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오늘의 영화 - 걸어도 걸어도] 준페이, 오늘은 덥구나
[2010 오늘의 영화 - 걸어도 걸어도] 준페이, 오늘은 덥구나
  • 박태식
  • 승인 2010.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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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

아루이떼모 아루이떼모……. 80년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가요인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에 나오는 가사이다. 영화 중간쯤 이 노래가 나오는데 젊었던 시절 이태원 등지의 나이트클럽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 마루에서 춤추던 젊은이들이 유독 그 부분만 소리 높여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나는데 실로 30년 만에 다시 들은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사의 뜻이 〈걸어도 걸어도〉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걸어도 걸어도〉(步いても步いても, 2008년, 114분)는 참으로 맛깔스런 영화다.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그리 잘 들여다볼 수 있단 말인가? 대략 알고는 있지만 구체화시키기 어려운 감정, 어느 정도 짐작은 하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아 낯설기만 한 정서, 영화감독은 그같이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리를 관객이 간접경험 하게끔 만들어주어야 한다. 물론 이는 말처럼 쉬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 날씨가 더우니 바다에 가 수영 좀 하고 와서 점심을 먹겠어요.”오전 녘에 그 말 한마디 남기고 집을 나간 준페이가, 오후에 싸늘한 시체가 돼서 돌아왔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준페이를 보내고 남은 이들은 바다가 잘 보이는 높은 언덕배기에 그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에 알맞게 살아가며 훌륭하게 성장한 장남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둘째 아들 료타와는 다른 사랑을 주었는데, 바로 그 큰 아들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어머니의 슬픔은 얼마나 지독할까?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않고 그 높은 언덕을 걸어올라 비석에 물을 부어 준다. “준페이, 오늘은 무척 더운 날씨구나!”하면서.

어머니는 준페이가 수영하러 갔다가 대신 죽으며 목숨을 구해준 요시오를 아들의 기일忌日이면 어김없이 불러들인다. 요시오는 벌써 10년째 찾아와“아드님의 몫까지 열심히 살겠습니다.”라는 다짐을 하면서 좌불안석 쩔쩔맨다. 무능력하고 변변한 직장도 없고 몸이 비대하기까지 한 요시오에게 준페이의 기일은 악몽일 뿐이다. 보다 못한 료타가 제안한다.

“어머니, 이제 충분하니 내년부터는 요시오를 부르지 마세요.”

 “그렇게 멋졌던 준페이를 죽였으니 내가 살아있는 한 그놈도 고통을 당해야 해!”

대답을 하는 어머니의 눈에서 파란 빛이 감돌았다. 장남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과 장남을 죽게 만든 자에 대한 분노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유일한 장면이었다.

세월이 아무리 지난들, 그리고 남은 아들과 딸에게 보다 많은 신경을 쓴들, 또한 언제나 당당한 듯 위선적인 남편과 보조를 맞추어간다 한들, 어머니의 가슴 깊이 맺힌 슬픔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법이다. 어머니에게 준페이가 남긴 흔적은 세월이 가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분명해진다. 비단 준페이의 어머니뿐 아니라 아마 모든 어머니가 그럴 것이다.

ⓒ진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죽음을 겪고 이별의 슬픔에 가슴이 미어지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그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서양의 정서와 많이 다르다. 이 말을 하는 까닭은 〈걸어도 걸어도〉를 보는 내내 자연스럽게 난니 모레티 감독의 〈아들의 방〉(La Stanza del Figlio, 이탈리아, 2001년, 87분)과 비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방〉도 아들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준페이와 달리 영화 중간까지 잘생긴 아들은 멀쩡히 살아있다. 그래서 아버지와 가끔씩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어머니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고, 여동생의 인생도 걱정해준다. 감독은 아마 이탈리아의 표준적인 가족을 그려내려했던 것 같다. 큰 불행이 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아들이 죽자 상황은 극적으로 바뀐다. 여동생은 폭력적으로 변하고, 어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아버지는 생업인 정신과 의사 일을 이어가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진다. 하지만 아들의 옛 여자 친구가 찾아오면서 남은 가족이 겪고 있던 갈등과 위기가 해결된다. 해피엔딩인 셈이다. 모레티 감독의 섬세한 연출 덕에 〈아들의 방〉은 2001년 칸영화제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상영이 끝나자 20분간 기립 박수를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두 영화는 비록 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완전히 다르다. 〈아들의 방〉이 가족 중심이고 처음과 끝이 분명하고 이야기 위주인 반면, 〈걸어도 걸어도〉는 개인 중심이고 처음도 끝도 없고 표현적이다. 〈아들의 방〉에선 아들의 존재를 암시하는 상징이 도처에 깔려 있어 마치 지도를 보듯 아버지의 슬픔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걸어도 걸어도〉에 표현된 어머니의 슬픔은 암중모색 그 자체였다. 동서양이 그렇게나 다른 것이다. 태생이 아시아권이라 그런지 필자에게는 〈걸어도 걸어도〉의 표현방식이 훨씬 맘에 와 닿았다. 어머니의 슬픔은 그녀가 죽어서나 겨우 해결될 문제였다.

영화를 보는 처음부터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좀 나눠 받으려했다. 그래야 요즘 들어 부쩍 울적해진 기분에 위로가 될 듯싶어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비극적 장면 앞에서 오히려 해방감(카타르시스)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진행되는지, 미처 필자의 감정을 실을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세 차례 마음이 움직일 정도였다.

어머니 역을 맡은 키키 키린은 유머와 재치와 따뜻한 감성을 겸비한 어머니 상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마치 그녀를 통해 우리 모두의 어머니를 보는 듯했고, 영화에서 실제로 여러 차례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이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는 경험까지 했다. 키키 키린은 〈오다기리 조의 도쿄 타워〉(2007년)라는 작품에서도 어머니역을 한바 있는데 〈걸어도 걸어도〉에서의 느낌과 비슷했다.

〈걸어도 걸어도〉는 아시아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감독인 히로카즈는 고아가 된 네 어린이의 이야기인 〈아무도 모른다〉(2004년)를 감독한 바 있다. 필자는 일본에 막연한 적개심을 품고 자란 세대이긴 하지만 영화만큼은 그들이 훨씬 잘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작품이었다.

영화는 결코 영화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 우리가 지켜내고 이룩해내야 할 가치들을 형성시키고,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사람답게 사는 길인지 조언을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우리 인생의 좋은 선생이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인생에 대해 많이 배웠다.

(이 글은《춤》잡지에 실렸던 평을 보완한 글임을 밝혀둡니다.)

 


박태식 대한성공회 사제. 서강대 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독일 괴팅엔대 신학부 졸업(신학박사). 월간《춤》으로 영화평론가 입문. 대한 성공회 장애인 센터‘함께 사는 세상’지도신부. 저서로『타르수스의 바오로』, 『예수의 논쟁사화』, 『영화는 세상의 암호』등이 있음. parkts20@naver.com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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