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생일, 영화가 진정한 애도의 양식에 가닿는다는 것
[영화 월평] 생일, 영화가 진정한 애도의 양식에 가닿는다는 것
  • 김시균(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 승인 2019.04.29 1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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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모르겠다. 세월호라는 단어에 서린 고통의 무게 때문에라도 나는 이 단어를 말한다는 게 여전히 무섭다. 그리고 두렵다.

 때는 2014416일 아침. 사회부 초임 기자로서 캡(사건팀장)의 전화를 받은 나는 서울역 KTX를 타고 전남 진도로 혼자 황급히 내려가야 했다. KBS의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를 믿었던지라 한나절 취재이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현장에 당도했을 때 마주한 광경이란 거대한 재난의 그것이었다. 경비정에서 바라본 바다 위 세월호는 이미 선미만 드러낸 채 가라앉고 있었다.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은 절망과 비탄으로 뒤범벅이 된 가족들 절규가 내내 이어졌다.

 도처에 죽음(). 생사의 경계란 참혹한 것이었다. 그러고 5년여가 지났고 일상은 지속되고 있지만, 나는 이 기간 지켜봐온 재난의 풍광을 지금도 묘사할 수 없다. 그러고 싶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 <생일>(감독 이종언)의 개봉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적이 우려스러웠다. 혹여나 그날의 참사가 조금이나마 재현이 된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러 가지 않을 참이었다. 때문에 <생일>의 개봉 전 어느날, 이 영화 관계자를 만나 처음 건넨 물음이란 이런 것이었다.

"사고 현장이 한 컷이라도 재현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날 이후 남겨진 가족들의 일상을 다루었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안도했다. ‘적어도 재현의 윤리는 위배하지 않았구나.’

 미카엘 하네케는 영화 감독의 소임에 대해 이처럼 말한 바 있다. "예술가는 사회의 상처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영원히 소금을 발라대는 존재다." 하지만 이 말은 역사의 재현에 관해서만큼은 주의깊게 쓰여져야 한다. 시대의 상처를 재현하는 데엔 얼마간의 윤리적 하한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 하한선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재현이란 또하나의 상처에 다름없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쇼아>(1985)를 만든 클로드 란즈만은 이러한 입장에서 근본주의적이었다. 그는 특정한 역사를 재현 장치를 빌어 픽션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위선적이라고 봤다. 그래서 홀로코스트를 다룬 <쇼아>를 만들어갈 때 그는 일체의 기록 영상이나 관련 자료를 거부했다. 1·2부로 나뉜 이 9시간짜리 다큐멘터리가 오직 생존자들의 증언만으로 이루어진 건 그래서였다. "재현에는 그 어떤 금지된 영역이 존재한다고 나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쉰들러리스트>(1980)를 보면서, 나는 과거에 TV 드라마 <홀로코스트>(1980)를 보고 느낀 점을 떠올렸다. 침범하는 것, 혹은 진부화陳腐化하는 것, 그것은 여기서 같은 말이다. 할리우드식의 TV 드라마나 영화는 '진부화'되어, 그럼으로써 홀로코스트의 독특한 성격을 폐기해버리는 까닭에 침범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란즈만이 정식화한 이 문구를 참조한다면, 역사적 사실의 영화적 재현이란 그 사실을 진부화하고 침범함으로써 실제實際를 기만한다. 거친 표현임을 감수한다면, 이 기만의 행위란 고통의 당사자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나 이제 5주기에 불과한 세월호 참사의 경우는 어떠한가. 재현의 윤리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즉각 들 수밖에 없다. 여전히 대중은 집단 죄의식과 범국민적 트라우마에 시름하고 있고, 이 죄의식과 트라우마는 아마 시효 기간 없이 지속될 것이다.

 이제 영화로 들어가 보자. <생일>의 첫 배경은 기내機內. 이코노미석 가득 승객들이 앉은 가운데 우측 한켠에 한 사내가 눈에 띈다. 주인공 정일(설경구)이다. 표정 없는 그의 얼굴은 짙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한눈에 침통함이 느껴진다. 왜 그는 비행기를 탔고, 이제서야 한국에 도착한 것일까. 사연은 차차 드러날 것이다. 화면이 바뀌면 카메라는 바리바리 짐을 들고 아내 순남(전도연)과 딸 예솔(김보민)이 사는 빌라에 도착한 정일의 모습을 비춘다. 여러 차례 벨을 눌러 아내 이름을 불러보지만 묵묵부답이다. 순남이 인터폰 화면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지만 그녀는 응답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꽤나 긴 기간 정일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돌아온 정일(남편 그리고 아빠)과 재회의 차단을 첫 신으로 삼은 의도는 선명하다. 영화는 은근히 말하는 중이다. 우리는 유가족의 아픔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음을. 그래서는 안 되며,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려면 최소한의 시간이 요구된다는 것을. 정일은 그런 우리의 대변자로서 제시되는 존재다. 그는 아들이 죽었음에도 가족 곁에 있지를 못했다. 제 나름 사정이 있었다. 수년 전, 그는 한국을 떠나 베트남에서 공장을 운영했다. 도중에 현지 노동자들 파업이 있었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옥살이를 했다. 뒤늦게 무혐의로 출소됐지만 아들 수호는 이미 죽은 뒤였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차마 용서하기 싫었을 것이다. 절망 속에 무너져갈 때 남편은 곁에 있어주질 못했기 때문이다. 가없는 고통에 동참해주지 않은 그를 아비된 자이자 가족으로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래서 서성대는 정일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는 주변을 배회하며 천천히 가족 곁에 다가가려 한다. 자신을 조금 낯설어하는 딸을 만나고, 딸이 아빠를 받아들일 무렵 집 내부로 조심스레 발을 디딘다. 그러나 정일은 주저한다. 그리고 망설인다. 그에겐 수년 간 아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 고교생이 된 키 큰 아들과 함께한 추억이 그에겐 전무하다. 머뭇대며 수호 방 안에 들어선 그는 그래서 이내 견디지 못한 채 나간다. 그의 충혈된 눈자위는 죄의식에 물든 비루한 아비의 그것이다. 그 죄의식이란 지켜주지 못해서, 함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때늦은 후회이자 참회다. 영화는 그것이 비단 정일의 것만이 아님을,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함을 조심스레 일깨워준다.

 이 영화 초중반에는 재현의 윤리를 지키겠다는 감독의 안간힘이 읽히는 결기의 신이 있다. 다시 가까워진 아빠 정일과 딸 예솔이 갯벌 체험에 나가는 신이다. 더없이 맑고 귀엽지만 떠난 오빠에 대한 슬픔을 꼭꼭 감추고 있는 딸아이 마음을 아빠는 미처 자각하지 못한다. 이에 아이들 모두 갯벌로 뛰어들 때 어두운 표정으로 홀로 멈춰선 딸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딸을 안고 같이 들어가주려 한다. 딸은 그런 아빠 품에서 싫다며 뒤챈다. 그 뒤채는 딸아이 울음에 보는 이들의 가슴은 무너진다.

 영화는 육지에 있는 부녀와 그 앞에 펼쳐진 갯벌이란 공간을 대비시킨다. 부녀가 서 있는 지상과 부녀 앞에 내뻗은 갯벌 사이 경계선이 수평과 사선 방향으로 구획지어진다. 그러면서 강조되는 건 그 구획 짓는 선이다. 선 앞에 선 예솔의 들어가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역사적 참사를 재현해선 안 된다는 결기의 알레고리로도 여겨진다. 이 선을 <생일>이 담지하고 있는 '윤리의 경계선'이라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생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선을 넘지 않는 영화다.

 정일의 시점에서 출발해 극은 점차로 순남의 시점으로 이행한다. 두 시점이 오가기 시작하는 것도 순남이 정일에 대한 경계를 조금씩 풀면서다. 그녀의 행동은 정상의 범주를 얼마간 벗어난 듯 보이는데, 사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정일의 여동생 정숙(이봉련)이 말하듯, "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은 게 도리어 비정상"인 것이다.

극초반 순남은 기다렸다는 듯 남편에게 이혼도장을 내민다. 무심코 보상금 얘기를 꺼낸 정일을 거세게 몰아세우며, 수호의 생일을 준비하자는 권유 또한 단칼에 뿌리친다. 이 모두를 지켜보는 카메라 시선은 실상 정일의 시점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정일이 점차로 받아들여지면서 카메라는 천천히 순남에게로 들어간다. 그 이행의 순간은 부드럽게 처리된다. 그만큼 당사자 고통에 섣불리 진입하지 않으려는 사려 깊음이 여기엔 전제돼 있다. 딸과 둘이서 밥을 먹던 순남이 딸을 모질게 혼내다 집밖으로 쫓아내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이고, 유가족 엄마들과 섞이려 들지 않고, 수호의 죽음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하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이 사려 깊음이 전제된 다음의 일이다. 그런 뒤라야 우리는 아파트가 떠내려가듯 오열하는 순남의 고통에 완전히 이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수호의 생일에 이르는 것이다. 남겨진 가족과 더불어 수호와 한 시절을 난 지인들이 모두 모여든다. 수호와 동고동락한 친구들과 수호를 따르던 옆집 후배 우찬(탕준상), 수호 친구 부모들 모두 다 같이 앉아 있다. 이들은 저마다 한 움큼씩 떠난 수호를 회억回憶한다. 그 회억의 조각들이 꿰맞춰 짐으로써 형성되는 건 웃음이고, 눈물이며, 공감이다. 그리고 그리움이다. 그 웃음과 눈물과 공감과 그리움이 모이고 스며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애도의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미처 떠나보낼 수 없던 존재를 진정으로 떠나보내는 치유와 정화의 시간. 개중 절정은 어느 시인이 써 보낸 시가 우찬의 입을 빌어 낭송됨으로써 완성된다. 아들을 좀처럼 떠나보내지 못하던 순남도, 아들과 함께한 기억은 낙시터에서의 그것에 불과해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정일도, 이들을 둘러싼 모두도 이제 수호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된다.

 이종언 감독은 이 시퀀스를 다큐멘터리처럼 찍었다. 그렇게 처리한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건 개인적이지만 보편적이기도 한 것이었음을, 이 모두 허구 너머 지금 여기 현실 속 일이기도 함을, <생일>이 도달해낸 애도란 그러므로 스크린 너머 삶의 현장까지 가닿아야 하는 일임을 역설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일>은 화면 속 존재와 화면 바깥 존재 모두 애도의 순간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애도의 순간에 동참함으로써 흘러내리는 몇 줄기 눈물이란 치유와 정화로 나아가는 가장 진실된 눈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된 눈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건, 진정한 애도의 양식을 갖춘 윤리의 영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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