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
[드라마 월평]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
  • 김민정 (드라마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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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 tvN
Ⓒ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 tvN

  먼저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오빠, 미안해.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이하 <일억 개의 별>)을 볼 때 몰입하기 힘들었다. 남매간의 사랑 이야기라는데 자꾸만 현실 속의 오빠가 떠올랐다. 배우 서인국과 이미지 불일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오빠와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한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낯선 풍경이었다. 배우 문근영이 ‘국민 여동생’으로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 사람들은 여동생의 실체를 모른다며 남몰래 상처받은 표정을 짓던 그 오빠가 아니던가. 장담컨대, ‘나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대사는 분명 여동생이나 누나가 없는 남자일 확률이 높다.

  <일억 개의 별>은 동명의 인기 일본드라마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줄거리가 이미 노출되어 있다. ‘괴물’이라 불리는 위험한 남자와 그와 같은 상처가 있는 여자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뒤늦게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 주인공은 사실 남매다. 드라마 자체가 스포일러인 셈이다. 드라마 제작발표 당시 오빠와 여동생의 사랑이라는 소위 막장 설정 덕분에 꽤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남매간 사랑의 원조를 굳이 따지자면 일본보다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가을동화>(2000)의 남녀 주인공은 병원에서 뒤바뀐 운명 탓(덕분)에 남매로 자라다가 나중에 남남이 되어 다시 만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일드 <일억 개의 별>보다 2년 앞서 방영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는 남매였다가 나중에 연인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인이었다가 나중에 남매가 되는 것이다.

  남매간의 사랑 말고도 <일억 개의 별>은 제작 당시 또 하나의 벽에 봉착해 있었다. 바로 비극적 결말이다. 남매간의 사랑으로 시작한 드라마는 남매의 죽음이라는 파격적인 결말로 끝난다. 때문에 한국에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과 함께 큰 이슈 몰이를 했다. 첫 방송을 마치고 드라마 제작진은 “아직 결말은 미정이다. 어떤 결론을 그려낼지 제작진이 고민을 거듭하고 있고 현재까지도 논의 중이다.”라고 따로 의견을 발표하기도 했다.

  자고로 한국드라마의 미덕이란 마지막 회에 모든 갈등이 갑자기 해결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게 뭐야, 순 억지 아니야. 이렇게 시청자들이 불평하더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게 해주는 배려와 너그러움이랄까. 그런데 <일억 개의 별>의 남녀 주인공은 비극적 사랑을 하는 것도 부족해 서로 죽고 죽이는 ‘죽음의 뫼비우스 띠’에 의해 희생되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 tvN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 tvN

  특유의 한국적 정서 운운하며 일본 드라마 리메이크에대한 우려가 많았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드라마주인공의 잔혹사’가 있다. 소지섭과 조인성 그리고 하지원 주연의 <발리에서 생긴일>(2004)은 엇갈린 사랑 때문에 절망한 남자 주인공이 다른 두 남녀 주인공을 죽이고 자살하는 독특한 결말로 화제를 모았다. 일본드라마는 강렬하고 자극적이고 한국드라마는 순수하고 밋밋하다는 인식은 그러니까 편견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담대하며 파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억 개의 별>을 리메이크한 한국 제작진은 드라마 결말을 바꾸는 초강수를 두었다. 남녀 주인공은 모두 죽지만, 남매는 아니었고 서로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도 않는다. 남매‘처럼’ 가까운 사이였다는 설정으로 천륜을 건드리지는 않는 선에서 <가을동화>식으로 아름답게 마무리 짓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시청자들은 이럴 거면 왜 리메이크를 한 것이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정확히는 얼음같이 화를 냈다. 한 자리 숫자의 저조한 시청률이 차가운 무관심의 결과였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혹은 조용하게 드라마는 사람들의기억에서 지워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꾸 김무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배우 서인국을 개인적으로 좋아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첫사랑의 추억처럼 아른거려 수시로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냉소적인 표정으로 목숨 건 내기를 즐기는 모습도, 사랑에 빠져 옥탑방 좁은 평상에 연인과 구부정하게 누워있는 모습도, 세상의 모든 절망에 짓눌린 듯 터벅터벅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도 그는 너무나도 ‘김무영’이었다.

  역시 인생이란 건 길고 짧은지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일까. <일억 개의 별>은 문화장벽을 고려해 설정을 변경한 덕분에 의외의 지점에서 깊은 여운을 만들어낸다. 원작 일본드라마가 남매라는 설정으로 ‘김무영과 유진강’의 러브스토리가 중심이었다면 리메이크된 한국드라마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는 김무영의 인생스토리가 드라마를 관통한다. 결말이 바뀌면서 드라마의 무게중심이 ‘김무영’이라는 ‘평범한 개인’으로 이동한 것이다.

  김무영은 유진강과 우여곡절 끝에 연인이 되지만 여러 차례 위기에 직면한다. 그런데 그 문제 상황마다 고민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김무영의 몫이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의 오빠라는 것을 알고 그는 분노한다. 하지만 그 오빠 유진국이 유진강을 사랑으로 입양해 키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그를 용서한다. 하지만 유진강의 친부모님을 죽인 것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다시금 절망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아내를 찾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함께 있던 유진강의 부모님까지 죽이게 된 것이다. 숨은 진실이 계속 밝혀질 때마다 김무영은 혼자 고민하고 아파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 tvN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 tvN

  “나한테 너는 그냥 너야.”라며 힘겹게 사랑을 지켜나가던 어느 날, 김무영은 자신과 그녀가 남매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굳은 결심으로 그녀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숨긴 채 헤어지려 하지만 그녀에게 그것을 폭로하겠다는 장세란을 죽이게 되면서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드라마의 절정은 바로 이 지점이다. 원작과 리메이크가 갈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 두 사람은 남매가 아니었고 남매처럼 서로 아끼던 사이였다는 진실을 그가 뒤늦게 알게 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그의 손에서 떠나간다. 한 여자를 사랑한 대가가 살인자라니!오히려 남매라고 믿었을 때, 그러니까 지킬 것이 있었을때 그는 덜 불행했을지 모른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지루함”이라던 김무영의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만큼 카오스로 치닫는다. 결국 그는 “너무 화가 나요. 뭔가가 나를 너무 가지고 놀아서”라고 절규하며 “인생을 여기서 리셋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깊은 체념에 빠진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고 푸시킨은 이야기했지만,1799년생 老 시인의 시에서 우리가 깨닫는 건 오래전부터 삶은 우리를 계속 배신해왔구나, 라는 깊은 탄식뿐이다. 영화 <박하사탕>의 유명한 대사 “나 돌아갈래”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배신의 상처가 있지 않은가.

  인생 리셋. 이보다 슬픈 고백은 없다.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이 실패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극악의 상황에서 인간은 과연 선함을 유지할 수있을까. 설사 그가 악해진다고 해도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고통받는 인간의 대명사인 구약성경의 욥은 그래도 김무영보다는 한결 은혜로운 삶을 살았다. 절대 목숨은 건드리지 말라는 신의 엄명 덕분에 사탄의 시험은 그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재산을 빼앗는 것에 그친다. 나중에 시험에 통과한 욥이 신으로부터 몇 배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무영은 얄궂은 운명의 장난을 원망할 틈도 없이 장세란의 아버지에게 살해당한다. 그것도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일억 개의 별>은 끝없이 추락하는 김무영의 인생을 통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선한 의지가 아니라 ‘애도의 시간’인지 모른다. 충분히 슬퍼하고 여유롭게 위로할 시간. 우리는 슬픔에 너무나 인색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은 그래서 꼭 ‘일억 개’여야 한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 오늘도 ‘별 헤는 밤’이 깊어간다. 김무영은 애써 눈물로 지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김민정
이화여자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창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에서 스토리텔링콘텐츠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저서로 드라마 인문교양서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 소설집 『홍보용 소설』, 이 사람 시리즈 『한현민의 블랙 스웨그』 등이 있다.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무한한 관심으로 20여 개국을 발로 돌아다녔으며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들을 가슴에 품은 채 살고 있다.

 

 

* 《쿨투라》 2019년 4월호(통권 5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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