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2020년 올해의 소설: 로셀라 포스토리노,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문학 월평] 2020년 올해의 소설: 로셀라 포스토리노,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0.04.2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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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내가 뽑은 올해의 소설이다. 네가 선정하는 올해의 소설 따위에 관심 없을 뿐더러, 2020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올해의 소설 운운하느냐 하는 비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전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변변찮은 능력이나마 갈고닦아 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까. 변변찮은 능력을 갈고 닦는 것은 내 소관이니 오케이. 그렇지만 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니까 패스.

 단 후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올 한 해 어떤 소설이 출간되든,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내가 뽑은 올해의 소설 타이틀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확신한다는 것. 그만큼 좋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이 작품을 좋은 소설이라 하나. 이걸 해명해야 막무가내 우기기가 되지 않겠지.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을 좋은 소설로 꼽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가 세운 두 가지 기준·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만족시켜서다. 언제나 나에게 좋은 소설이란 재미와 의미를 둘 다 갖춘 작품을 뜻했으니까.

 재미만 있는 소설(‘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는데 남는 게 없어’)과 의미만 있는 소설(‘심오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건 알겠는데 너무 지루해’)은 나의 독서 리스트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쯤에서 한 가지 비밀을 더 밝혀야겠다. 좋은 소설은 재미와 의미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미에서 의미가, 의미에서 재미가 나온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는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을 통해 설명하는 편이 낫겠다.

 시기적으로 1943년 가을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스물여섯 살의 여성 로자다. 베를린 출신인 그녀는 지금 그로스-파르치에 살고 있다. 이곳은 군인으로 전선에 가 있는 남편 그레고어의 고향인데, 그녀는 부모가 세상을 떠난 베를린에서 혼자 살기보다, 시부모와 함께 지내며 엄혹한 전쟁기를 견뎌내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지내던 어느날. 그녀는 뜻밖의 호출을 받는다. 히틀러의 친위대원들이 로자를 비롯한 열 명의 여성들을 히틀러의 음식을 미리 먹어보는 사람들로 선발해서다. 당시 히틀러는 그로스-파르치에서 멀지 않던 본부에 머물고 있었고, 그의 독살을 우려하던 측근들은 독일 여성으로 하여금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를 가려내도록 명령했다.

 이 소설은 로자의 관점에서 갑자기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가 된 이들의 삶을 그려낸다. 아까 언급했던 이 작품의 재미는 바로 이 점에서 발생한다. 로자 등은 목숨이 걸려 있는데 그걸로 독자가 재미를 느낀다니 파렴치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은 인물의 내면, 인물과 인물, 인물과 세계 갈등을 핵심으로 하는 장르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고 있답니다.” 이걸로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는 전혀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태도이기도 하다. 사람은 평화를 지향하지만 현실은 평화롭지 않으니까.

 실제로 이 소설은 실화에 근거한다. 이탈리아 작가 로셀라 포스토리노는 히틀러의 ‘시식가’(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의 원제목)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실존 인물 마고 뵐크의 인터뷰를 보고 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식사가 끝나면 살았다는 기쁨에 “개처럼 울었다”던 마고 뵐크.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선 자의 상황은 서스펜스를 가중시킨다. 그래서 독자는 주인공 마고 뵐크를 모티프로 한 로자에게 몰입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음식을 먹으면 긴장감을, 그녀가 음식을 먹고 난 후 아무 일도 없으면 해방감을 같이 느낀다. 전쟁의 비상 상태는 후방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이 같은 스릴에 기반을 둔 재미는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의 표면에 불과하다. 이 정도 재미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의미 또한 그다지 특별하지 않고. 선악의 이분법으로 전개되다 휴머니즘의 승리로 귀결 되는 작품은 이미 너무 많이 나오지 않나. 진짜 재미는 선악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데서, 모순적이고 모호한 인간을 그려내는 데서 생긴다. 심층적 의미도 거기에서 파생된다. 로셀라 포스토리노는 그것을 이 소설에 담았다. 가령 이런 장면들이 그렇다.

 하나, 히틀러의 성찬을 두려워하면서도 맛있게 먹는, 맛있게 먹었으면서도 두려워하는 시식가들의 모습. “우리들, 히틀러의 하녀들은 어느덧 게걸스레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식을 다 먹은 뒤 포만감을 느끼는 순간 기쁨은 사라졌다. 음식이 가득 찬 위의 무게가 심장을 억누르는 것 같아서 식사 후의 연회장 분위기는 항상 우울해졌다.”(70쪽)

 로자의 어머니는 음식을 먹는 행위는 죽음에 저항하는 일이라고 딸에게 가르쳐왔다. 한데 로자가 맞닥뜨린 세계는 그렇지 않다. 독이 들었을지 모르는 음식을 먹는 행위는 죽음에 저항하는 일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다. 그녀는 씁쓸한 공포에 떨면서도 달콤한 미식을 즐긴다.

 둘, 히틀러의 체제에 충성하지만 의외로 따뜻한 사람들의 모습. 히틀러의 시식가로 동원된 여성들 중에는 로자처럼 히틀러에게 무관심했던 이도 있지만, 테오도라처럼 히틀러를 영웅으로 여기고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대신 죽을 수 있다는 이도 있었다. 그런 테오도라를 로자는 광신도라고 생각한다. 그때 로자의 심경이 변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녀는 주방에서 일하다 팔목에 화상을 입었다. 아픔에 비명을 지른 로자. 그 소리를 듣고 온 사람은 다름 아닌 테오도라였다.

 “테오도라는 행주로 상처 부위를 닦아준 뒤 감자 껍질을 벗겨서 그 위에 생감자를 한 조각 올려주었다. ‘이렇게 하면 염증이 가라앉을 거야.’ 엄마 같은 그녀의 태도에 순간 마음이 애틋해졌다.”(80쪽) 로자 혹은 우리가 가진 ‘히틀러 지지자=악’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다. 히틀러 지지가 정치적으로 그릇됐다고 해도 히틀러 지지자 개인이 그릇된 것은 아니니까. 이것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해당하는 사례의 일부다.

 이외에도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의 심층적 의미는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모순적이고 모호한 인간의 양태들은 다시 표현하면 입체적이라는 말이다. 입체성을 띤 캐릭터와 서사는 뻔한 해석을 거부한다. 진짜 재미는 의미의 복합적인 해석이 실감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면서 생성된다. 히틀러와 관련된 작품은 지겹다고? (영화 <조조 래빗>과 더불어) 이 소설을 접하고 나면 그 입장이 바뀌리라 믿는다. 올해의 소설을 나는 허투루 안 뽑는다.

 

 

* 《쿨투라》 2020년 4월호(통권 7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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