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은의 시조 안테나] 조성국 시인의 「맞춤 내복」
[이승은의 시조 안테나] 조성국 시인의 「맞춤 내복」
  • 이승은(시인)
  • 승인 2023.11.03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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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 내복

조성국

맞춤 양복은 있고 맞춤 내복은 없는 듯

어떤 건 목이 오므라져 목덜미는 따뜻한데 등 길이가 짧아
허리춤이 허전하고 어떤 건 길이는 넉넉한데 목이 너무 넓다
어떤 건 통은 넓어 편한데 다리 길이가 짧아 종아리가 쓸쓸하
고 어떤 건 다리 길이는 적당한데 발목이 좁아 답답하다 같은
서랍 속에서 같은 이불속에서

속으로 툴툴대면서 낡아가는 것이다

 

- 시집 『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록

 

조성국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같은 해 5·18문학상 신인상 수상. 2021년 시조집 『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로 아르코문학나눔도서 선정, 2022년 경기문화재단 문학창작지원 선정. 공저로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몇 세기가 지나도 싱싱했다』.

 


아침저녁, 기온이 쌀쌀해졌습니다. 11월, 하나와 하나가 만나 나란히 살아가라고 달력이 눈짓을 하네요. 난방을 높이기 전에 내복을 입으면 환경이나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TV의 가르침을 받잡으려는 즈음, 시집을 뒤적이다가 재미있게 잘 읽히는 사설시조를 만납니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면서 사랑은 오고 마침내 우리는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과합니다. 같이 나누는 시간이 많아지니 조금씩 돌출되는 성격, 의외의 화법, 나와 다른 습성, 엉뚱한 취미까지 상대의 전망을 일목요연하게 알아갑니다. 때론 그것이 내 전망의 톱니바퀴에서 일탈하는 당혹감.

‘목덜미는 따뜻한데 등 길이가 짧’거나 ‘통은 넓어 편한데… 종아리가 쓸쓸하’거나 ‘다리 길이는 적당한데 발목이 좁아 답답’하듯이 말이지요.

너 없이는 못살아, 시작은 이랬다가/너 때문에 못살아, 말이 바뀔 때가 있다/안살아, 못을 빼기는 박기보다 어렵다//(액자를 위한 변명-일부) 시인의 다른 시편을 보더라도 살아보니 우리의 짝꿍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벌입니다.

애초에 맞춤 양복처럼 딱 맞춰 입으면 젊어서도 늙어서도 날마다 깨가 쏟아졌을까요. 오래 전 콩깍지가 씌웠을 때 했던 선택에 대해 혀를 차고 팔자를 탓하면서도 떨어지지 않고 사는 게 부부입니다. 찬찬히 헤아리면 미울 때보다 고울 때가 더 많은 사이.

 

생활은 습관이고 습관은 익숙함이지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익숙한 게 좋습니다. 익숙하면 불편도 편해지지요. 그걸 참지 못하고 에라, 새로 시작하면 두근거리기는 하겠지만 또 미지의 터널로 들어가야 합니다. 시간이 뭉텅 잘린 채 말입니 다.

맞춤내복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양함을 줍니다. 서로의 불편을 부대끼며 사는 것. 닮아가는 게 아니라 서로 다름을 확인하면서 사는 ‘이불 속’의 관계가 아닐까요.

어쩌면 ‘서랍 속’같은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랍니다.

 


이승은 1958년 서울 출생. 1979년 문공부·KBS 주최 전국민족시대회로 등단. 시집으로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어머니, 尹庭蘭』 『얼음동백』 『넬라 판타지아』 『환한 적막』 외 5권, 태학사100인시선집 『술패랭이꽃』 등이 있다. 백수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중앙일보시조대상, 이영도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쿨투라》 2023년 11월호(통권 1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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