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오늘의 영화 - 낮술] 단돈 일천만원으로 빚어낸 '작은 거인'
[2010 오늘의 영화 - 낮술] 단돈 일천만원으로 빚어낸 '작은 거인'
  • 정지욱
  • 승인 2010.09.1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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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

2009년 벽두부터 스크린에 질펀한 술판이 벌어졌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애비 애미도 못 알아본다’는 다름 아닌 낮술이 스크린 가득히 거침없이 펼쳐진다. 홀로 여행을 떠난 남정네, 그 남정네가 만난 여인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하게 펼쳐지는 남정네의 여정과 낮술에 취한 이들의 발칙한 속내가 속속들이 까발려진다.

나도 남성이다. 여성들의 심리는 몰라도 여성보다 남성의 심리는 조금 더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어두운 극장 한켠에 앉아 영화를 보면서, 여느 때 같으면 옆자리의 동행했던 여인네의 손을 언제쯤 잡을까? 혹여 귓불에 슬쩍 콧기운이라도 불어볼까를 궁리했겠지만 이날은 나의 속내를 들킬까봐 전전긍긍 옆자리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봤고, 그녀 모르게 숨죽이며 은밀히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할 일 없이 키득거리듯 혁진을 위로하는 술자리에서 시작된다. 왁자지껄 낮술을 마시며 친구들은 실연당한 혁진을 위로한다. 동생과 같은 이름의 애인에게 실연당한 혁진에게 ‘전화번호부를 뒤져라’라는 말과 술잔을 거드는 것이 위로의 고작이다. 이들의 공허한 위로는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제의, 혁진이 못 이기겠다는 듯 동참하는 순간 모두가 함께 든 소주잔 속에 빠져들며 관객들마저 낮술에 취하게 해버린다.

지난밤 공허했던 술잔처럼 정선터미널에 도착한 혁진의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때 맞춰 선다던 정선장터엔 개미 한 마리 볼 수 없었고, 손님 없는 식당에선 곤드래밥 대신 수구레국밥에 소주잔이 고작인채 불안한 여행은 시작된다. 어렵게 찾아간 펜션에서 만난 미모의 옆방 여성에게 홀리고, 동성애 남성을 만나 차마 말 못할 경험을 한다. 더욱이 개성 넘치는 한 여성에겐 욕지거리를 얻어먹으며 황당한 경험을 맛보게 된다. 결국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 덕에 무사히 귀경하려는 찰나 그 끝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려 한다.

남성들은 대부분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또 다른 이성을 꿈꾼다. 아니 어쩌면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국정원’처럼 여자 친구를 앞에 두고 지나가는 여인을 흘끔거리거나, 집안에 있으면서도 다른 이성을 끊임없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 남성일 것이다. 그럴진대 실연의 아픔을 지닌 남성이 새로운 상대를 만들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펜션 옆방의 미모의 여인을 향한 헛된 욕망, 갑자기 나타나 술 한 잔 하자는 여인의 달콤한 속삭임을 이겨내지 못한 것은 유난히 의지가 약해서도 아니며 지극히 평범한 남성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또한 보다 덜 아름다운 여성의 지분거림을 거절하는 것은 우성인자만을 추구하려는 남성들의 당연한 본능이다.

영화 내내 주인공 혁진은 소주를 마시며 지낸다. 영화의 시작부터 그는 친구들과 낮술을 마시며 취한 상태로 일관한다. 낮술은 남성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됐다. 낮술 때문에 여행을 떠나게 됐고, 낮술 때문에 옆방 여인에 욕망을 품게 됐고, 배반당하게 된다.

그가 술에서 깨어 있던 순간은 정선으로 향하던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과 어쩌면 새로운 여행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아니 100%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을) 마지막 장면뿐이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엔 낮술이란 매개체 필요 없이 남성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미 며칠째 계속되며 실패를 되풀이했던 그의 욕망은 그것이 달성될 때까지 자연스럽게 지속될 기세다. 영화는 그렇게 적나라하게 남성성을 보여주며 관객의 키득거림을 유감없이 유도해냈다.

ⓒ진진

혁진이 정선터미널과 강릉행 버스에서 만난 란희는 남성적 시각에서 덜 아름다운 여인이다. 첫 만남이었던 정선 터미널에서 사진을 부탁하는 그녀의 풍모가 어쩌면 남성적이었기 때문에 이미 관객들의 그녀에 대한 선입견은 시작됐다. 점차 견고하게 쌓아지기 시작한 선입견은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았고, 결국 버스에서 빈자리가 그득함 혁진 옆에 앉으며 지분대는 품새에 모든 관객들은 넉다운되기 일보 직전에 이른다. 하지만 당신 아는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여행을 떠난 여인이 맘에 드는 남성을 꿈꾸는 것이란 결국 남성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결국 ‘홀로 여행을 떠난 수컷이나 암컷이나 다를 게 하나 없다’는 감독의 가시 돋친 풍자가 여기에 담겨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남성적인 시각이 드러나기도 한다. 강릉에 도착한 이후 곤란에 처한 혁진을 국도에서 만난 란희의 행동은 자신이 지닌 핸디캡을 한순간에 만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차 없이 차버린다. 그녀는 어느새 복수의 화신으로 변해 있다. 심지어 선배의 펜션에서 볼일을 보는 혁진에게‘개새끼’라 욕하고, 잠든 혁진의 꿈에 나타나 목을 조르며 가위 눌리게 하는 그녀다. 남성과 여성을 떠나 누구나 자신이 가진 핸디캡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헌신짝 차버리듯 버릴 수는 없다. 게다가 복수의 화신으로 화해 다시 등장한 것은 덜 아름답다는 견고한 선입견을 쌓은 지극히 남성적인 시각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혁진은 ‘지혜’라는 여동생이 있고, 그녀가 사랑했던 여인 또한 ‘지혜’다. 누이콤플렉스가 누나에 대한 남성의 로망일진대 여동생에 대한 남성의 로망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고난에서 구해주고 선배의 펜션에 함께 온 친구 기상이 ‘지혜’와 사귄다는 고백을 듣고 혁진은 대뜸 ‘(함께) 잤냐?’고 묻는다. 그리곤 ‘내겐 안줬다’며 화를 낸다. ‘함께 잤냐?’는 것이 ‘사랑하느냐?’보다 먼저 궁금하다. 결국 그 ‘지혜’가 그 ‘지혜’가 아닌 동생 ‘지혜’라는 사실을 알고 오빠의 자리로 돌아와 다시 주먹을 날린다. 이처럼 영화는 지극히 남성적이며 현실적인 상황을 보여 낸다.

ⓒ진진

영화를 관람하며 여성관객들은 불쾌할 수 있다. 처음 만난 여성의 달콤한 한마디에도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위험천만한 모습, 외모로 여성을 판단하고, 잠자리 여부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남성에 분개 할 것이다. 혁진과 친구들의 모습에서 약속을 안 지키고 공수표 날리기를 밥 먹듯이 하는 남자친구 또는 남편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속물이라고 치부하던 찌질한 남성의 속내를 아낌없이 보여준 감독에게 열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성적인 시각에서 솔직 담백하게 그려졌기에 오히려 여성관객들에게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음악은 기획사마다 퇴짜요, 써보는 시나리오는 공모전마다 떨어지는 마치 영화 속 주인공 혁진처럼 하는 일마다 꼬이는 인생을 살던 노영석 감독은 어머니의 냉면가게에서 일을 도우며 지내던 어느 날 어머니께 1000만 원을 빌려 한겨레문화센터 동기들과 한편의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제작비 절감을 위해 각본, 연출, 미술, 음악, 편집은 물론 횟집주인역까지 1인7역을 소화했고, 동료들에게 돈 대신 강원도 여행과 술을 무한정 준다는 조건을 내세워 13일 동안 10회 촬영으로 만들어낸 작품이 〈낮술〉이다. 2008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JJ Star상과 관객평론가 상을 받으며 세상에 알려진 이 작품은 그 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토론토영화제 등에 초청됐고, 개봉 후에도 프랑스 브졸영화제, 홍콩영화제 등에 초청되며 해외에서 크게 인정받았다.

많은 이들이 노영석 감독의 영화 〈낮술〉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비견해 얘기한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성들이 먹물 냄새 팍팍 풍기는 찌질한 지식인들에 국한된 것과는 달리 〈낮술〉에서 만나는 찌질한 남성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평범한 젊은이들이며, 이들이 꿈꾸는 소박한(?) 로망을 보여준다. 비록 초저예산 영화답게 야간 촬영과 실내촬영을 최소화시켜가며 탄생시킨 보잘것없이 초라한 작품이었지만,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출, 그리고 부족함 없는 연기의 삼박자가 어울려 또 다른 홍상수의 탄생을 보여줬다. 아니 영화 <낮술>은 새로운 홍상수가 아닌 당당한 노영석을 탄생시킨 작은 거인이라 하겠다.


정지욱 영화평론가. 일본 ReWORKS 서울사무소 편집장,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 《동아일보》신춘문예 심사위원 등 역임. nadesiko@unitel.co.kr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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