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생성과 역사 사이: 김지하의 시와 시론
[7월 Theme] 생성과 역사 사이: 김지하의 시와 시론
  • 임동확(시인)
  • 승인 2022.07.0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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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 시인에게 ‘참으로 산다는 것’은 그 어떤 고귀한 이념이나 혁명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개체로서 각기 내면의 생명의 깊고 자유로운 자기선택과 결단으로서 자기 조직화가 먼저다. 각자의 깊은 심령의 움직임에 따른 자유의 전개와 생성으로서 ‘우주생명’ 이 가장 소중한 덕목이다. 따라서 올바른 의미의 시인은 죽어 있는 객관과 사료에 의지하는 ‘역사’에 참가하지 않는다. 어떤 사물의 변화나 사실의 자취보다 알 수 없는 신령스런 마음의 움직임이 먼저다. 인간 사회의 흥망성쇠에 가치를 부여하는 ‘역사’보다는 인간의 실존이나 내면에 살아 생동하는 ‘생성’의 세계에 참여한다.

  그렇다고 그가 ‘생성’과 ‘역사’가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극소수의 예술가들은 생성을 통해 역사를 비판하고 그 역사에 개입한다. 여느 지식인이나 일반인들과 달리, 비록 역사적 지대점至大点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각기 내면의 자유와 영성의 명령에 따라 흔연히 그 역사에 참여한다. 그 승패나 기록 여부에 상관없이 오로지 생명생성 또는 우주생명의 원리에 입각하여 역사와 소통하고 역사와 함께 나아간다.

  김지하 시인의 데뷔작이자 대표시의 하나인 「황톳길」이 그 좋은 예다. 여기서 그는 영성적인 내면의 움직임으로 근본 바탕으로 하여 이른바 ‘생성과 역사’의 일치를 꾀한다. 생명의 약동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갯가의 숭어 떼와 서슬 푸른 속이파리를 자랑하는 울타리의 탱자나무, 그리고 수정처럼 맑은 오월의 죽순에 괴는 물방울과 희디흰 고랑의 메밀밭 너머 드높은 푸른 하늘 바탕으로 그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으로 대변되는 비극적인 역사를 비판하고 추동하고자 한다.

  달리 말해, 그는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군사독재 정권에 가마니 속에 죽어간 아비의 검은 죽음으로 대변되는 역사를 고발하고 그것과 투쟁하는데 만족하지 않는다.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길고 잔인한 여름’으로 상징되는 ‘폭정’의 역사 밑에 자리한 숭어 떼와 희디흰 메밀꽃,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령한 황토의 붉은 빛이 주는 짙푸른 생명성에 근거하여 역사를 견인하거나 수정하면서 근본적인 차원 변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특히 그는 잘못된 인간의 역사를 우주생성에 근거해서 깨닫고 결단하는 ‘각비覺非’를 통해, 아비와 아들 사이의 사랑과 결단을 넘어 민족적이면서 전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공공성을 획득하고자 한다.

  어쩌면 그의 가장 큰 꿈이었을지도 모를 ‘시정詩政’은 출발점은 단연 그렇다. 곧 그는 그 어떤 교조적 이념이나 정치 프로그램을 통해 이른바 ‘후천개벽’이나 ‘네오 르네쌍스’의 세계를 꿈꾸지 않았다. 외려 모든 가치 자체에 대한 원생명의 반역이자 그 원초적 반역이 불 지피는 미친 기쁨의 세계 그 자체를 통해, “언제나/소수만이 대답한다”는 “굵은 사내”의 “울음소리”를 닮은 “숫계면”의 “시정詩政”(「시정」)을 이루고자 했다. 한낱 인간을 넘어 천지만물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 혹은 그 어떤 사사로움도 없는 ‘천지공심天地公心’을 바탕으로 시와 정치의 일치, 혹은 생성과 역사의 통일을 꿈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김지하에게 시인은 초월적이고 신성한 세계에 거주하거나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속되고 때 묻은 세속의 삶과 신산고초의 생활 속에서 어떤 신성을 발견하는 자다. “성인이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자” 또는 “매일 매 순간/인격을 허물어서/비로소 사는 자”가 “시인”(「못난 시 208」)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숨 막히는 삶의 그늘과 가난, 끝없는 슬픔과 고통의 어둠을 참고 견디며 되새김하는 과정에서 흰 영성의 빛이 배어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온갖 고통과 어둠을 피하지 않은 채 정면 대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얻은 ‘시김새’를 통해, ‘흰 그늘’로 대표되는 한 차원 더 높은 미적이고 영적인 체험을 하는 자들이다.

  그런 김지하에게 “시는//없음과 하나 사이의/어둑어둑한 흰빛”이자 “틈”(「틈」)이다. 또한 “무너지며 창조되는/커다란 혼돈” 또는 “어두운 내 마음속에/문득/태어나 반짝”이거나 거기에 “서”린 “흰 그늘”(「시」)의 일종이다. 그러니까 김지하에게 ‘시’는 단지 그야말로 존재자적 의미의 ‘유무有無’ 차원이 아니라 모든 관계들을 위해서 반드시 존재해야 할 그 어떤 것으로 ‘없음’과 그 모든 것들을 낳는 회귀처로서 ‘하나’ 사이에 태어난다. 또한 ‘나’의 출발점을 살펴보는 ‘귀성歸省’과 새롭고 무궁한 생명을 잉태하는 근원으로의 ‘귀향歸鄕’을 아우르는 ‘귀무歸無’에서 탄생한다. 어디까지나 ‘있음’의 세계를 감싸고 있지만 그것으로써 규정될 수 없는, 알수 없는 거대한 ‘없음’ 속에서 문득 ‘반짝’ 태어나 신령한 내면의 ‘어둑어둑한 흰 빛’ 또는 ‘흰 그늘’이 한 편의 시다.

  바꿔 말하자면, 한 편의 시는 혼돈에 빠져 들어가면서 동시에 그 혼돈에서 빠져나오는 혼돈의 질서, 곧 “기도”와 “수음”(「못난 시 96」)과 같은 양극단의 오고감 속에서 탄생한다. “낮이면 자고 밤이면 야한 동영상”에 빠져든 것은 “내 마음 속”의 “커다란/구멍”, 그러나 “그 속에 타는/자그마한//촛불/하나”(「못난 시 99」)와 같은 어둠과 빛의 ‘반대일치’ 속에서 태어난다. 설령 모두가 외면하는 마업魔業이나 동물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에서도 그 속에 움직이는 숭고한 ‘불심佛心’ 혹은 일종의 성스러운 선업善業의 싹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생의 고통과 그늘이 짙은 개인이나 사회일수록 이러한 소슬한 영성의 흰빛을 체험할 기회가 많은 게 시의 세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김지하에게 “시는/과학의 최고의 영역”이다. 그야말로 “신비한” 시 “한 구절” 속에 문득 “참다운 생명과학의/진정한 시작”을 알리는 것과 더불어 “신문명의 첫 촉발제” 역할을 할 “차원 높은” “패러다임”(「아리아드네Ariadne」)이 들어 있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그의 ‘우주 생명학’은 현대과학의 눈부신 성과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늘의 세계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우주변화와 인류의 생존조건의 위협을 직시하는 ‘생명과학과 그 입장을 같이 한다. 복잡다단한 삶과 세계 속에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패턴을 포착하고, 그걸 다차원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시적 작업이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과 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극히 우연한 사건이었까? 얼마 전에 토지문화관 근처 ‘원주 흥업 대안리’ 송림의 황토에 묻힌 그의 묘지명엔 오직 ‘시인 김지하’라는 명칭만 달랑 새겨져 있다. 그동안 그의 연보에 의당 따라붙기 마련이었던 온갖 영광스럽거나 거추장스러운(?) 호칭들을 다 버린 채 말이다. 분명 그렇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현란한 그의 담론과 주장들을 따라 다니다보면, 우린 정작 그가 언제나 시에서 출발하여 시로 돌아온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그의 간단명료한 묘지명이 말해주듯 시인으로 살았고, 시인으로 죽었다. 아니, 이제 그는 분명 시인으로 죽었으되, 그러나 세계 어느 문학사에서도 일찍이 개진된 바 없는 폭과 깊이의 시와 시론을 펼친 시인으로 오래 우리 곁에 살아있을 것이리라.


임동확 1959년 광주 출생. 1987년 시집 『매장시편』을 펴내면서 작품 활동 시작. 이후 시집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 『운주사 가는 길』 『벽을 문으로』 『누군가 나를 간절히 부를 때』 외. 현 한신대 교수.

 

* 《쿨투라》 2022년 7월호(통권 9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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