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겨울이 있어야만 봄이 올 수 있다: 〈무인도의 디바〉 〈고려 거란 전쟁〉
[드라마 월평] 겨울이 있어야만 봄이 올 수 있다: 〈무인도의 디바〉 〈고려 거란 전쟁〉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4.01.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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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제공

사계절의 시작은 봄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봄을 세상의 시작점에 둔 사람들은 실제로 젊거나 아니면 삶의 장르를 하이틴 캠퍼스물로 고정해놓은 ‘마이웨이 청춘’일 가능성이 크다. 물리적인 나이가 청춘의 임계점을 넘었더라도 그들의 삶에 각인된 심리적 나이가 봄의 새순처럼 풋풋한 것이다. 봄이 오는 것을 간절히 기다려본 적이 없는 사람, 시작이 아닌 결과로서의 봄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가 한 줌의 온기로 몽글몽글해지는 순간을 경험해본 사람은 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 겨울이 와야만 봄이 올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누구에게나 겨울이 있고 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는 확실히 알려준다. 이상 한파로 유독 매섭게 추웠던 작년 겨울, 〈무인도의 디바〉는 우리의 긴긴 겨울밤과 함께 있었다. 넷플릭스 비영어권 TV쇼 부문 4주 연속 글로벌 톱10. 가슴이 저절로 훈훈해지는 기록이다.

tvN 제공

봄이 오는 소리

tvN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신드롬을 일으킨 배우 박은빈의 복귀작으로 방영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다. 아역배우로 출발하여 오랜 시간 연기를 해온 그녀였지만 배우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21년 드라마 〈연모〉 때부터다. 한국 드라마 최초의 국제 에미상 수상작 〈연모〉에서 그녀는 쌍둥이 남동생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남장 여자 왕을 연기했다.

섬세함과 강인함의 환상의 콜라보. 서로 다른 두 매력이 공존하는 그녀의 범상치 않음은 2016년 방영된 시즌제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싹을 틔웠다. 대학 캠퍼스를 배경으로 다들 신나게 연애하는데, 혼자 ‘모태솔로’로 막강한 존재감을 자랑하던 극강의 ‘인싸력’ 보유자 송지원. 극중 ‘여자 신동엽’으로 불리던 그녀는 사랑이 꽃피는 대학에서 관상용 꽃이 아닌 영양가 높은 열매만을 쏙쏙 골라가며 수확하는 독보적인 행보를 선보인다. 시즌 1에 이어 시즌 2까지 상대 남자가 변하지 않은 사람은 송지원이 유일하다. 다들 남친에게 상처받고 오열하는 동안 혼자 멋진 남사친을 옆에 끼고 유유자적, 일말의 감정 노동 없이 가성비 높은 케미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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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은빈과 박은빈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한결같이 당차다. 혹독한 한파를 꿋꿋하게 견뎌내고 기어코 새봄을 맞이하고야 마는 굳건한 의지와 긍정적인 삶의 태도. 〈무인도의 디바〉는 한 편의 감동적인 성장 동화 같다. 주인공 서목하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15년간 무인도에 갇히게 되지만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 꿈을 끝끝내 이루어낸다.

성장하려면 통과의례로서 시련과 고난이 필수 조건이듯 봄이 오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겨울이 있어야 한다. 서목하가 지나온 삶의 궤적에는 인생의 거센 풍랑이 만들어낸 상처의 흔적들이 빼곡하다. 무인도의 시간이 촘촘히 들어차 있다.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 솜털이 보송한 중학생 서목하는 사계절 내내 소매가 긴 교복을 입어야 했을 정도로 온몸에 시퍼런 멍이 있다. 아름다운 동화 밖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범죄 다큐의 시간. 바로 겨울의 시간이다.

tvN 제공

무인도의 시간

현실이 각박하고 고될수록 꿈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애틋해진다. 〈무인도의 디바〉가 시청자들에게 선사하는 따뜻한 위로의 온도는 무엇을 예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높다. 추위로 꽁꽁 언 몸도 사르르 녹일 정도로 뜨겁다랄까. 〈무인도의 디바〉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초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도망가던 16살의 서목하는 무인도에 갇혀 31살을 맞이한다. 갑작스레 15년이란 시간이 그녀의 인생에서 삭제된 셈이다. 가수의 꿈을 향해 달려가던 중학생 서목하의 미래는 가히 자연재해에 버금가는 장엄한 비극 앞에 가로막힌다. 하지만 불굴의 한국인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 몫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앞으로 나아간다. 천천히, 꿋꿋하게.

“다음에, 다음에가 많아지면요. 이럴걸, 저럴걸, 후회도 그만큼 많아져요. 이제 저는 무조건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예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기획사 대표에게 거절당하지만 그녀는 연습생이 아닌 매니저로서 자신의 꿈을 묵묵히 지켜낸다. 그리고 결국엔 그 꿈을 이루어낸다.

꿈을 꾸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그래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슬픈 표정의 청춘들에게 〈무인도의 디바〉는 따뜻한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건넨다. 배우 박은빈은 OST를 직접 부르기 위해 6개월 동안 레슨을 꾸준히 받았다고 한다. 배우 박은빈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무인도의 시간’이다.

〈무인도의 디바〉는 ‘늦었다고 생각하는’ 청춘뿐 아니라 ‘진짜 늦은’ 중년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무인도의 15년을 기점으로 서목하는 16살에서 31살로 점프한다. 그리고 서목하가 좋아하는 롤모델 가수 윤주란도 27살에서 42살로 점프한다. 잘나가던 톱스타였지만 이제는 술과 담배에 찌든 한물간 사람. 성대결절이 온 후 점점 끝을 모르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서목하를 만나 재기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녀는 화려하던 시절의 그때 그 탑스타의 모습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tvN 제공

인생의 희로애락을 호되게 경험한 42살의 윤주란은 정상에서 잘 내려오는 법은 과연 무엇인지, 우아하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후배에게 좋은 선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서목하의 롤모델, 그리고 슬픈 표정의 청춘들의 ‘어른’으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성대결절로 가수 활동을 하지 못한 15년이란 시간은 윤주란에게 ‘무인도’에서의 시간이다. 무인도의 시간을 기점으로 그녀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 덕분에 비정한 연예계에서 다시금 잘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누구에게나 겨울이 있고 봄이 있고, 또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무인도’의 시간을 맞게 된다.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삶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누구나 무인도에 머물 순 있지만 아무나 무인도를 삶의 전환점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KBS 제공

봄이 오는 소리

무인도의 시간을 인생 역전의 발판으로 활용한 모범 사례가 하나 더 있다. 사극의 숨은 고수 KBS가 ‘무인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야심차게 선보인 드라마, 바로 KBS 5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다. KBS 최대 제작비 270억 원을 불태웠는데, 결과가 아주 만족스럽다. 정통사극 최초로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되고, 방영 직후 국내 넷플릭스 TV시리즈 부문 1위를 기록하면서 명실공히 최고의 화제작으로 등극했다.

오랫동안 드라마 침체기를 보낸 KBS는 ‘고려 거란 전쟁’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귀주대첩’ 장면을 1회 오프닝에 전면 배치하는 초강수를 둔다. 위풍당당 출사표다. “강조가 검차劍車를 일렬로 배치해 두고 거란군이 진격해오면 그것으로 일제히 공격해 물리쳤다.” 고려사 현종 5년 당시 기록된 단 한 줄의 문장이 무려 8분 20초에 달하는 ‘검차’ 부대로 돌격하는 전쟁 신으로 재현된다. 1회 최고 시청률 6.8%.

KBS 제공

역사 왜곡과 관련하여 고증 논란이 늘 따라다녔던 역사드라마의 약점을 〈고려 거란 전쟁〉은 정공법으로 돌파한다. 거란 복식 고증을 위해 몽골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를 직접 찾아가 자문받을 정도로 고증에 공을 많이 들였다. 명작의 진정한 가치는 역시 디테일이다.

물론, 진정한 ‘무인도의 시간’은 드라마 안에서 펼쳐진다. 왕이 될 운명의 주인공은 계속 죽을 위협에 처한제공다. 왕이 되고 나서도 고난의 연속이다. 허수아비 왕 노릇을 강요받는 험난한 황실 적응기가 펼쳐진다. 내부의 적으로도 정신이 혼미한데, 외부의 적 ‘거란’까지 전쟁을 선포하며 압박해온다. 그런데 이 모든 시련과 고난이 ‘무인도의 시간’이 되어 대량원군을, 훗날의 현종을 강인하게 만든다. 역사가 스포일러라고 하지 않던가. 〈고려 거란 전쟁〉은 고려를 하나로 모아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황제 현종과 그의 정치 스승이자 고려군 총사령관이었던 강감찬의 이야기다. 이쯤 되면 2024년 나의 무인도는 도대체 무엇일지, 우리가 맞이하게 될 봄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못해 애가 탈 지경이다. 아, 봄이 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하다.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연두빛 캠퍼스물과 회색빛 오피스물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다. 언젠가는 내 인생이 장르가 판타지로맨스코미디홈드라마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2022년 중앙대학교 교육상과 제4회 르몽드 문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쿨투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크리티크 M》 편집위원과 KBS World Radio 〈김형중의 음악세상〉 고정 게스트로 활동하며 자발적 드라마 홍보대사로 열일하고 있다. 저서로 드라마 캐릭터 비평집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여러 권의 책이 있다.

 

 

* 《쿨투라》 2024년 1월호(통권 1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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