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오늘의 영화 - 디스트릭트9] 혁신과 차용 사이를 영악하게 오가는 남아프리카 발 SF
[2010 오늘의 영화 - 디스트릭트9] 혁신과 차용 사이를 영악하게 오가는 남아프리카 발 SF
  • 이상용
  • 승인 2010.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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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스타 픽처스

2009년에 도착한 수많은 SF 영화 중 대중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바타〉이지만, 〈디스트릭트9〉이야말로 SF의 본령을 건드리는 영화로 꼽기에 충분하다. 닐 블롬캠프 감독은 자신의 단편에서 보여준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3천만 달러의 적은 예산으로 민감한 장편을 만들어 냈다. 이 영화의 무대는 SF의 단골 지역인 뉴욕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이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SF 장르의 종말적인 분위기나 외계인의 침입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일종의 ‘돌려 말하기’였고, 이를 둘러싼 SF의 독해는 B급 장르인 SF가 동시대를 향한 가장 예민한 발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매카시즘이 만연했던 1950년대 할리우드 SF 영화에 대한 독해가 보여주듯이 SF는 ‘science fiction’일 뿐만 아니라 종종 ’social faction’이기도 한 것이다.

블룸캠프 감독은 자신의 단편 〈얼라이브 인 요하네스버그〉를 확장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단편 영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우주선이 느닷없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지구에 불시착한 흉악한 외계인들이 초라한 거주지에 머물고, 주민들은 “그들이 오고 나서부터 우리는 덜 안전해졌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것은 고스란히 장편에도 이어졌다. 〈디스트릭트9〉이라는 제목은 196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실제로 존재했던 백인전용거주지인 ‘디스트릭스6’를 떠올리게 하며, 요하네스버그는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SF의 단골 캐릭터인 외계인이 인종에 대한 비유라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시도가 아니지만 〈디스트릭트9〉처럼 지역과 인종을 노골적으로 건드리는 출발은 오늘날의 SF가 취하는 대중성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구의 상공에 도착한 후 이십 년 이상이 흐른 뒤 쓰레기 더미로 쌓여있는 지역에 거주하게 된 외계인들은 생존을 위협받는다. 하지만, 시민들은 외계인들로 인해 자신들의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디스트릭트9〉은 간결한 서사와 지구인에서 외계인으로 변화해 가는 주인공의 모험을 통해 현실의 비극을 장르적 우화로 표현해 내고 있다. 영화 속에는 크게 네 부류가 등장한다. 하나는‘프런’이라 불리게되는 외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펼치는 민간군사기업 MNU가 있다. 흥미를 더해 주는 것은 MNU의 지시를 따르는 남아공의 시민들과 외계인들에게 생필품을 팔며 돈을 모아들이는 나이지리아의 폭력조직이다. 이들을 통해 영화는 ‘MNU - 시민’ vs ‘프런 - 나이지리아 갱’이라는 대립축을 형성한다. MNU는 나이지리아 갱에 대해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일부 언론인과 시민운동을 펼치는 이들을 제외하고 시민에 속한 이들은 MNU의 일방적인 발표를 수용한다. 결국, 이 영화의 네 축은 대립과 정치가 민감하게 작동하는 현시대의 어느 곳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주요한 도식을 보여주는 셈이다.

ⓒ트라이스타 픽처스

영화에서 흥미로운 용어 중 하나는 외계인들을 지칭하는 ‘프런’이라는 말이다. 프런은 한 사회에서 배제되는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며, 지난 세기에 배제된 자들은 종종 유대인이나 무슬림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화의 초반부에 프런에 대한 설명은 〈디스트릭트9〉의 정치적 구별 속에서 SF 영화의 다양한 요소를 결집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명민한 설정이다. 이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인물이 주인공 비커스이다. 샬토 코플리가 연기한 비커스는 외계인을 새로운 집단거주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책임자 역할을 맡게 된다. 그것은 소수 외계인의 저항과 이를 향한 폭력을 행사하는 합리화의 과정이고, 외계인들의 사인을 받는 과정은 인종차별정책이 펼쳐진 지난 세기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비커스는 이 과정에서 외계인의 물건을 건드리다가 감염이 되고, 이로 인해 그의 한쪽 팔이 외계인처럼 변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들통나면서 비커스는 MNU로부터 분리되고, 다른 외계인들과 마찬가지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그는 미디어의 발표를 통해 외계인과 성관계를 맺었다고 오도되는 존재로 변모한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으로 변화하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비커스는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외계인들의 생활방식과 먹이를 선택하게되고, 가족의 배신을 경험하면서 결국 크리스토퍼라 불리는 외계인과 협력을 하기로 결심을 한다.

외계인를 관리하는 존재가 외계인의 편에 서게 되는 과정은 꽤 흔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비커스와 외계인 크리스토퍼의 유대 관계 속에는 흥미로운 읽을 거리가 많다. 비커스와 크리스토퍼는 함께 우주선을 출발시킬 연료가 담긴 통을 찾기 위해 MNU 본부를 습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커스와 그의 아내의 관계는 철저한 배신의 드라마로 끝을 맺고, 외계인 크리스토퍼와 그의 아들은 끝까지 신뢰를 보여주는 가족관계로 제시가 된다. 이것은 기존 SF의 서사와 거리를 두겠다는 〈디스트릭트9〉의 목표가 뚜렷하게 보이는 전개방식이다.

ⓒ트라이스타 픽처스

인류의 몰락을 외치는 〈2012〉와 같은 영화는 최후의 순간에 인간의 휴머니즘을 강조함으로써 그래도 인류에게 희망이 있음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가치의 회귀로 끝을 맺고 있다면, 〈디스트릭트9〉은 더 이상 휴머니즘에 재고할 가치가 없다는 결별을 선언하는 셈이다. 하지만, 모든 장면들이 과감함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디스트릭트9〉의 기본적인 틀은 동시대 SF의 고민과 상상력을 흡수하고 있다. 가령 쓰레기더미 속에서 살아가는 외계인의 모습은 〈월E〉와 같은 픽사 애니메이션에서도 보아온 것이다. 더 비참한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미래가 쓰레기 더미와 함께 할 거라는 상상력 자체가 이채로운 것은 아니다. 또한, 영화 초반부에서 보여지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화면은 〈클로버 필드〉와 같은 영화들이 활용한 사례이다. 단순하게 스타일 하나만을 두고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스타일과 소재의 측면에서 〈디스트릭트9〉은 근래에 보여진 형식들을 영리하게 차용하는 상상력의 종합선물이다.

그 속에서 〈디스트릭트9〉은 현실을 끊임없이 호명해 낸다. 영화의 초반부에 과거 인종분리정책을 겪은 흑인들이 외계인에 대한 혐오감 섞인 인터뷰를 날리는 것이야말로 의미심장한 출발점이다. 소외와 격리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만일 〈디스트릭트9〉이 남아공의 미래에 관한 영화라면 과거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지위를 이제는 외계인이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결말에 예고된 3년은 반복되는 인간의 역사의 영원회귀를 보여주는 셈이다. 3년 뒤에 크리스토퍼와 그의 외계인 아들이 돌아온다면 그때는 인간들이 프런이라 불릴 지 모를 일이다.(우리는 이미 〈혹성탈출〉 시리즈를 통해 이것을 보았다.)

또한, 생체실험 장면이나 학살 장면의 담담함은 비극적 현실을 아주 건조한 톤으로 재현하고 있다. 생체실험을 거부하던 비커스는 돼지고기 덩어리를 향해 무기를 쏘아대다가 외계인을 향해 쏘아대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반복해서 말한다. “그냥, 돼지고기 덩어리에 쏘게 해주세요.”이 끔찍한 순간은 일상화된 장면의 연출 속에 흘러가 버린다. 그것은 〈디스트릭트9〉이 보여주는 방식이 무감각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만연한 폭력에 대한 성찰을 구현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집단과 집단 사이의 폭력은 널려 있고, 그것을 영화적으로 재현한다는 것마저도 무감각해진 상황 속에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동시대 SF 영화의 폭력적인 장면들은 더 이상 비명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황홀함으로 대체가 되지 않는가. 〈아바타〉를 보라. 이 영화의 시각적 황홀함을 이야기는 해도, 그 시각 속에 담긴 폭력의 강도를 얘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디스트릭트9〉은 폭력적 상황을 시각적 황홀함으로 제시하기보다는 매우 일상적이고 뉴스와 같은 감각으로 재현한다. 너무나 익숙해져서 무감해진 상황의 폭력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동시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배운 인간성이라는 것은 이미 개념화의 ‘게토’ 속에 있다. 그 속에서 건져낼 희망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정신적 유대인이며, 프런이다. 〈디스트릭트9〉은 이를 아주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는 흥미로운 장르 영화의 모범이다.
 


이상용 영화평론가이며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이다. 저서로『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등이 있음. leepoem@gmail.com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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