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만난 별 Ⅱ 배우 박정자] 고도를 만나는 순간
[시로 만난 별 Ⅱ 배우 박정자] 고도를 만나는 순간
  • 장재선(시인)
  • 승인 2024.01.02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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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만나는 순간
- 배우 박정자

아흔 아홉의 프레실러가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할 때
모두가 숨죽이고 듣는 것처럼
여든 하나의 그녀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릴 때
우리도 몸을 기울여 함께 기다렸다

그녀가 무대의 제단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사제로
예순 한 해 동안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의 깃발을
때맞춰 지어내며
솟대의 방울소리인 듯
신령한 음성으로 대사를 할 때

우리는 나날의 일상에서
고도를 만나는 순간을
품을 수 있었다.

 


시작노트

박정자 선생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한 것은 몇 가지 의미가 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 현역 배우로 무대에 섰다는 것, 남자로 설정된 럭키 역을 맡아 성별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것 등이다. 무엇보다도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연극에 출연하겠다고 자원한 것이 특별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서 존경받는 원로이니 그저 앉아서 후배들 무대를 구경이나 해도 될텐데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선생을 최근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서울시 도시문화위원회에 함께 참석했을 때였다. 선생은 시의 문화행정에 대해 관계자들에게 세부적으로 묻고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부와 지자체의 위원회에 그저 이름만 빌려주는 여느 원로들과는 뚜렷이 달랐다.

또 한 번은 재일한국인 음악가 양방언 씨의 공연에서였다. 공연이 열리기 전, 관람 초대를 받은 각계 인사들이 로비에 모여서 인사를 나눴다. 문화계 셀럽인 선생은 그 자리에서 당연히 주목 받았으나, 일행과 함께 구석에 조용히 서서 대화를 나눴다. 당신이 주인공이 아닌 자리에서의 처신을 정확히 아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선생은 “배우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을 모두 품고 있어야 하고, 그걸 때맞춰 꺼낼 줄 알아야 한다”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가 앞으로 무슨 빛깔을 꺼낼지 궁금하다는 점에서 영원히 현역으로 남아주기를 바란다.

 

 


장재선 시인. 시집 『기울지 않는 길』, 시·산문집 『시로 만난 별들』, 산문집 『영화로 보는 세상』 등 출간. 한국가톨릭문학상 등 수상. 문화일보 대중문화팀장, 문화부장 등 거쳐 현재 전임기자.

 

 

* 《쿨투라》 2024년 1월호(통권 1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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