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오늘의 영화 - 김씨표류기] 로빈슨 크루소의 통쾌한 뒤집기
[2010 오늘의 영화 - 김씨표류기] 로빈슨 크루소의 통쾌한 뒤집기
  • 이재성
  • 승인 2010.09.1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네마서비스

한강 투신 자살을 감행했다가 밤섬에 표류하게 된 신용불량 남자(정재영)와, 극단적인 자폐증으로 자기 방에 갇혀 사는 히키코모리 여자(정려원)의 극적인 만남. 로빈슨 크루소를 연상시키는 영화 포스터가 관객들에게 ‘안 봐도 비디오’라는 인상을 심어준 탓일까. 〈김씨 표류기〉는 마케팅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지난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가장 아까운 영화다. 마케팅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니, 각설하고.

주지하다시피, 이 영화의 감독은 〈천하장사 마돈나〉의 이해준이다. 각본가로 출발해 이해영 감독과 공동 크레딧을 올리게 된 작가 출신 감독. 〈김씨 표류기〉는 그의 첫 단독 연출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글솜씨만이 아니라 연출력까지 입증한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독특한 매력에 반했던 관객이라면 〈김씨 표류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하장사 마돈나〉와 마찬가지로 진부한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단 하나도 없다. 로빈슨 크루소의 재현일 거라는 선입견은 영화 시작 5분이면 사라진다. 영화는 로빈슨 크루소의 통쾌한 뒤집기다. 예를 들어 남자가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피우려고 하는 익숙한 장면. 그러나 남자는 전통적인 방법을 쉽게 포기해버리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물론,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지고. 이런 반전 혹은 뒤집기가 장면마다 계속된다.

이 영화의 심리 묘사는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치밀함과 섬세함을 자랑한다. 자살하려던 남자가 무인도에 버려지자 살려고 발버둥 치는 아이러니. 유람선을 향한 구조 요청, 배터리가 달랑달랑한 휴대전화로 보내는 SOS가 실패하자, 남자는 사회에서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다시 죽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갑자기 꾸르륵꾸르륵, 뒤가 급해져 자살을 미루고 만다. 그리고 볼일 보던 중 맛보게 되는 사루비아. 사루비아가 주는 달콤한 행복감은 살고싶다는 의지에 불을 지핀다.

사루비아… 먹어 본지 백 년은 된 거 같습니다… 달콤합니다… 눈물이 날 만큼 달콤합니다… 삶이… 달콤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백 년만에 해봅니다….

이 영화는 독백의 영화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대사가 거의 없다시피한 이 영화에서 독백은 등장인물의 심리 변화를 묘사하는 강력한 무기이자, 관객들에게로 놓여진 유일한 통로이다. 이 영화가 작품적으로 성공했다면 그 절반은 독백의 성공일 것이다. 재치와 유머, 반전의 미학이 몇 줄짜리 독백에 벼려 있다. 이를 테면 사루비아 이후 최초의 먹거리, 버섯을 발견한 순간. 독버섯일지도 모를 거라고 걱정하는 남자의 독백.

뭐가 대순가요… 먹어서 죽기라도 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지체 없이 입안에 버섯을 구겨 넣는 남자. 우걱우걱 씹는 무표정 위로.) 뭐든지 오케입니다… 갑자기, 삶이 편리해 집니다.

영화는 도심의 무인도에 홀로 버려진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제시한다. 그 과정은 차라리 ‘진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신성해 보인다. 사루비아→식수→식량(버섯)→물고기→조류로 이어지는 남자의 먹거리 진화는 가히 서커스 수준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상상력의 끝을 실험하려는 듯 끝까지 밀고가는 뚝심이 가열차다.

어류보다 조류가 맛있습니다. 진화라는 건 어쩜,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요… 그럼 인간은 얼마나 맛있을까요… 인간 중에 나는 어느 정도로 맛있는 존재일까요.

생존 문제 해결을 위한 점층법의 현란함 끝에 그가 도착한 난관은 심심함이다. “더이상 바랄 게 없는 완벽한 심심함”에 무료해 하던 그에게 짜파게티 스프가 눈에 띄고, 스프를 비벼먹을 수 있는 면발을 만들기 위해 그는 ‘밀 재배’프로젝트에 나서게 된다. 그가 모래밭에 써놓은 글자도 ‘HELP’에서 ‘HELLO’로 바뀐다. 무인도 안에서 살기로 작심하자 인간 본연의 소통에의 의지가 싹튼 것이다.

ⓒ시네마서비스

그걸 발견한 또 하나의 갇힌 자는 밤섬 건너편 아파트의 히키코모리 여자. 얼굴에 난 흉터 때문인지 몇 년째 바깥 출입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엄마 아빠와도 절대 얼굴을 마주치치 않는 특A급 자폐증 환자. 대신 그는 인터넷 세상에서 클릭 한번으로 다른 사람의 사진을 간단히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부단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 중이다. 그가 바깥 세상을 바라볼 때는 오직 하나, 달 사진을 찍기 위해서. 달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달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으면 외롭지 않으니까.”외모의 상처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인해 스스로 외로움을 선택한 여자. 여자가 낮에 바깥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시간은 상반기 한 번, 하반기 한 번, 일 년에 두 번 하는 민방위 훈련. “이 순간만큼은, 세상은 아무도 없는 달과 같”아지고, “기분이… 달의 중력처럼 6분의 1로 가벼워”진다. 민방위 훈련 중의 바깥 세상을 카메라에 담던 여자는 남자의 ‘HELP’를 발견하고 그것이 ‘HELLO’로 바뀌는 걸 본다. 그 필사적인 대화 의지에 리플을 달기 위해 여자는 ‘백 년만의’외출을 감행한다. 와인병에 쪽지를 담아 전하는 여자의 메시지는 ‘HELLO’에서 ‘FINE, THANK YOU AND YOU?’로 바뀐다. 남자와 소통하기 시작한 여자는 엄마에게 더이상 문자를 전송하지 않고 짧게나마 말을 하기에 이른다. 남자와의 (간접) 대화가 엄마와의 (직접) 대화로 이어진 것이다.

이 영화는 또한 마이크로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드문 사례로도 기록될 것이다. 여자의 카메라에 잡힌 세상이 대개 망원 렌즈로 가까이 찍기를 시도한 것들이거니와, 예를 들어 남자가 품는 희망의 근거가 되는 짜파게티 스프의 성분을 읊는 대사를 보자.

“분말짜장… 정백당… 텍스트린… 카라멜 색소… (탄식) 아, 카라멜… 볶음 조미 소맥분… 맛있는 향미증진제… (신음에 가까운) 아아, 씨 졸라 먹구 싶은 효소처리 스테비아… 12그램입니다… 이 12그램의 중량감에… 압사당할 지경입니다. 감기약처럼 이 가루를 입속에 털어넣으면… 이 욕망이 감기처럼 사라질까요….”

ⓒ시네마서비스

먹거리를 향한 점층법의 향연은 어느새 점강법으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희망소비자가격 750원. 남자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글자의 일부를 가린다. 남는 글자는 희망. 인간은 돈, 옷, 집 없이 살 수 있지만 희망없인 살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최악의 궁지에 몰린 두 남녀가 나즈막히 부르는 최초의 희망가다. 밀을 재배하기 위해 새 똥을 모으고, 새똥을 모으기 위해 신용불량 신용카드를 꺼내 긁는 남자. 땀 흘린 자신의 몸을 핥으며 스스로 만들어 낸 짠 맛에 감탄하는 남자. “야아, 맛있다! 나는 졸라 맛있다! 세계에서 제일 맛있다!”드디어 그는 자신을 인정한다. 생애 최초의 자존감이다.

그러나 남자의 면발 만들기 프로젝트에 여자가 개입하면서 둘의 관계는 위기를 맞는다. 자장면을 향한 남자의 욕망이 너무 안쓰러워 여자가 자장면 배달을 시켜준 것인데, 남자는 그걸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짜장면은 나의 희망”이라고. 그리고 모래밭에 이렇게 쓴다. “WHO ARE YOU?”인터넷 세상에서 사람들이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고 저주의 말들을 쏟아냈듯이, 여자는 남자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될까 두려워 한다. 여자는 다시 자기만의 세계로 처박히고, 남자가 재배한 작물들은 비바람에 힘없이 쓰러진다. 희망을 앗겨버린 남자에게 찾아든 것은 밤섬을 관리하는 공익근무요원과 자원봉사 해병전우회. 드디어 남자는 섬밖으로 구조, 아니 방출되고, 그 광경을 지켜본 여자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최초로 대낮에 달리기 시작한다.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일상의 도시 풍경은 어질어질 낯설다. 관객들은 2시간 가량 남자와 여자의 공간에서 유폐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고, 사이렌에 발이 묶여 있는 버스 안에서, 여자는 극적으로 남자를 만난다. 여자는 헉헉거리며, 남자에게 말한다. “마. 이. 네. 임. 이. 즈. 김. 정. 연.” 지난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 가장 아름다웠던 라스트신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남녀 주인공의 단 한 번의 만남. 버스가 갑자기 출발하며 여자의 몸이 남자에게로 쏠리고, 우리는 단박에 긍정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다. 돈이 없는 남자, 상처 입은 여자라도 괜찮아. 참 더러운 세상이지만, 둘이 기대어 살면, 그럭저럭 버티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이재성 고려대학교 영문과 졸업. 《한겨레신문》문화부 기자. san@hani.co.kr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