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흥행 속도전이 멈추며 보이는 것들: 〈걸〉 〈나이팅게일〉 〈운디네〉
[영화 월평] 흥행 속도전이 멈추며 보이는 것들: 〈걸〉 〈나이팅게일〉 〈운디네〉
  • 나원정(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
  • 승인 2021.03.0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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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더쿱

  코로나 속 극장 관객 수는 바닥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1월 12일은 더 울적하다. 전날인 11일 하루 극장을 찾은 관객 수는 단 1만776명. 1만명선 붕괴 초읽기에 들어가서다. 서울만도 아니고 전국 얘기다. 2004년 전국 영화표 판매량을 투명하게 집계하는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 생겨난 이래 최저치다. 4일 기록한 그전까지 최저치(1만4519명)를 일주일만에 경신했다. 1월 둘째 주말 흥행 1위에 오른 영화〈원더우먼 1984〉는 금~토요일 사흘간 고작 2만6000여명이 봤다. 이 기간 전국에서 6414회 상영됐으니 한 번 틀 때 관객이 4명 꼴로 들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한 편이 개봉 첫주만에 관객 200만명도 거뜬히 돌파하던 시절은 까마득한 꿈만 같다. 이보다 더 최악이 있을까, 싶다가도 이 잡지가 발간될 쯤엔 또 최저 기록이 깨져있을지 몰라 답답해진다.

 그러다 문득 지난해 만난 할리우드 배우 올가 쿠릴렌코의 말이 떠올랐다.

  “이런 말이 이상할 수 있지만 코로나19가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요.”

  한국에선 본드 걸로 나온 〈007 퀀텀 오브 솔러스〉, SF 〈오블리비언〉 의 톰 크루즈 상대역 등으로 알려진 그는 지난해 초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가 다행히 큰 후유증 없이 회복했다. 지난 10월, 배우 유연석과 프랑스 영화 〈고요한 아침〉을 찍으러 서울에 왔을 때 운 좋게 그를 단독 인터뷰할 수 있었는데 그가 코로나19로 자택격리된 시기를 돌이키며 그런 말을 했다. “코로나19가 제 삶의 속도를 줄이고 저를 멈춰세운 덕분에 지금까지 인생과 현재의 삶을 돌아보게 됐고 인생의 더 중요한 것들에 눈뜨게 됐다”면서다.

  “우린 모두 속도를 줄일 필요가 있잖아요. 물론 매우 힘겹고, 슬픈 시기지만.”

 그의 혜안을 따라 조급증을 덜고 나니 보이는 게 있다. 코로나 전 극장가는 흥행을 ‘경주해온’ 터다. 개봉 며칠만에 관객 몇백만 돌파 같은 기록경쟁에서 도태되면 개봉 첫주 아니, 개봉 하루만에 이후 상영관 확보가 불투명해지기도 했다. 독립·저예산 영화, 중소규모 수입사의 외화들은 큰 영화들의 등쌀에 개봉 첫주조차 불리한 시간대에 배정됐다가 입소문 날 겨를도 없이 자취를 감추곤 했다. 지난해 2월 거인들의 속도전이 강제 정지된 뒤 도드라진 게 바로 이런 영화들이다. 코로나로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대작들이 개봉을 미룬 탓에 신작이 드물어진 극장가에서 장기 상영이 가능해졌고, 좋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관객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상영관이 확대되기도 했다. 여전히 관객 1만명 돌파조차 쉽지 않은 영화들이지만, 코로나 속에도 영화팬들이 방역수칙을 지켜가며 극장에 가게 만들었다. 전국 관객 수가 최저치를 거듭 기록한 올겨울 동안에도 말이다. 이런 영화들은 공통점도 있다. 대중적 소재가 주를 이루는 큰 영화들에 가려있던 소외된 존재, 잘 알려지지 않아 멀게만 느껴졌던 인물이나 삶을 섬세한 시선으로 파고들어 당사자의 낯선 감정까지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벨기에 대형신인 루카스 돈트 감독의 〈걸〉이 한 예다. 소년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소녀’란 걸 믿어의심치 않는, 열여섯 트랜스젠더 라라(빅터 폴스터)가 발레리나의 꿈에 다가서는 성장통을 그렸다. 돈트 감독이 벨기에 출신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노라 몽세쿠흐의 실화에 영감받아 몽세쿠흐와 공동 집필한 시나리오로 연출해 2018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상(신인감독상), 주연 빅터 폴스터의 주목할만한시선 부문 남우주연상, 국제비평가상, 퀴어종려상 등 4관왕을 휩쓸었다. 최고의 발레학교에 들어간 그는 여느 여자아이라면 열두살에 이미 단련됐을 여성 무용수로서의 동작들을 피나는 노력으로 연습한다. 영화엔 라라가 여자의 몸을 갖기 위해 수년간 거쳐야 하는 성전환 수술을 힘겨운 과정도 녹아있다. 자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버지와 남동생, 발레학교 여자아이들과 겪는 일상을 미묘한 뉘앙스까지 포착해냈다. 자존심이 센 탓에 늘 “괜찮다”며 참기만 하는 이 아이 대신 관객이 먼저 울고, 미소짓게 만든다. 미국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을 땐 극중 자해장면이 영화의 윤리성에 있어 논란을 불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겪어본 적 없을 라라의 고통만큼은 스크린을 뚫고 와닿았다. 실제 벨기에 앤트워프 왕립 발레학교에 다니는 남학생 빅터 폴스터는 생애 첫 연기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작은 표정 변화, 몸짓만으로 이 모든 공감을 이끌어냈다.

〈나이팅게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국이 식민지 시절 호주에서 저지른 만행을 처절한 복수극에 새겨낸 영화 〈나이팅게일〉도 빼놓을 수 없다. 봉준호 감독이 수차례 차세대 연출자로 꼽아온 호주 감독 제니퍼 켄트의 작품이다. 데뷔작 에서 행동장애 아들을 둔 싱글맘 간호사의 지친 심리를 동화책 속 악령과의 사투에 녹여낸 그는 이 두 번째 장편에서 호주 개척 사업에 강제동원된 아일랜드 죄수 클레어가 형기가 지나도 자신을 놔주지 않던 영국 장교와 그 부하들에게 강간당한 뒤 남편과 아기까지 살해되고 피의 복수에 나서는 여정을 그렸다. 1825년, 영국군이 흑인 토착민을 대학살한 ‘흑전쟁’이 움튼 당시의 시대상은 클레어와 동행한 토착민 빌리(베이컬리 거넴바르)의 비극적 가족사, 숲속 곳곳에 목매달린 토착민들의 시체로 여과없이 드러냈다. 심리학자의 자문을 받아, 벗은 몸을 전시하지 않고도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충실히 그려낸 강간 피해 장면, 여느 백인들처럼 인종 차별주의자였던 클레어가 빌리의 아픔에 공감하는 과정 등 200년 전 고통이 날 것처럼 전해온다.

〈운디네〉ⓒ엠엔엠인터내셔널

  안데르센 동화의 모태가 된 물의 정령 설화를 현대 도시 베를린에 옮겨온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운디네〉도 있다. 인간 남자와 결혼하면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남자가 배반할 경우 그를 죽이고 호수로 돌아가야 하는 운디네의 비극을 사랑과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결말을 보여준다. 페촐트 감독의 전작의 주연 파울라 베어, 프란츠 로고스키가 다시 뭉쳐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파울라 베어가 은곰상-여자연기상을 받았다. 극중 연인들의 삼각관계는 신화를 잊어가는 도시 베를린의 건설사와도 절묘하게 겹쳐진다. 비정규직, 단기임대, 난민문제 등 많은 것을 손쉽게 소멸시키는 현대사회의 기억법을 곱씹게 만드는 수작이다.

나원정

《스크린》 《무비위크》 《맥스무비 매거진》 《매거진M》 등 영화잡지를 거쳐 지금은 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 영화의 안과 밖을 들여다보는 게 ‘일’이자 ‘취미’인 성공한 덕후다. 

 

* 《쿨투라》 2021년 2월호(통권 8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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