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바캉스] '민트초코'스러운 여름의 맛: 구미호 박하경뎐 2023
[드라마 바캉스] '민트초코'스러운 여름의 맛: 구미호 박하경뎐 2023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3.06.2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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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길목에 들어선 게 확실한 7월의 하루.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과연 우리는 이 더위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두근두근. 그리하여 준비했다. ‘민트초코’스러운 여름의 맛. 민트와 초코처럼 상반된 맛을 가진 드라마 두 편. 매력적인 캐릭터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빠른 호흡의 K-판타지 액션 활극 〈구미호뎐 1938〉과 드라마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잔잔하게 흘러가는 느린 호흡의 힐링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

K-판타지

이번에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출석 체크를 불러야 할 타이밍이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태국 베트남. 이렇게 6개국에서 1위 기록. 물론 19개국에서 톱10에 진입했다. 사실 시즌1이 성공하고 나서 시즌2까지 잘 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런데 〈구미호뎐〉은 시즌2가 시즌1보다 반응이 더 뜨겁다. 나 역시 시즌2가 이만 배 더 재밌다.

2020년 방영된 시즌1은 토착신과 토종 요괴를 등장시켜 ‘K-판타지’란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는 극찬을 받으며 국내외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 시즌2는 ‘K-판타지’ 세계관을 한층 더 확장한다. 시즌1에서 구미호와 인간 여자의 로맨스 서사가 확 줄어들고, 그 빈자리에 한국 산신과 한국 토착신들이 한 무더기 등장한다. 그동안 ‘K-판타지’ 하면 ‘로맨스판타지’(로판) 장르가 대표적이었다. 〈도깨비〉 〈별에서 온 그대〉 〈호텔 델루나〉…. 로맨스가 넘실대는 한국 판타지 역사에서 〈구미호뎐 1938〉은 이게 바로 K-판타지라고 패기 넘치게 출사표를 던지듯 한국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굵게 긋는다. 로맨스 없이도 판타지가 가능하다는 걸 증명해낸모범 사례랄까.

누가 이렇게 대본을 잘 썼나, 드라마를 집필한 한우리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사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작가. 그럼 그렇지. 역시 집념하면, ‘그것이 알고 싶다’ 아닌가. 경찰이나 검찰이 해결 못한 사건도 ‘그알’이 붙으면 끝장을 본다는 말이 전설처럼 온라인에 떠돈다. K-판타지의 난제도 결국 ‘그알’이 해결한 셈이다. 〈구미호뎐〉을 보다 보면 한국 설화·민담·신화를 향한 한우리 작가의 자료수집 능력과 집념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응답하라 1938

시즌1에서 주인공 구미호 이연은 최악의 빌런 이무기와의 혈전을 승리로 이끌고 현세에 환생해서 600년 동안 잊지 못한 여인 아음을 만나 사랑을 이룬다. 인간 여자와 함께하기 위해 신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인간이 되는데, 아차차, 문제가 발생한다. 홍백탈을 쓴 천무영이 삼도천 수호석을 훔쳐 가버린 것. 이승과 경계를 지키는 수호석이 없어지면서 잡신들이 모여드는데…. 시즌2는 배우 이동욱, 아니 주인공 이연이 범인을 찾기 위해 1938년으로 건너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랑하는 그녀 ‘아음’을 2023년에 혼자 남겨두고. 두둥. 배우 조보아는 시즌2에 아주 잠깐만 나온다. 두둥

그런데, 왜 갑자기 1938년일까. 뜬금포 1938년?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도 드라마를 보다 금세 깨닫는다. 구미호가 있어야 할 곳은 역시 1938년, 일제 강점기다. 조선총독부의 실권자 경무국장 가토 류헤이가 ‘알고 보면’ 늙은 일본 요괴 텐구이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유린당하는 한반도를 백두대간을 지키는 잘생긴 이동욱, 아니 우리 산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요괴! 요놈! 요본!

시즌2는 조선 구미호 이연과 일본 요괴 가토 류헤이의 대립구도가 주요 서사다. 1938년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새롭게 등장하는 토착신과 토종 요괴들, 그리고 외래 요괴들 덕분에 ‘K-판타지’ 세계관의 묘미가 극대화된다. K-판타지 캐릭터뿐만 아니라 K-콘텐츠 오마주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각시탈〉과 〈야인시대〉를 시작으로 서부극 냄새가 잔뜩 나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까지. K-콘텐츠 간의 상부상조 미덕이 배스킨라빈스 31가지 맛 아이스크림처럼 다채롭게 펼쳐진다. K란 이름의 매혹적인 개미지옥이랄까.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규.

민트와 초코의 만남

〈구미호뎐〉 시즌2가 시즌1보다 더 인기있는 이유 중 가장 지분이 높은 건 바로 류홍주란 캐릭터다. 첫 등장부터 강렬하다. 구미호 이연에게 '넌 내 거해라'라고 대끔 던져놓고는 이연이 거절하자 바로 검을 휘두른다. 오호, ‘겁나게’ 신박한 이 여성은 도대체 누구인가. 케케묵은 로맨스를 걷어차고 〈구미호뎐〉을 액션 활극의 스펙터클한 세계로 인도하는 신여성 류홍주를 찬양할지어다.

구미호 이연과 살벌하게 싸우는 ‘수리부엉이’ 류홍주가 뭇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류홍주 덕후를 양산하는 지금 2023년 한국에서 상반된 매력을 가진 또 한 명의 여성이 막강한 존재감을 발휘 중이다. 바로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박하경 여행기〉의 박하경이다.

배우 이나영이 연기하는 박하경은 짧은 커트에 가까운 단발머리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그 보상으로 토요일 하루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는데, 좀 많이 떠난다. 해남·군산·부산·대전·속초·경주… 그 어떤 장르로도 드라마 스토리가 정착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딱 하루의 여행. 걷고, 먹고, 멍 때릴 수 있다면.” 드라마 포스터에 써 있는 카피 문구다. 드라마 비평가가 이렇게 성의 없이 카피를 그대로 가져와 써도 되나 싶겠지만 이게 바로 박하경 스타일이다. 그 어떤 것에도 열심도 집착도 없다. 심지어 박하경은 드라마에 매회 특별출연을 잔뜩 모셔놓고는 슬그머니 관찰자인 양 뒤에 물러나 있다. 배우 한예리와 구교환, 조현철과 심은경, 그리고 가수 선우정아까지.

힐링 없는 힐링

여행을 간다고 하면 무얼 할까 열심히 계획을 세우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하경의 여행은 그런 게 1도 없다. 남도 끝자락에 있는 해남 미황사에 템플스테이를 신청해 놓고 그냥 잠시 있다가 그날 집으로 돌아온다. 수학 없는 수학여행처럼 ‘스테이’ 없는 템플스테이랄까. 사람들이 의아해하니까 그냥 템플스테이하고 싶었다고, 그래서 하고 가는 거라고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역시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템플스테이에는 스테이가 없고.

걷다가 힘들면 의자에 앉아 쉬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너무나 일상적인 스토리라서 이런 걸 드라마로 만든다고? 아니, 만들었다고? 누가 본다고? 그런 생각이 계속 드는데, 신기하게 계속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서 이런 이상한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상한 드라마를 보다가 이상한 사람이 된 건지 헷갈리는데, 그게 바로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의 매력이다. 원래 이상한 사람은 더 이상해질 수 있다는 게 함정이다. 조심하자.

온라인 리뷰를 보니까 힐링 드라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데 나는 힐링 드라마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드라마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힐링하면 왠지 폭신폭신하고 몽글몽글한 느낌일 것 같은데, 〈박하경 여행기〉의 힐링은 그런 결이 전혀 아니다. 힐링 없는 힐링 드라마랄까. 음. 점점 내가 이상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아니다. 나는 박하경을 닮아가고 있다.

극중 박하경은 템플스테이를 하러 산에 올라가는데, 그 산길 옆에 돌탑이 있는 걸 발견한다.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작은 돌을 하나씩 쌓아서 만든 돌탑. 그걸 보고 박하경은 속으로 한마디 툭 내뱉는다. ‘발로 차고 싶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터덜터덜 산길을 올라간다.

유레카! 이 장면에서 나는 작은 해방감을 느꼈다. 배우 손석구 없이도 ‘나의 해방일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가슴 벅차오름이랄까. 곰곰이 생각해보라. 우리는 마음을 비우러 산까지, 저 멀리 해남 미황사 템플스테이까지 가서는 소원을 빈다고 작은 돌들을 힘들게 쌓았던 것이다. 돌탑 쌓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해본 사람은 안다. 피라미드 모양의 돌탑은 절대 호락호락 우리가 정상을 차지하게 두지 않는다. 조금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돌탑은 무너져 버린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지나치게 열심히 살아온 것이다. 힐링한다고 하구선 너무 열심히 힐링에 집착한 것이다. 아. 아. 아.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연두빛 캠퍼스물과 회색빛 오피스물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다. 언젠가는 내 인생이 장르가 판타지로맨스코미디홈드라마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2022년 중앙대학교 교육상과 제4회 르몽드 문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쿨투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크리티크 M》 편집위원과 KBS World Radio 〈김형중의 음악세상〉 고정 게스트로 활동하며 자발적 드라마 홍보대사로 열일하고 있다. 저서로 드라마 캐릭터 비평집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여러 권의 책이 있다.

 

 

* 《쿨투라》 2023년 7월호(통권 10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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