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범죄에 대한 사회적 분석으로서의 문학
[문학 월평] 범죄에 대한 사회적 분석으로서의 문학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0.05.27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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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이 글을 쓰고 있는 4월 초의 시점에서 한국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텔레그램 성범죄이다. 전혀 다른 종류의 사안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은 있다. 두 사건은 이 사회가 그다지 안전하고 아늑한 곳이 아님을 입증했다. 언제 누가 바이러스나 성착취의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지자 사람들은 이 상황을 만든 악당(Villain)이 누구인지를 묻게 되었다.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그들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국민청원은 20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코로나 사태가 처음 터졌을 때 ‘우한 빌런’을 우려하던 사람들은 중국발 비행기의 입국금지를 요청했고, 대구의 종교시설과 청도의 대남병원에서 대규모 감염이 터진 후에는 ‘신천지 빌런’이 공공의 적이 되었다. 3월 말부터는 자가격리 지침을 어긴 ‘교민 빌런’ 등이 비판받고 있는데, 『쿨투라』 5월호가 출간되었을 때에는 또 무슨 ‘빌런’이 생겨났을지 모르겠다.

  약간 시니컬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앞의 문단에서 거명한 ‘빌런’들을 변호할 생각은 없다. 참혹한 성범죄에 가담한 이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고, 코로나 정국에서 남에게 피해를 끼친 ‘빌런’들에 대해서도 무턱대고 비호하긴 힘들다. 아쉬운 것은 그들의 단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데 반해, 이런 끔찍한 사건들을 만든 사회적 구조에 대해 고찰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에 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이 선량한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악마 같은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일까. 어쨌든 지금의 사회에서는 누군가가 잘못(범죄)을 저지르면 “누가 했는가”라는 문제만 부각되고, 그 범죄가 생겨난 배경을 묻는 글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추리소설은 “누가 (나쁜 짓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철저히 집중하는 장르이다. 그래서 영미권에서는 추리소설을 후더닛(Who dun it, “누가 했는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누가 했는가”라는 질문이 전국을 뒤덮고 있는 상황인 만큼 이번 월평에서는 올해 3월에 출간된 에릭 앰블러의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열린책들)을 다뤄보려 한다. 이 작품은 최고의 스파이 소설 순위를 뽑으면 거의 항상 1위를 하고, 최고의 스릴러/추리소설을 뽑을 때에도 10위 안에는 들어가는 검증된 명작이다.

  추리소설의 하위 장르로 분류되는 스파이 소설은, 정체성(국적)이 모호한 인물을 통해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구축해낸다. 스파이 서사 중 그나마 한국에서 유명한 것은 비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첩보원의 이야기를 담은 <007> 시리즈인데, 어느 나라에 속하지 못한 경계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스피오나지(espionage) 영화도 얼마간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다. 따지고 보면 2000년대 이후의 영화 중 <본 아이덴티티>와 <캡틴 아메리카 : 윈터솔져> 그리고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 등은 에스피오나지 영화의 변용이라고 볼 만하다. 한데 이런 영화들이 그럭저럭 알려진 데 반해, 스파이 문학은 한국에서 극히 마이너한 장르로 남아 있다. 존 르카레의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정도가 준수한 에스피오나지 영화의 원작으로 알려진 정도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007> 시리즈와 에스피오나지 영화들은 세계를 오가며 자유롭게 행동하는 스파이들을 등장시킨다. 비밀첩보원과 고정간첩 등이 세상의 질서를 좌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은 음모론적이다. 그런데 스파이 서사가 영웅적 인물들의 이야기만 강조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서 거명한 작품들은 스파이들이 암약을 하게끔 유도한 세계질서를 간접적으로 문제 삼는다. 요컨대 스파이 소설은, 국가를 초월하여 활동하는 인물들을 비상한 영웅처럼 그리는 한편, 그들의 범죄를 부추긴 세계질서를 비판하는 모순적 장르이다. 그래서 문학의 사회적 성격에 주목하는 평자들은, “스파이 소설이 보여주는 도덕상의 모호함은 냉소주의를 낳았다”(에르네스트 만델, 『즐거운 살인』, 117면)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상기한 스파이 서사들은 대개 1950년대 이후에 발표된 것이고 그래서 냉전체제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반면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8년에 출간되었다. 이 작품의 서술자 래티머는 디미트리오스라는 국제적 악당을 알게 되고 그의 행적을 쫓게 된다. 디미트리오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스파이(간첩)는 아니고, 여러 나라를 오가는 다국적 범죄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가 저지른 범죄들을 통해, 작가는 당시 유럽에서 국가적 갈등(터키와 그리스의 분쟁), 마약, 성매매, 인종차별 등등의 문제가 심각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또한 그럼으로써 작가는, 디미트리오스와 같은 악인을 만들어낸 것이 당시의 억압적 사회였다는 점을 고발하고 있다. 소설 속에는 이런 진술이 나온다. “제가 아는 것은 힘이 바로 정의인 한, 혼돈과 혼란이 질서와 문명으로 가장하는 한, 그런 조건들은 계속 존재할 거란 사실뿐입니다.”(이 문장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나오는지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일 수 있어서, 쪽수는 기록하지 않겠다) 당시에 앰블러는 좌익에 동조적이었고, 그래서인지 소설 속에서 공산주의 진영의 인물들은 대체로 우호적으로 그려진다. 이 작가가 범죄를 만들어낸 사회적 구조를 분석하게 된 것은 그런 정치적 지향이 빚어낸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은 오래된 작품인 만큼 현시대의 독자들에게 밋밋한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발표 당시에 이 작품은 뛰어난 서스펜스 소설로 읽혔다고 하는데, 2020년의 상황에서는 이보다 흥미진진한 페이지터너(page-turner)가 많다. 그런데 지금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을 읽으면, 어떤 개인의 범죄를 다루면서도 그 범죄를 부추긴 사회적 환경을 논구하고자 했던 작가의 결의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20세기 초중반까지는 ‘대중문학’들도 범죄의 사회적 기원에 대해 분석하려고 했는데, 지금의 문학은 그런 작업에 다소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현재의 문학을 싸잡아 비판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사회구조가 범죄를 잉태시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론이나 문학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얼마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반성을 가능케 만들어준다는 점만으로도,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은 지금-여기의 독자들이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 《쿨투라》 2020년 5월호(통권 7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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