지 모조리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초강수로 엄마 은미를 존중받아야 할 ‘남’(타인)으로 등극시킨다. “너는 자위 안 해?” “내로남불! 극혐!”

뒤늦게 등장한 딸 진희의 생부 ‘진홍’도 ‘백마 탄 찌질이’로서 새로운 형식의 가족 탄생에 일조한다. 그동안 드라마에서 보던 미혼모 엄마가 혼자 힘들게 딸을 키우다가 나중에 부와 명예를 가진 아이의 생부가 나타나 인생 역전하는, 그런 신데렐라 스토리는 없다. 부유한 집안 출신 의사인 진홍은 은미가 사귀는 새로운 ‘썸남’의 자격으로 두 여성 옆에 조용히 머문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남’이 되어 ‘섬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며 세 사람 모두 ‘따로 또 같이’ 성장 서사를 써 내려간다. 아, 우리에게도 ‘섬의 시간’이 필요하다.

ENA 제공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연두빛 캠퍼스물과 회색빛 오피스물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다. 언젠가는 내 인생이 장르가 판타지로맨스코미디홈드라마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2022년 중앙대학교 교육상과 제4회 르몽드 문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쿨투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크리티크 M》 편집위원과 KBS World Radio 〈김형중의 음악세상〉 고정 게스트로 활동하며 자발적 드라마 홍보대사로 열일하고 있다. 저서로 드라마 캐릭터 비평집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여러 권의 책이 있다.

 

* 《쿨투라》 2023년 10월호(통권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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