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오늘의 영화 - 더 레슬러] 미키 루크에서 미키 루크로...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2010 오늘의 영화 - 더 레슬러] 미키 루크에서 미키 루크로...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 강유정(문학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10.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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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더 레슬러〉는 미키 루크에서 시작해서 미키 루크로 끝나는 작품이다. 미키 루크는 이 영화에서 랜디 더 램이라는 전설적 프로레슬러로 출연한다. 랜디 더 램은 1980년대 전성기를 맞고 조금씩 사그러드는 인생을 살다가 지금은 갑작스런 심장마비, 약물중독과 싸우고 있는 3류 엔터테이너로 전락해 있다. 이 영화는 랜디 더 램으로 시작해 랜디 더 램으로 끝나지만 공교롭게도 그 이미지는 미키 루크 배우 그 자체의 것과 너무나 꼭 닮아 있다. 내가 이 영화를 미키 루크에서 시작해서 미키 루크로 끝나는 작품으로 기억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누구나에게 인생의 전성기는 있다. 여섯 살짜리 꼬마라고 할 지라도 나름의 전성기와 슬럼프가 있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사십년 이상 살다보면 전성기와 슬럼프 사이의 진폭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크고 깊다. 인생의 꼭지점에서의 기쁨이야 두 말할 필요 없지만 인생의 저점에서 느끼는 비참함은 처참하고 비루하기 그지 없다. 랜디 더 램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더 레슬러〉가 인생의 어떤 시점 중에 저점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지금 랜디 더 램은 더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한 남자가 어떻게 초라하게 인생의 뒤편으로 사라져가는지를 링 위의 삶을 산 랜디 더 램을 통해 보여준다. 대개 스포츠 영화들이 고난과 역전을 거쳐 정상에 오르는 순간 멈춘다. 그런데 〈더 레슬러〉는 승리와 환호 이후, 20여 년이 지난 시간 다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연극이 끝나고 난 후 무대 뒤를 보여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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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런 아로노프스키가 보여주는 무대 뒤의 삶이란 초라하고 초췌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프로레슬링, 그거 짜고 치는 거 아니냐고. 맞는 말이긴 하다. 링 위에 오를 두 사람의 파트너는 오늘 어떤 방식의 경기를 치뤘으면 좋겠다고 서로 말을 건넨다. 그런데 그 내용이 “짜고 친다”라는 말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 선배님, 스테이플러 어떨까요? 스테이플라면? 네, 기계 말이에요.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 기분이 나쁘죠. 집어 던지는 건 하지 말아 주세요.

영화는 갑자기 시간을 건너 뛰어 14분 이후를 보여준다. 이 두 파트 너는 이미 피로 온몸을 휘감은 상태. 다시 영화는 14분 전으로 돌아가 그들이 왜 피투성이가 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상대는 스테이플러를 등에 박고, 유리로 내려치며, 철사줄에 눕힌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이 다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는 신문지를 자신의 얼굴에 박고 마찬가지로 깨진 유리 위를 뒹군다. 쇼라고 하기에 그들의 연기는 너무나 고통스럽다.

짜고 친다고 욕하지만 사실, 인생이란 짜고 치는 것이다. 한 남자는 집에 들어와 훌륭한 남편의 모습을 “짜고 치고”, 멋진 아버지 역할을 “짜고 치며”직장에 나가서는 유능한 재원으로서의 면모를 “짜”낸다. 누군가는 가정에서 역할을 꾸며 내고 누군가는 무대 위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링 위에서 인생을 짜고 치며 살아갈 뿐, 누구나 스스로 연출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링 위나 무대 위나, 거리에서의 삶이나 거의 다를 바가 없어진다.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생각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퇴역 레슬러의 삶이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 무대 위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여자, 캐시디의 삶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아홉 살짜리 아들을 두고 살아가는 생계형 싱글 맘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어떤 남자의 것이라도 될 수 있을 “창녀”를 연기한다. 캐시디 역시 랜디 더 램처럼 이미 환대받기 그른 노장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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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생의 마지막 즈음에 남자는 과연 어디에 정착해야 하는 것일까? 많은 영화들이 탕자로 돌아온 아버지의 뒷길에 “가족”과 “아들”의 초상화를 두곤했다. 〈브로큰 플라워〉도 〈돈 컴 노킹〉의 아버지도 그랬다. 마음 대로 인생을 탕진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삶 끝자락에는 아들이 있었다. 랜디 더 램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도 딸이 있긴 하다. 영화의 중간 부분, 딸과 아버지는 극적으로 화해하고 서로의 미래를 약속한다. 마치 환상이나 꿈처럼 너무나 쉽게 봉합된 두 사람의 간격을 하지만, 쉬웠던 만큼 허무하게 무너진다.

그는 아버지로, 평범한 잡부로, 누군가의 애인으로 다른 무대 위에 서고 싶어한다. 프로 레슬러로서 링이 더 이상 받아 줄 수 없다고 시효 만료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심장 마비가 왔고, 이제 그에게 프로 레슬링은 경고이며 위협이다. 그런데, 랜디 더 램이 갈 만한, “다른”링이 없다.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려고 해도, 다른 무대, 세상이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80년대, 미국의 팝 문화와 함께 성장하고 특수를 누렸던 미키 루크는 극중 랜디 더 램의 입을 빌어 “90년대를 증오한다”고 말한다. 사실, 미키 루크 개인의 모습은 레슬러 랜디 더 램과 꼭 닮아 있다. 지나친 성형, 약물 중독을 거쳐 미키 루크는 80년대 에로틱 필름의 대표적 섹시가이에서 헐리웃의 추물로 바뀐 지 오래다. 이미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는 인물이 되어 버렸던 셈이다.

랜디 더 램은 “난 늙어 고장난 몸밖에 없고 또 외톨이야”라고 고백한다. 이에 딸은 “당신은 더 이상 고쳐지지 않으니 고치려고 하지 말아요. 이미 고장 났어요.”라고 단절을 선언한다. 환상이나 기대와 달리 탕자가 돌아갈 만한 공간은 없다. 그가 평생을 투자한 무대가 그를 거부하자 그는 갈 곳이 없어진 셈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랜디 더 램의 고통스러운 레슬링을 예수의 수난과 비교하기도 한다. 캐시디의 입을 빌러 섹시 가이로 묘사된 예수의 고통처럼 랜디가 겪는 육체적 고통은 전시된 효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더 많은 피를 흘리고, 더 많은 피부 조직이 찢겨 나갈수록 사람들은 환호한다. 이 환호의 성질은 고통을 돈을 주고 사는 쇼비지니스 시대의 가혹함과 닮아 있다. 랜디는 그렇게 쇼비지니스 시대의 희생양으로 사라져간다.

결국 마지막 순간 랜디는 링 위에서 최후의 에너지를 불태우리라 마음 먹는다. 이 선택은 의지적이기도 하지만 결국 갈 곳 없는 퇴역 레슬러의 필연적 귀로였다는 점에서 애처롭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링 위에 오른다. 이번 만큼은 짜고 치는 “쇼”가 아니라 진짜 목숨을 걸고 하는 한판 싸움이다. 그 싸움은 인생이라는 다른 이름의 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조선일보》, 《경향신문》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동아일보》영화 평론 입선. 저서로는『오이디푸스의 숲』이 있음. 고려대학교 강사. 《세계의 문학》편집위원. noxkang@hanmail.net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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