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현실 도시인으로 살아남기: 서울시립미술관 & 80도시현실
[미술관 탐방] 현실 도시인으로 살아남기: 서울시립미술관 & 80도시현실
  • 김명해(화가, 객원기자)
  • 승인 2023.11.0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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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가을날이다. 서울지하철 시청역 1번 출구에서 가을 단풍 길로 잘 알려진 덕수궁 길을 걷다 보면 붉은 벽돌의 좌우대칭 구조로 세워진 근대식 건물이 발길을 잡는다. 세 개의 반원형 아치의 아케이드를 중심으로 균형 있게 서 있는 3층 건물의 양옆은 통유리의 현대식 건물과 연결되어 고풍미와 현대미가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 건물은 1928년 경성재판소로 지어져 광복 후 대법원으로 사용되어오다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겨간 후 2002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이다.

서울근현대사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은 정동 한가운데 위치한 르네상스식 옛 대법원 청사를 일부 보존하고 후면과 측면을 신축해 재탄생된 건물이다. 르네상스적인 대칭성을 지닌 전시동 건물의 완결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미술관의 부속 신축건물로서 정체성을 갖도록 고안하여, 연결통로는 전시동 건물과의 조화를 위해 투명하게 건축하였다. 그래서인지 미술관 입구로 들어서면 건물 양 측면, 뒷면, 천정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굉장히 환하고 깔끔한 분위기여서 마치 ‘1900년대’라는 과거의 문을 통해 들어와서 ‘2000년대’라는 현재의 세계로 온 느낌이다. 1층 로비에서 3층까지 하늘이 보일 만큼 트인 중앙천정으로 충분한 빛이 들어오고 3층까지 오르는 중앙계단을 통해 건물의 전면부와 유리로 이어지는 실내공간의 독특한 멋을 느낄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전경사진 ⓒ Kim YongKwan)

미술관 1층은 로비와 기획전시가 진행되는 큰 전시실이 있다. 하필이면 필자가 방문한 날은 다음 전시 설치로 다소 어수선하긴 했지만 미련 없이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미술관 2층 가나아트컬렉션 전시실에서 실시하는 《80도시현실》전을 조명해 보기 위해서다.

가나아트 컬렉션은 2001년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가 1980-90년대 한국의 사회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민중미술과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 200여 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들이다. 이번 《80도시현실》은 가나아트 컬렉션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을 통해 ‘1980년대 도시현실과 도시인’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전시로 회화, 사진, 조각 등의 매체로 구성된 작품 21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붉은 바탕의 전시실 내부에 설치된 작품들은 차분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1980년대의 도시로 우리를 안내한다.

《80도시현실》 전시 전경, 사진 김상태. ⓒ 2023, 서울시립미술관

1980년대 한국 사회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1960–70년대 고도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도시화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시기였다. 1962년 시작된 국가주도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년 동안 20배 증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빛나는 성장의 이면에는 여러 사회 문제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수출 중심 공업화 전략이 본격화됨에 따른 저임금 정책으로 근로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에 처하게 되고, 도시근로자들이 먹을 저곡가 정책과 양곡 수입은 농촌 경제를 쇠락시켰고 이로 인한 이촌향도로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도시의 급속한 인구 증가와 도시화로 인한 부작용이 심화되자 수도권 주변으로의 인구 분산을 목표로 토지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대규모의 고급 아파트와 상업 시설들이 건설되었다.

1986년부터 3년간 유가, 환율, 금리의 안정으로 도시근로자들의 소득이 증가하게 되면서 중산층이 등장하고 이들은 거주 형태로 편리한 생활 여건을 지닌 아파트를 선호하였다. 또한 1980년대부터 추진된 수입자유화와 대외 개방 정책으로 외국의 소비재와 문화가 수입되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소비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당대의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시각과 방식으로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렇듯 《80도시현실》전은 1980년대 도시를 둘러싼 현실 인식의 여러 양상을 ‘도시화의 이면’, ‘도시인’, ‘도시를 넘어—생명의 근원’이라는 세 개의 소주제로 구성하여 급속하게 변화하는 1980년대 도시에 대한 다양한 문제의식을 표출했던 예술 작품들을 통하여 당대의 현실에 공감하고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현시점에 이러한 예술 작품들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숙고해보는 장이 되길 기대한다고 미술관 측은 설명하고 있다.

김정헌 〈땅 미륵〉

첫 번째 섹션인 ‘도시화의 이면’에는 1980년대 도시화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비판 의식을 표출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민중미술 1세대 소집단 ‘현실과 발언’은 도시개발로 인한 문제와 빈곤, 무분별한 소비문화 확산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김정헌(1946– )의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럭키모노륨〉(1981)은 아파트 바재인 럭키모노륨 광고를 차용한 작품으로, 화려한 색채의 모노륨 바닥과는 대조적으로 화면 하단에는 논에 모를 심고 있는 농부를 투박하고 거칠게 표현하여 도시와 농촌의 불균등한 발전과 소비와 생산의 불일치 같은 사회문제를 부각시키고 도시화가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을 풍자한 것이다.

신학철(1943- )의 〈변신5〉(1981), 〈상황812〉(1981)은 경제성장과 함께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물질주의와 소비문화에 지배당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풍자한 작품으로, 인체와 기계, 산업문물들을 하나의 결합된 형체로 표현하여 시각화함으로써 보는 이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이상국(1947–2014)의 〈마을〉(1981)은 도시의 난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 외곽으로 내쫓긴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담담한 풍경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서민들의 고단함과 슬픔을 단순한 필치에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구체적인 현실모습을 절제된 감정으로 화폭에 담았다. 전민조(1944– )의 〈롯데백화점, 을지로 2가, 명동, 피카디리극장〉(1976-1990)은 70-8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서울 도심을 사진으로 기록한 작품으로, 특유의 절제된 시각으로 당대인의 삶과 문화를 포착하였다.

박인철 〈독일의 밤〉

두 번째 섹션인 ‘도시인’에서는 1980년대를 살아간 예술가들이 도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도시적인 감각으로 그려낸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서용선(1951- )의 〈거리〉(1994)는 급속한 도시개발로 인하여 소외된 개인의 불안을 주제로 삼은 작품으로, 고층건물을 배경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세 명의 인물들은 무뚝뚝하고 무표정의 오묘한 감정으로 표현하여 억압된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박인철(1953– )의 〈독일의 밤〉(1987)과 오치균(1956- )의 〈인체〉(1989)는 유학 생활 중 낯선 타지에서 느낀 불안과 고독을 표현한 작품들로, 대조되는 색채와 화면구도, 거친 붓질에서 방황하는 자의식과 불안을 읽을 수 있고 고된 생활에서 밀려오는 두려움과 좌절 같은 심리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이흥덕 〈잠자는 도시의 정오 사이렌〉

이흥덕(1953–)의 〈잠자는 도시의 정오 사이렌〉은 푸른 색조로 화면을 가득채운 고층빌딩과 집들 사이로 민방공훈련 사이렌이 울리고, 저 멀리 솟아오른 검은 연기들이 도시를 뒤덮어 불안감을 조성하는 작품으로, 현대인의 삶의 모습과 그 안에 내재한 욕망, 불안, 상처를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류의 보편적인 근원을 탐구하고 현실을 통찰하고자 역사적 시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을 주목해 온 전수천(1947–2018)은 〈빛의 소멸〉(1989)에서 대자연의 불가항력적인 섭리 속에서 있는 인간을 담담히 순응하는 자신의 실존으로 표현하고 있다.

반면, 도시를 자신의 당당한 활동무대로서 인식하거나 도시의 세련된 미감에서 영감을 받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도시인의 현실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도 있다. 오경환(1949- )의 〈정물〉(1990)은 신표현주의적인 원색과 동양적 필선이 자유롭게 결합된 작품으로 빛나는 도시의 세련미와 고독한 도시의 밤을 담고 있다. 정강자(1942–2017)의 〈명동〉(1973)은 상반신을 탈의한 여성화가가 화구박스를 들고 당당한 표정과 자세로 번화한 명동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작품으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주체적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상국 〈마을〉

마지막 섹션인 ‘도시를 넘어—생명의 근원’에서는 1980년대에 걸쳐 도시문제와 농촌파탄의 현실을 고발하는 민중미술과 자연이 지닌 생명력을 통해 강인한 민중의 역사를 표현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도시풍경과 대중의 삶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모순에 주목한 민정기(1949– )는 〈오대산 오대도〉(1996)를 산수화의 부감법과 고지도의 조감법 구도를 적용하여 오대산의 정기와 근원을 힘찬 필치로 시각화하였다. 민간신앙과 샤머니즘, 농민의 삶과 같은 한국적 조형의 본질을 탐구한 조각가 심정수(1942- )는 〈일어서는 여인〉(1990) 조형물에서 인체를 마치 나뭇가지가 뻗은 형상과 질감으로 서툴고 거칠게 표현하여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하였다.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강인한 민중의 역사를 표현한 김호득(1950- )의 〈폭포〉(1988)와 주로 산, 얼굴, 넋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거친 붓질과 두꺼운 마티에르, 뭉개진 형상과 탁한 색조를 통해 삶의 애환을 표현한 권순철(1944– )의 〈용마산〉(1977) 등의 작품도 전시되어있다.

권순철 〈용마산〉

이처럼 1980년대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도시는 작가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어졌다. 상업적 대중문화와 소비사회의 현란한 이미지가 지배하는 현장, 다양한 사람들의 희화화된 삶과 분열된 사회상, 도시의 화려함 속에 찾아오는 고독과 무미건조하고 암울한 일상, 화려하나 허구적인 도시에 부유하는 욕망과 소시민의 어둡고 팍팍한 생활, 도시와 농촌의 대비를 통해 한국사회의 불균형적 발전과 문명비판적인 관점을 표현한 작품들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일상을 고발하고 도시의 향락적인 이면을 드러내고 현실에 대한 야유와 풍자를 보여주며 현대인들의 삶의 터전인 도시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면서도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았다.

민정기 〈오대산 오대도〉

‘비판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관점에 입각한 현실주의적 지향’을 의도한 작가들은 당시 한국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이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리얼리즘(현실적 소재와 현실 문제를 작품에 드러내고자하는 예술 경향)으로 형상화하여 전달함으로써 지금 현재의 현실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큰 메시지message를 주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공간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80도시현실》이 전시되어 더욱 의미 있는 전시이다. 덕수궁 길을 따라 경사진 언덕길을 끼고 내려가니 오래된 가로수 길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옛 추억을 회상케 하고, 담장 없이 오픈된 야외 뜰은 다양한 조각품들과 함께 더 운치 있어 예술적 사색에 잠기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가을바람 맞으며 오늘날 이 도시의 풍광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현실 도시인으로 잘 살아남아야겠다.

 


 

* 《쿨투라》 2023년 11월호(통권 1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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