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오늘의 영화 - 그랜 토리노] 구식 자동차 한 대로 미국의 양심을 묻다
[2010 오늘의 영화 - 그랜 토리노] 구식 자동차 한 대로 미국의 양심을 묻다
  • 임정식
  • 승인 2010.09.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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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 브라더스

엔딩부터 들여다보자. 햇빛 맑은 한낮. 반짝반짝 빛나는 구식 자동차 한 대가 해안도로를 달린다. 운전자는 동양인 소년이다. 차는 휙 지나가고, 화면은 금세 고요해진다. 고집스러운 고정 쇼트. 차도 사람도 지나가지 않는다.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한적한 도로, 건너편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 화면 속으로 낮고 경쾌한 음악이 흘러든다. 늙은 남자의 흥얼거림 같은 노랫소리다. 아련한 여운….

이 엔딩은, 흔한 풍경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에서는 다르다. 무겁고, 가슴 저릿하고, 의미심장하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시치미를 떼지만, 사실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영화는 내내 답답하다. 고집쟁이 영감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삶과 영혼이 그렇다. 화면도 마찬가지다. 어둑한 성당, 거실 혹은 지하실, 정원, 이발소, 잡초 무성한 찻길을 맴돈다. 오즈 야스지로의 카메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지막 한 장면에서 분위기가 확 바뀐다. 푸른 바다가 갑자기 등장한다. 탁 트인 화면은 처음이다. 월트의 영혼이다.

이 바다 장면은, 월트의 시점일 것이다. 살아있을 때 늘 그러했듯이,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햇살과 바람과 바다를 느리게 바라볼 것이다. 타오(비 방)가 자신이 물려준 그랜 토리노를 타고 질주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볼 것이다. 우리는 안다.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울어댄 소쩍새처럼, 월트는 이 순간을 위해 50여 년을 홀로 앓았다는 것을. 그는 왜 그리 독하게 아팠고, 어떻게 그 통증에서 놓여났을까.

죽음의 방식에 비밀이 있다. 월트는 그 죽음을 통해 용서를 빌고, 폭력을 응징한다. 월트는 몽족 갱단의 아지트에서 죽는다. 갱단이 타오의 누나인 수(아니 허)를 능욕한 것이 결정적 계기다. 월트는 갱단의 무차별 사격에 희생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차원이 달라진다. 그는 총이 없었다. 그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고, 다시 라이터를 꺼내려했을 뿐이다. 총도 없이 복수하기 위해 갱단을 찾아가다니. 무모해 보이는 이 죽음은 의도된 것이다. 참전군인 월트의‘작전’이다. 월트는 의도적으로 무기도 없이 결투를 신청하고, 당연히 패배하고, 통나무처럼 쓰러져 죽는다. 철저히 의도된, 예고된 죽음. 형식은 타살이지만, 내용은 자살이다.

ⓒ워너 브라더스

월트의 ‘작전’에는 이유가 있다. 그 뿌리를 캐려면, 세월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삶보다 죽음을 많이 아는” 인물이다. 그중 한 사건이 뇌리에 총알로 박혀 있다. 월트는 무기도 없이, 무서워 떨던 소년병을 사살했다. 훈장을 받았다. 그는 이 사실을 갱단과의 결전을 앞두고 고해성사하면서도, 평생 지은 세 가지 죄를 털어놓으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한다. 월트는 이웃집 소년 타오에게만 그 비밀을 알려준다. 타오는 소년병 또래의 동양인이다. 그래서다. 타오와 소년병은 겹쳐진다. 이어 월트는 갱단을 찾아간다. 소년병처럼 무력하게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무서워 떨지 않는다. 작전이기 때문이다. 월트가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면, 죽음의 의미와 파장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단순한 복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월트는 비무장 상태로 죽는다. 그럼으로써 오래전 죄를 스스로 처벌한다. 평생을 옥죄던 잘못에 대한 참회이자 속죄다. 또 타오와 수의 복수도 완성하고, 악의 무리인 갱단도 살인 범죄자로 처벌받게 만든다. “괴로운 건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한 일 때문이다”는 월트의 고백은 그렇게 진실성을 확보한다.

영화에서 월트가 ‘스스로’한 그 행동은, 대사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하지만 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평생 그를 짓누른다. 1972년산 그랜 토리노는 그 죄의식의 상징물이다. 그랜 토리노는 오래된 차다. 차고에 주차돼 있고, 누가 타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월트는 그랜토리노를 계속 정성들여 관리한다. 빛이 나도록 닦는다. 전쟁의 상처를, 참혹함을 잊지 않는 것이다. 월트는 독한 상처를 캄캄한 지하창고에 묻어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호출한다. 월트는 그랜 토리노를 타오에게 물려준다. 타오는 몽족 청년이다. 몽족은 베트남 전 때 미국 편을 들었다. 패전 후 베트공에게 복수당했고, 미국으로 쫓겨 왔다. 월트와 타오는 둘다 전쟁의 상처를 갖고 있다. 훈장을 준 것도 유사한 의미다. 일제차 세일즈맨 아들이나 손녀는 풍요한 자본주의의 향유자에 불과하다. 그랜토리노를 그들에게 물려주지 않은 이유다. 다시 엔딩으로 돌아가 보자. 타오는 그랜 토리노를 몰고 해안도로를 질주한다. 그랜 토리노는 처음으로 차고를 벗어나 길을 달린다. 흔한 일상적 풍경이 내포하는 의미가 가슴을 쿵 치는 이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에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여준다. 그런데도 달의 모습은 온전하게 드러난다. 놀라운 장인의 솜씨다.

ⓒ워너 브라더스

월트는 깐깐하고 까딸스러운 고집쟁이 늙은이다. 보수주의자, 인종주 의자다. 그는 멕시칸, 흑인, 동양인을 경멸한다. 그들에게 “내 땅에서 나가!”라고 소리친다. 포드사에 근무하면서 그랜 토리노를 조립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초강대국 미국의 영광을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그랜 토리노는 이제 구식이다. 아들은 일제차를 판다.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월트의 집 현관에는 성조기가 걸려 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월트는 미국 자체이기도 하다. 전쟁, 경찰국가, 경제대국, 인종주의 등이 몸에 새겨져 있다. 월트는 죽음으로 참회하고, 자신의 통증을 치료한다. 타오는 그 월트에게 “친구인 게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이로써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의도는 명확해진다. 구식 자동차 그랜 토리노가, 끊임없이 각혈하는 자신처럼 낡고 병든 미국이 다시 질주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요구한다. 물론 정치적인 시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주목할 점은, 월트가 미국 사회에서 타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참전의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다. 아내와 사별한 홀아비다. 자식들과도 불화 관계다. 엄마 장례식에 왔다가 패물만 챙겨가는 아들, 할아버지의 물건만 탐내는 손녀와 늘 삐걱거린다. 생일에도 케이크 한 쪽과 육포 쪼가리로 끼니를 때우는 초라한 늙은이다. 심지어 마을에서도 그는 이방인이다. 몽족이 주류이고, 백인은 월트 한 명 뿐이다. 타오와 수 역시 타자다. 노란 피부의 동양인이다. 그중에서도 존재조차 희미한 소수민족이다. 하지만 몽족은 그네들끼리는 서로 사랑하고 조화롭게 산다. 가족, 사회와 철저하게 격리된 월트와 대조된다.

ⓒ워너 브라더스

월트는 처음에는 몽족에게 적대적이었다. 월트가 일방적으로 혐오했고, 배타적인 자세를 취했다. 수가 거리에서 흑인 깡패들에게 당하는 걸 구해주면서 호의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이후 수는 월트를 파티에 초대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소통이 이뤄진다. 고장난 탈수기나 선풍기를 고쳐 주고, 연애 방법을 알려주고, 직장까지 알선해 준다. 꽃과 음식을 주고받으면서 교감을 나눈다. 이기적인 자식보다 “원숭이 같은” 몽족과 더 친밀해진다. 몽족과의 소통이 시작된 후, 신경질적으로 되풀이하던 월트의 침 뱉기 습관이 사라진다.

월트와 타오, 수는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말하는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들이다. 아무런 보호막도, 변호자도, 기득권도 없다. 레비나스는 “타자는 강자가 아니라 낯선 이방인의 모습으로, 비참한 이방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월트와 타오의 상황이나 그들의 관계가 그렇다. 그런데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의 가능성은, 윤리적 사건 즉 타인의 얼굴의 출현을 통해 찾아낼 수 있다. 동양인 소년 타오의 등장은 월트에게 소년병을 살해한 죄의식을 강화시킨다. 월트는 죽음으로 속죄하려 한다. 이마저 할리우드식 영웅주의라고 비판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월트는 미국 사회의 주류가 아니다.

〈그랜 토리노〉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월트라는 개인을 통해 미국의 윤리와 양심, 전쟁의 상처와 속죄, 세대 갈등, 소수민족과의 갈등과 화해 같은 어려운 문제를 무겁게 질문한다. 그 대답도 제시한다. 30년이 넘은 구식 자동차 하나로 이토록 풍부하고 두꺼운 의미를 만들어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솜씨는 압권이다. 전작들에 비해서는 말이 많다지만, 〈그랜 토리노〉의 대사는 여전히 간결하고 압축적이다. 또 불필요한 장면을 찾기 힘들만큼 집약적이다. 월트의 현재 상황, 성격, 말투, 정치적 색깔 등을 단숨에 설명하는 초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경기 초반에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노련한 싸움꾼 같다. 배우든 감독이든, 한 가지만 잘 하면 안 되는 걸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어떤 찬사의 수식어를 붙이는 일조차 사족처럼 느껴진다.

 


임정식 영화평론가. 고려대 국문과,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졸업. 〈제1회 쿨투라 신인 문화평론상 영화 부문〉 당선으로 등단. 스포츠조선 전문기자. 《청룡시네마》편집장. dada@sportschosun.com.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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