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세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인물 조각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 생 호주 조각가 안테 다브로
[INTERVIEW] 세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인물 조각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 생 호주 조각가 안테 다브로
  • 설재원(본지 에디터)
  • 승인 2022.07.04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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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_ 2022년 6월 21일 16시
곳_ 주한크로아티아대사관
인터뷰어_ 설재원(본지 에디터)
통역_ 순영 레든(주한크로아티아대사관)
사진 촬영_ 배상진(본지 인턴기자)
사진 제공_ 주한크로아티아대사관

  지난 6월 21일 주한크로아티아대사관에서 크로아티아 태생 호주 조각가 안테 다브로를 만났다. 아직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크로아티아와 호주에서 안테 다브로는 아름답고 기품 있는 인물 조각을 만드는 거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38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안테 다브로는 1966년 자그레브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 학위를 받은 이후 호주로 이주해 지금까지 수도 캔버라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캔버라공항, 캔버라비즈니스센터, 브린다벨라 비즈니스 파크 등 캔버라 도심 곳곳에서 그의 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호주국립예술학교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Art에서 30년 이상 교수직을 역임한 훌륭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호주 뿐만 아니라 일본 교토 세이카 대학을 비롯한 세계 여러 대학에서 객원 강사로도 다양한 학생들을 만났으며, 이번 한국 방문도 앞으로의 심포지엄과 한국과의 교류 등을 준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

  이제 뛰어난 예술가이자 교육자인 안테 다브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설재원(이하 설) 작가님 안녕하세요. 바쁜 방한 일정 중에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은 50여 년간 조형 조각 작업에 천착해 오셨습니다. 크로아티아와 호주, 일본에서는 유명한 거장이시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기도 한데요, 간단한 소개와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테 다브로(이하 다) 독자분들 안녕하세요. 저는 50여 년 간 조각을 하고 있는 안테 다브로입니다. 저는 크로아티아 달마시아Dalmatia 지역에 위치한 스플릿Split이라는 도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저희 아버지께서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지역으로 징용되어 끌려가셨어요. 제겐 그게 아주 큰 충격이었고 그래서 어릴 때 아빠 없이 혼자 오래 있으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조각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첫 작업은 저희 농장에서 크고 표면이 부드러운 돌에 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보고 제 그림자를 석탄으로 그린 다음 집에 있던 칼을 가지고 조각한 것이었어요. 완성하고 나니까 너무 자랑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손도 만들어보고 다른 그림자가 생기는 것들을 만들었어요. 어느 날은 물리카mulika라는 돌에다가 새를 조각을 했어요 새 조각을 집으로 가져왔는데, 고양이가 진짜 새인 줄 알고 달려드는 거예요. 그때 어머니께서 “너 진짜 조각을 잘 하는구나” 말씀하셨던 게 큰 자신감이 되었어요. 그렇게 조각에 재미를 붙였고 스플릿이라는 큰 도시로 가서 제대로 조각을 했죠.

Genesis (2009)
Genesis (2009)

  주변에서 돌을 보고 우연히 조각을 시작하셨다는 게 신기합니다. 원래 가족 중에 미술이나 조각에 취미가 있는 분이 있으셔서 그런 영향을 받으신 걸까요?

  예 맞습니다. 제 아버지는 돌로 집을 짓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와인 양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제 주변에는 돌과 나무가 항상 있었고, 또 조각을 하기 위한 이런 저런 도구도 구하기 쉬웠는데, 그런 게 제가 조각을 시작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이가 들어서 농장에 다시 돌아가봤더니 지금 집은 그대로 있는데 그 안에 제가 가지고 놀던 도구들은 다 없어졌더라고요. 좀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일찍 떨어지셨는데도 아버지께서 작가님이 조각의 세계로 이끄는 데 큰 영향을 주셨네요. 그럼 스플릿으로 이동하시면서 본격적으로 조각 활동을 시작하신 건가요?

  저희 집은 땅은 좀 있지만 현금이 없어서 가족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구에서 일을 해 돈을 모으면서 미술학교에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을 밟았습니다. 3년 정도 정말 열심히 지냈고, 돈을 어느 정도 모아서 자그레브에 있는 아카데미 오브 파인아트Academy of Fine Arts 입학 시험을 치렀습니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는데 그때 저는 학교를 등록하지 않으면 군에 징용되는 상황이어서 군대 가기는 싫으니까 대신 철학과에 들어갔어요. 철학과를 다니면서도 매년 아카데미에 지원했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세 번을 떨어지고 이제 포기해야하나 하는데, 크로아티아 최고의 조각가인 이반 메슈트로비치Ivan Meštrović가 제 작품이 마음에 든다고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메슈트로비치를 만났는데 제게 “너는 뒤에 신이 함께하니까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조각을 해라.”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조각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반 메슈트로비치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네요. 그런데 작가님께서는 자그레브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시고 호주로 활동 거점을 옮기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럽에서 호주로 대륙을 옮기셨는데, 활동 무대를 호주로 옮기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서울대 이용덕 교수와
서울대 이용덕 교수와

  그때 저는 젊었고, 정말 에너지가 넘쳤어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제가 저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정치적인 문제로 자유가 전혀 없었고, 제가 뭘 한다 하면 항상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이곳의 시스템이 너무 싫었어요. 아까 저를 발굴해서 공부를 시킨 이반 메슈트로비치도 크로아티아(당시 유고슬라비아)를 못 버티고 미국으로 갔어요. 이분이 유럽에서 또 다른 로댕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분인데, 미국과 크로아티아를 왔다 갔다 하던 시기에 우연히 처음 만난 거였어요.
  또 다른 이유로는 저는 예술가로서 ‘나’이고 싶었어요. 하지만 크로아티아에서는 그럴 수 없었어요. 제 주변에는 항상 다른 조각가들이 있었고, 교수님들이 있었고, 제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결국 저는 크로아티아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해외를 찾다가 몬트리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자리를 구했어요.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까 캐나다는 유럽이랑 너무 가까운 거예요. 일단 최대한 멀리 떨어진 데까지 가보자 하는 마음에 1967년도 10월에 호주로 갔어요.
  처음에는 캐나다 가기 전에 한두 달 정도만 있으려 했는데 호주에 있어보니까 제가 영어를 너무 못 하는 거예요. 그럼 캐나다 가기 전에 영어라도 좀 배우자는 생각으로 더 남아있으면서 이듬 해에 전시를 열었어요. 그리고 그 전시가 아주 대박이 났고, 호주에서도 교수직을 제안 받았어요. 저는 영어도 못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냐고 고사했는데, 그쪽에서 제가 조각을 가르치면 학생들이 제게 영어를 가르쳐줄 거라며 밀어붙여서 결국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시작된 교수 생활로 지금까지 호주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Susanne (2005)
Susanne (2005)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정말 철학과에서 3년이나 공부하신 분 같네요. (웃음) 호주로 건너오면서 작가님 작품 활동에 있어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크로아티아어가 슬라브어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베이스는 라틴어거든요. 학교에 있다보니 영어는 정말 금방 배웠고, 언어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는 가르치는 일이든 제 예술 작업이든 아주 순조로웠어요.
  생활 면에 있어서는 음 저는 유럽에서 왔고 호주 사람들이랑 서로 관점이 다른 부분도 꽤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제 관점을 남들에게 잘 설명하면서 꽤나 강하게 어필하는 편이라 이런 상황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제가 크로아티아에 있을 때는 추상적인 작품을 많이 만들었는데, 호주로 오면서 인물 조각 작업에 집중했어요. 인물 조각은 세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다 사람이랄까요? 세대를 달리해도, 사는 지역이 달라도 사람은 결국 사람이에요. 어떤 누구건 똑같이 뜨거움을 느끼고 차가움도 느끼고, 또 사랑을 느끼고 때로는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죠. 아, 저는 혐오감은 모르고 살긴 했네요. (웃음) 아무튼 저는 지역과 세대에 구애받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을 전할 수 있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 인물 조각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을 멀리서 보면 강인하고 위엄 가득한 힘이 넘치는데도 또 가까이서 보면 인간적이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있었는데, 작품에서 작가님의 캐릭터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 합니다. 작가님께서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으신지, 그리고 관객들이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보면 좋을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저는 작업에 있어 철저하게 저 자신을 위해서 조각을 만듭니다. 저는 의뢰 받은 작품을 만들 때에도 사람들이 와서 옆에서 잔소리를 하거나 이런 저런 언급을 하면 그대로 엎어버릴 정도로 좀 강하게 반발하는 편이에요 왜냐면 저에게 있어 자유의 가치는 무척 개인적이며 그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하고 타협을 잘 하지 않고, 작업할 때만은 제 자신과 소통을 하면서 제 영혼을 온전히 작품에 담아내려고 노력해요.

Sailors and Ships (1986) in Royal Australian Navy Memorial, Canberra
Sailors and Ships (1986) in Royal Australian Navy Memorial, Canberra

  자유를 찾아 크로아티아를 떠나셨기 때문에 자유의 의미가 무엇보다도 크다는 작가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그럼 혹시 작가님께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까요?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미켈란젤로인 것 같아요. 제가 사실 미켈란젤로를 너무 좋아해서 피렌체 미켈란젤로가 살던 동네에 집을 사기도 했어요. 매년 여름에 피렌체에 가서 지내면서 많은 영감을 받고 와요. 제가 지금 자서전 작업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미켈란젤로와의 대화도 있습니다. (웃음)
  그리고 제가 가장 많이 연구를 하고 공부한 인물은 폴 세잔이에요. 세잔의 점묘법을 보면서 점과 점 사이를 연결하는 그 유기적인 각도를 제 작품에 많이 반영했어요. 제 작품을 보면 표면이 보드러우면서도 미묘하게 각을 만들어 놓은 부분이 있어요. 사람의 맥박이 뛸 때 살짝 쉬어갈 수 있는 그런 기능을 하는 거예요. 저는 폴 세잔의 화법을 제 조각에 많이 반영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조각하는 사람으로서 로댕을 빼놓을 수는 없죠. 그래서 저는 미켈란젤로, 폴 세잔, 로댕 그리고 저 이렇게 이어지는 게 있다고 봅니다. (웃음)

Standing figure
Standing figure

  미켈란젤로, 폴 세잔, 로댕, 그리고 안테 다브로. 이렇게 이어지는 계보를 생각하며 작품을 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 그럼 다음 주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작가님은 뛰어난 예술가이면서도 동시에 호주 국립대학 등에서 30여 년 이상 대학에 몸 담으신 교육자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시면서 대학 출강을 병행하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특히 대륙을 넘나들며 교토 세이카 대학에서도 오래 수업을 하셨고요. 작가님의 교육 철학과 작가님에게 대학 수업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대학 수업을 하면서 저도 참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젊은 기운이 넘치는 학생들을 상대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에요. 제 교육 철학이라…. 음 우선 제가 생각하기에 창조적인 부분은 가르칠 수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저는 제 학생들이 진심으로 예술을 하고 싶어하는 열정과 끈기가 있고, 또 게으르지 않다면 기술적인 부분은 잘 가르칠 수 있어요. 저는 아침 9시 수업을 하면 9시 정각에 문을 잠가버리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제 수업은 들어올 수 없어요. 저는 그만큼 성실함과 열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망치질을 할 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기 손을 때리잖아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는 학생이라면 가르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는 학생이라면 제가 어느정도 가이드를 해주면서 그림을 가르치고, 시각적인 표현 방법들을 알려줄 수 있어요. 그렇게 가이드를 하며 학생들에게 스스로 도전 의식을 북돋울 뿐이지, 그 이상으로 제가 학생들에게 창조적인 부분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고 봐요.
  또 저는 학교에서 처음에는 열심히 배워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배운 것을 잊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 해부학을 배웠는데 제가 해부학 시간에 배운 뼈대나 근육의 위치 등은 제 작품을 만들기 위한 토대를 만드는 과정일 뿐이에요. 해부학 상식을 갖추면 저는 저만의 인체 구성을 다시 만들어 나가요. 제가 열심히 공부한 해부학에 끌려다니지 않도록 노력한 거죠.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저는 저만의 예술 작업을 할 수 있었어요. 제 작품에서 여러분이 보는 몸은 모두 제가 창조한 몸입니다. 

National Memorial to RAN
National Memorial to RAN

  창조적인 부분을 가르쳐줄 수 없다고 하시지만 말씀 들어보니 학생들이 작가님께 배우는 부분이 꽤나 많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 계속 학생들에게서 오리지널리티를 끌어내려고 애쓰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작가님께서는 일본에서 오래 수업을 하셨는데도 이상하리만큼 한국과는 인연이 잘 닿지 않았습니다. 2019년 2020년 무렵에는 드디어 방한이 성사되나 싶었는데, 또 팬데믹 상황이 시작되면서 무산되었습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서 드디어 한국에 오셨는데요. 그동안 작가님의 근황과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작품 활동에 달라진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우리가 코로나의 존재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사실 저는 정말로 달라진 게 없거든요. 캔버라시에서 저한테 200평 정도 공간을 제공해서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해 매일 아뜰리에에 가서 음악을 크게 들으면서 작업을 해요. 똑같아요. 팬데믹 전이나 후나. 물론 밖에 나갈 때 마스크를 쓰긴 하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제 작품 활동을 가로막는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딱히 크게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아요. 아 말씀하신 대로 한국 오는 일정이 미뤄지긴 했지만요.

김기철 도예가와 함께
김기철 도예가와 함께

  그렇군요. 한국에 오신 지도 벌써 5일째인데요, 한국에서 지내시는 동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정이 있으신지요?

  한국에서 흥미로운 예술가들을 많이 만났어요. 먼저 김기철 도예가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집과 스튜디오를 구경시켜 주셨어요. 영국 여왕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이분의 그릇에다 식사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저한테도 집에서 식사를 준비해 주셔서 너무 영광이었어요. 그리고 저희 둘 다 배우 숀 코너리를 닮아서 셋이서 삼형제 하기로 저희끼리 정했어요. 김기철 도예가도 나이가 90세라 38년생인 제가 여기서는 막내더라고요. (웃음)
  동두천에서 뵌 김창곤 조각가도 인상적이었어요. 큰 돌에다가 안에 와이어를 넣어서 조각 작품을 만드시는데 이분 작품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니까 한 가족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 돌 조각들을 따로 떨어뜨려 놓지 말고 꼭 한 군데 놔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김창곤 작가님도 바로 그거라며 그래서 영종도에 조각들을 모아 전시할 조각 공원을 만들고 계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어쩌면 같은 조각가라 그런지 그런 부분에서는 마음이 잘 통한 분이에요.
  오늘은 김성복 교수님과 김승환 교수님을 만났는데, 이제 그분들과 함께 심포지엄이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마스터클래스 같은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어보려고 해요. 어쩌면 이 프로그램으로 조만간 한국을 다시 찾을 것 같기도 해요.

  인터뷰 즐거웠습니다. 이번 방한 일정으로 한국과의 좋은 인연이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저도 캔버라에 가게 되면 공항부터 비즈니스센터까지 작가님 작품을 꼭 찾아봐야겠습니다. 언젠가는 한국에서의 전시도 기대해 봐도 좋을까요?

  제 작품들은 큰 게 많아서 너무 무거워요. (웃음) 전에 교토에서 전시를 한 적이 있어요. 작은 작품들과 드로잉을 중심으로 가져왔는데 아마 한국에서 하면 그런 식이지 않을까요? 큰 건 너무 비싸니까 힘들어요. 제 작품을 보시려면 캔버라에 있는 아뜰리에로 직접 오시는 게 제일 좋습니다.

왼쪽부터 순영 레든 보좌관, 안테 다브로 조각가, 손정순 발행인, 설재원 에디터
왼쪽부터 순영 레든 보좌관, 안테 다브로 조각가, 손정순 발행인, 설재원 에디터

  그럼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자유롭게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Be yourself. You are lovely people. Don't be anyone else. 여러분은 크로아티아 사람도, 호주 사람도 아닌 한국 사람입니다. 남을 따라하지 말고 그냥 여러분 자신을 보여주세요. 여러분은 그 자체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 《쿨투라》 2022년 7월호(통권 9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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