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선 시인의 시로 만난 별들] 감독 임권택
[장재선 시인의 시로 만난 별들] 감독 임권택
  • 장재선
  • 승인 2019.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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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에게 딴죽 걸지 말라

장재선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어
막노동판에서 돈을 벌면
술만 마시던 청춘을 지나왔다고 했다

빵처럼 영화를 찍던 시절에
성공할 리가 없는 것을 하면서도
포기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바람이 부는 만큼 드러누웠다가도
바로 일어서는 풀
그렇게 한평생을 다스렸다고 했다

서양 것을 어설피 흉내 내지 않고
내 것을 제대로 하기 위해
부대끼고 또 부대끼며 살았다고 했다

늙어 영화 만든다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즈그들 일이나 잘하면 좋겄다며
현역에게 딴죽 걸지 말라고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라고 그를 칭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2015년 102번째 연출 작품 <화장>을 발표한 이후에도 계속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영원한 현역.

  그의 대표작들은 한국인의 전통적 정한情恨과 정신적 개성을 유려한 영상으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러나 한국 대표 감독으로서 인류보편적 정서를 다루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를 만났을 때 이에 대해 묻자 특유의 말투(어눌한 듯 하지만 문어체의 유장함이 남는)로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21세기 기호에 맞는, 그런 기대치에 근접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좋은 일이죠. 그러나 나는 기왕에 해 왔던, 한국인의 문화적 개성을 담아 내는 일을 충분히 잘했느냐는 문제와 늘 부대끼고 있어요. 우리의 아름다움이나 흥을 담아내는것만 해도 완벽하게 되는 일은 아닌데, 분수 넘치는 욕심으로 어설픈 것을 이도 저도 아니게 담아내선 안 되고, 내가 해내기 쉬운 쪽으로 좀 더 완전하게 해내 놓고….”

  그는 전남 장성군에서 태어났다. 1950년 광주의 한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아버지의 좌익 활동으로 인한 도피와 자수, 그리고 어머니의 자살 기도등으로 사실상 학업을 중단하고 만다. 

  “동족끼리 좌우익으로 나뉘어 지구상에서 그런 원수가 없이 싸웠던 시대예요. 초등학교 다닐 때 빨치산 잡아다가 개천에서 총살을 집행하니까 오라고 해서 구경을 가야 했을 정도였어요. 우리(가족)는 고모부가 광주 경찰서장을 하고 있었으나 좌익이 많아서 그쪽으로 몰렸어요. 그런 수난의 세월 한가운데를 겪다가 집을 뛰쳐나왔어요.

  그는 19세 때인 1953년 가출해 당시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가서 막노동 등을 했다. 영화계에 들어간 것은 군화 장사를 하다가 만난 중개상들과의 인연 덕분이었다. 군화 중개상들이 서울에서 영화사를 차린 후 그를 불렀다. 그는 단지 먹고살기 위해 영화판에 들어갔다. 제작부에서 소품 담당을 하다가 연출부가 됐다. 7년 정도 어깨 너머로 연출 공부를 하다가 1962년 26세에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만들어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는 1970년대 중반까지 찍은 70여 편의 영화에 대해서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든 작품이라고 자평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만든 <잡초>, <증언> 등은 영화를 통해 인생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그의 열망을 담고 있다.

  1981년 <만다라> 이후 국내외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86년작 <씨받이>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받았다. 1988년엔 <아다다>가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신혜수)을,1989년엔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수상했다.

  1990년 이후에는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가 연이어 한국 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 1993년<서편제>로 상하이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주간’이 설정되기도 하였다. 2000년에 <춘향뎐>이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으며, 2002년에는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칸에서 감독상을 받은 그해에 대한민국예술원회원이 됐다. 2007년 부산의 동서대는 그의 이름을 따서 임권택영화예술대학을 만들었다. 

  그가 노년까지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후배들의 호오가 엇갈린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대한 애정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경외를 표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임 감독의 일상과 영화 현장을 담은 두 개의 다큐멘터리 <녹차의 중력>과 <백 두 번째 구름>을 만들어서 그 경외를 전한다.

  2019년 베를린국제영화제는 디지털로 복원한 임 감독의 1980년 작 <짝코>를 클래식 부문에 초청했다. 그의 현역성을 국제적으로 인정해줬다고나 할까.

  그가 평소에 한없이 부드럽고 섬세한 성정의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하면 그게 단순한 인사말이라도 꼭 직접 답을 하는 성품이다. 여기저기서 찾는 경우가 많은 사람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 작업 내용에 대한 비판도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가 노년에도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 일각에서 회의적 시각을 보내는 것에는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영화를 갖고, 완성도 면에서 찢어발기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아요. 그밖의 외부적인 것 갖고 이야기하는 것은…. 즈들 일이나 잘할 일이지….”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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