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산책] 브람스, 자유로운 그러나 고독한Frei Aber Einsam 정점
[클래식 산책] 브람스, 자유로운 그러나 고독한Frei Aber Einsam 정점
  • 한정원(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6.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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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낭만주의 시대였던 19세기말은 어느 때보다도 세기말적 혼돈이 가득했던 변화와 혁명의 시기였다. 예술가들은 기존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였으며, 새로운 문화적 욕구와 함께 문학적 표현 영역이 크게 넓어짐에 따라 기존의 내용과 형식보다 는 개인의 감정과 내면을 그려냄으로써 음악 또한 그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과 형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음악사에서 19세기 후반은 고전주의의 유산인 절대적 형식미가 아름다움의 표본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토벤이 이룩한 음악 형식의 틀에서 좀 더 다양하고 넓은 음악세계를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실험되기도 하였다.

 

  매혹적인 미소년 브람스의 등장

  파란 눈동자와 밝은 금발, 하얀 얼굴의 매혹적인 미소년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 거장 슈만으로부터 차세대 음악계를 이끌어갈 후계자로 인정 받은 열아홉 살의 청년 브람스를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브람스는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의 반주자로서 연주 여행을 함께 하였는데, 이 여행 중에 평생의 절친 요제프 요아힘을 만난다. 당대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요아힘은 브람스의 연주를 듣고 슈만에게 그를 소개한다. 슈만은 1853년 10월 <음악 신보>에서 브람스를 “우리 시대의 이상적 표현을 해 줄 운명적인 사람”으로 대대적으로 알렸고, 이후 브람스는 음악가들이 주목하는 젊고 실력 있는 음악가로 우뚝 선다. 그는 슈만 부부와 좋은 관계를 줄곧 유지하였고, 슈만이 죽은 후에는 클라라 슈만의 후견인으로 남는다.

  브람스에게 요아힘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들은 전 생애 동안 음악적인 면으로나 개인적인 면으로나 큰 영향을 주고 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브람스는 그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많은 자신의 피아노곡들을 편곡하기도 했고 때로는 요아힘 자신이 그것들을 직접 편곡하여 연주하기도 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등은 요아힘의 활발한 편곡, 연주를 통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현 시대에 베토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를 자주 들을 수 있게 된 데에도 요아힘의 공이 아주 컸다. 피아노 연주만큼이나 바이올린 연주에도 능숙했던 베토벤은 5개의 피아노 협주곡과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쓴 반면 바이올린 협주곡은 단 한 작품만을 남겼다. 36세이던 그가 피아노 협주곡 5번을 바로 앞서 작곡한 이 곡은 빈 극장의 지휘자 겸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친구 프란츠 클레멘트의 특별 연주회를 위한 것이었다. 이 곡은 초연 이후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해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았다. 베토벤이 죽은 지 17년 만에 당시 12세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은 이 협주곡을 재해석하여 멘델스존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하였고 이후로 획기적 공연 레퍼토리로 그 가치를 새롭게 조명받게 된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며 지휘자였던 브람스는 쇼팽이나 리스트보다도 한참 뒤인 20여 년 후에 태어난 낭만주의 시대 끝 무렵을 살아간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신고전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음악사의 흐름으로 볼 때 소나타와 협주곡, 교향곡 등 기악곡의 형식들이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걸치며 완성되고 큰 맥을 이어왔다면,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카리스마를 가진 비루투오조들이 대거 출현하였고 음악극인 오페라, 교향시 등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에서는 베를리오즈, 독일에서는 리스트가 자유로운 시상을 담은 교향시라는 새로운 관현악을 만들었다. 그런 중에도 전통 형식을 유지하려는 경향과, 그 틀에서 벗어나려는 기운은 서로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베토벤이 죽고 난 후 독일 음악계를 이끌던 슈만은 ‘미래의 예술’이라는 명분 아래 전통적 음악 형식을 무시하고 현란한 실험을 서슴지 않는 진보 진영에 불안한 시선을 보낸다. 슈만이 이끌던 <음악 신보>는 새로운 편집장 브렌델 을 맞아 신문의 논조를 완전히 진보 세력을 지지하는 모드로 바꾼다. 이에 슈만보다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던 클라라와 당시 유력한 음악학자인 한슬릭이 힘을 모으자 동지들이 모여들었고, 멘델스존과 슈만 부부, 한슬릭은 절제와 균형 안에서의 이상적인 음악을 만들어가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 보수 진영인 그들은 급진적 변화에 대한 큰 우려를 나타냈으며, 그 선봉에는 베토벤의 계보를 이어 교향곡의 전통을 이어갈 젊은 음악가 브람스가 있었다.

 

  낭만성과 고전성, 바로크적인 면까지 받아들인 브람스의 음악세계

  진보 진영인 신독일악파의 대표 음악가 리스트와 바그너는 당대의 지휘자 한스 폰 뵐로와 함께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음악의 형식과 내용이 자유로웠고, 화성과 소재의 분방함을 외치며 교향시와 오페라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파격은 이른바 표제음악과 절대음악의 차이로 대비되며 논쟁을 이끌어낸다. 그리하여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은 이른바 ‘낭만주의자들의 전쟁’이라는 대립과 갈등 속에 놓인다. 바그너를 옹호하던 철학자 니체는 브람스를 향해 바그너를 반대하기 위한 반대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음악계는 둘로 나뉘어 각자의 방식대로 베토벤의 음악을 계승해간다.

  학자들은 바그너를 향해서는 완전한 낭만주의를 가장 한 고전주의자, 브람스를 향해서는 완전한 고전주의를 가장한 낭만주의자라고 칭하게 된다. 브람스는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리스트와 바그너라는 커다란 산 같은 음악가들과 당당하게 대결했다. 그는 모든 음악가들이 낭만주의라는 사조를 받아들이며 ‘미래의 음악’을 향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대 한가운데에 태어나, 특이하게도 슈만의 낭만성, 베토벤의 고전성, 바흐의 바로크적인 면까지 받아들인 음악적 천재였다. 다들 새로운 것을 찾아나설 때 그는 새로운 것과 옛 것을 동시에 찾아나선 것이다. 절친들과 함께 작곡한 F. A. E 바이올린 소나타처럼 본인의 자유로운 그러나 고독한 길을 기꺼이 걸어갔던 것이다.

 

 

* 《쿨투라》 2019년 6월호(통권 6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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