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은의 시조 안테나] 이토록 시인의 「겨울이 일찍 오는 마을」
[이승은의 시조 안테나] 이토록 시인의 「겨울이 일찍 오는 마을」
  • 이승은(시인)
  • 승인 2023.12.0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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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달을 이끌어 온 12월이 막 문턱을 넘어섭니다. 지난날 추억처럼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벽에 걸어놓고 말입니다.

겨울이 ‘일찍’ 오는 마을은 어디일까요. 맞이하고 견딜 준비가 채 되지 않은 그곳으로 서둘러 찾아오는, 화자의 마음 속 지도를 따라나섭니다. 보일러에 첫 불을 지피는 일. 들창을 흔들며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성근 바람이 으쓸한
홑겹 달력을 여며주네요. 이렇게 겨울의 첫머리를 헤집습니다.

그 안쪽에는 서릿발 같은 가난을 밟고 밥을 벌어오시던 아버지가 계시고 웃풍이 심한 방에서 오들오들 떠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어 객지로 나갔다가 부리 잃은 철새로 자식이 돌아온 날, 아버지는 진눈깨비 흩날리는 어둑한 저녁 내내 골목 끝에 오래도록 서 계셨지요, ‘기울어진 전봇대’처럼.

눈은 고요히 쌓이지 않네요. 그만, 그만하는 바람조차 덮어버리겠다는 듯 쏟아 붓습니다. 파르르 떠는 문풍지로 눈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그런 집, 왜 가난은 불화를 수하처럼 거느리고 다닐까요. ‘불화는 잦고 침묵은 숯검정처럼 검고 집요했다’는 시인의 말씀을 옮깁니다. 겨울은 그렇게 ‘폭설 속 눈사람’처럼 문 밖에 오래 서 있었던 가난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한편 골목에는 더운밥 냄새를 내보내며 자식들을 불러들이는 어머니가 보이네요. 마을이 어둑해지면 큰소리로 부르던 그 호명이 몇 해를 돌고 돌아 ‘된바람
불어’오듯 귀를 때립니다. 아직도 맨발의 목소리는 서릿발을 딛고 타관을 떠도는 우리를 어떤 참회도 없는 우리를, 뜨겁게 불러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겐 그 겨울의 가난조차 눈물겨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골목에 계시지 않겠지요. 그러나 해마다 겨울은 ‘일찍’ 빈 마을의 황량함을 품어 안으며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따스한 온기로 돌아올 것입니다.

Believe in Tomorrow, Adieu 2023!

 


이승은 1958년 서울 출생. 1979년 문공부·KBS 주최 전국민족시대회로 등단. 시집으로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어머니, 尹庭蘭』 『얼음동백』 『넬라 판타지아』 『환한 적막』 외 5권, 태학사100인시선집 『술패랭이꽃』 등이 있다. 백수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중앙일보시조대상, 이영도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쿨투라》 2023년 12월호(통권 11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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